뉴스앤조이(그랜드 캐니언이 노아 홍수 때 생기지 않았다는 증거, 양승훈, 2016년 8 월28일)에 그랜드캐니언 형성에 대한 창조과학자들의해석에 대한 비판글이 실렸다. 이에 그랜드캐니언 창조과학탐사를 인도하고 있는 필자의 이에 대한 변론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이번글이 많은분들께 창조과학탐사에 대한 궁금증도 풀리는 기회가되기를 희망한다. 이번에는 양승훈 교수가 다루었던 사행천에 대하여만 반론을 내려고 한다.

사행천이란 뱀이 구불구불 기어가는 모습을 보이는 강을 의미한다. 그랜드 캐니언 아래 흐르고 있는 콜로라도강도 록키산맥에서 시작하여 콜로라도고원을 가로지르며 사행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상류로부터 글랜 캐니언, 마블 캐니언, 그랜드 캐니언을 이어서 구불구불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지도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된다(그림). 사행천 가운데 가장 유명한곳으로는 상류인 글랜캐니언에 말굽모양으로 휘어진 말굽 만곡(Horseshoe Bend)일 것이다. 이곳도 필자의 창조과학탐사의 경유지에 포함 되곤한다.

양승훈 교수의 앞선 글은 전체적으로 “사행 패턴은 느린 침식 하천의 특징”이므 로 “대홍수가 갑작스럽게 물러가면서 침식작용이 일어날 때는 구불거리는 캐니언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요약될 수 있다. 우각호도 언급했지만 이는 사행천의 일부이다. 대부분의 지형학 교과서에는 양 교수의 언급대로 사행천이 느린 하천에 의해 형성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현재’사행하고 있는 강들이 느린 속도로 흐르기 때문에 나온 동일과정 설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험에 의한 결과는 아닌 것이다. 실험에 의하면 사행천은 아주 거대한 유출량에 의해 빠르게 형성이 된다. 특별이 그랜드 캐니언과 같이 깎아지를 듯한 수직의 협곡의 경우는 더욱그러하다.

Read More

창세기 전반부에 관하여 자주 받는 질문 하나가 있다. 바로 창세기 1장과 2장의 내 용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다. 특별히 이 두 장 사이에 창조의 순서에 관 한 것이다. 이 질문은 창세기가 역사적 사실을 담은 기록이 아니라고 하는 타협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빠지지 않고 지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 부분에 대 하여 비교적 자세히 다루어 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1. 동물과 사람 창조의 순서
창세기 1장은 동물은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고 사람은 이들이 모두 창 조된 후에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반면에 2장은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 령이 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 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 라”(7, 8절)라고 한 다음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 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지으시고… 그것 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19절)고 기록 하고 있다. 여기서 2장에는 1장과 달리 인간을 동 물들 보다 앞서 지은 것 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단지 인간의 창조에 대한 언 급을 한 후 동물 창조를 언급했을 뿐이지 창조 순 서가 아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히브리 어 동사에 관하여 다룰 필요가 있다. 히브리어는 동사(특별이 행위를 묘사하는 동 사) 자체가 한국어나 영어와 같이 시간성에 시제를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끝 났느냐 아니냐의 완결성에 초점이 맞추어 있다. 그러므로 그 행위의 순서는 단어 자 체보다는 전체 문맥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과 같 이 명확한 순서가 명시된 창세기 1장에서 답을 찾아야 바른 해석이다. 이런 이유 때 문에 진화론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유대 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전혀 문제점을 갖지 않았다. 그 전체 문맥으로 볼 때 순서는 창세기 1장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히브리어 동사의 특징 때문에 유대 학자들은 창세기 2장 19절의 동사를 ‘지 으시고(formed)’가 아닌 ‘지으셨던(had formed)’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Read More

“왜 당신은 창세기를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창세기는 일종의 히브리 시가 아닌가? 그것을 진짜 역사로 취급할 필요가 없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창세기 1장에 “보시기에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그대로 되니라” 등 반복 되는 구절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실제로 많은 신학교에서 이와 같이 가르치 고 있으며, 이런 문학적 접근이 대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 면 창세기는 히브리 시로 분류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의 내적 근거를 바탕으로 문학 적 접근을 시도하더라도 창세기가 시일 수 없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한 마디로 히브리 서술형의 산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창세기는 실제 역사의 기록일 뿐이다.

히브리 시와 산문의 차이점
창세기가 시로 분류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산문인지를 알기 위해서 먼저 히브 리 시와 다른 언어의 시의 차이점을 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 시는 영어 나 한국어의 시와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한국어나 영어의 시는 말의 “하드웨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즉 시가 되기 위해서 는 “소리”가 중요하다. 반면에 히브리 시는 “소프트웨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즉 소리가 아니라 “의미”가 중요한데, 소리가 아니라 사고의 대꾸(병행)가 드러난다.
예를 들어 한국의 시조로 유명한 고려 말 이방언의 ‘하여가 ’ 를 예를 들어보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Read More

진화 순서뿐 아니라 진화 과정까지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창조과학자나 지적 설계 운동가들이 확률을 통해 진화의 불가능성을 설명하는 자세까지 비판하기도 한다. 아래가 그 예들이다.

“우연이라고 설명되는 현상이 설계를 배제한다고 생각하나? … 신이 우연한 사건을 이용하여 특정한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게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신이 그렇게 의도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이런 예가 많다. 하나님이 제비 뽑기를 통해 자신의 뜻을 알려 주는 경우가 꽤 있다. 제비를 뽑아서 한 사람이 당첨되는 것은 과학적으로 볼 때 외부의 통제나 방향성 없이 발생하는 우연한 사건이지만, 하나님은 그 사건을 사용해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신다…”1

“이처럼 무작위적(또는 우연)이라는 단어의 과학적 사용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아무런 모순 없이 어울린다.”2

“하나님은 제비 뽑기나 유전자 돌연변이와 같은 특정 현상들을 과학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나도록 설계해 두셨다. 하지만 일부 무작위적 현상이나 모든 무작위적 현상에 대해 하나님은 한 가지 특정한 결과가 나오도록 정해 놓으셨을 수도 있다.”

“확률적으로 대단히 희박해보이지만, 우주의 여러 특성은 생명이 존재하기에 정확히 조율되어 있다.3

Read More

타협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 들은 ‘우주와 생물 진화를 인정 하고 진화 이론을 수용한다’ 고 하며하나님께서수십억년동안 생존경쟁, 적자생존, 자연선택 등의 과정을 통해 진화와 멸종 을 허용하셨다고 주장한다. 또 는 “지질 시대를 그대로 인정한다” 라고 말하며 창조와 멸종을 수없이 반복 하셨다고 한다. 이와 같이 타협 이론에서 가장 쉽게 드러난 문제점은 이들이 주장하는 바가 성경 기록과 모순되는 것인데, 특별히 성경 전체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바꾸거나 부인한다는 점 이다. 아래는 성경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일관되게 보여주는예들이다.

1.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다.
‘거룩’이란 의미는 불완전, 죄, 피조물과의 구별된 완전하고 깨끗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 한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 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출 15:11)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 나님같은반석도없으심이니이다”(삼상2:2)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창 2:3). 자신의 성품을그피조물에 그대로 드러내셨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그분은 흠이 없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지 않은자들을 심판하실수 있으시다.

2. 하나님께서는 거짓이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거짓말하지않으신다.그분은추측하 지 않으신다. 실험도 하지도 않으시며 그런 시도를 할 필요가 없다. 하위의 것부터 만드실 필요도 없고 그렇 게 하지도 않으셨다. 단지 옳은 일만 하신다. 우리를 속이지 않으신다. 과거에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하지도 않으신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 분은 후회도 없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유일하게 무한히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분 이시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없으시도다.”(민23:19).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6:18)

Read More

예수님의 족보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서로 다른 이유

창조과학 사역은 단지 창조에 대한 부분 뿐만 아니라 결국 성경의 무오성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과학 영역뿐 아니라 성경 전반에 걸친 질문을 받을 경우가 종종 있다. 여기서 다룰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의 예수님 족보가 다른 이유에 대한 질문은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두 족보는 겉보기에도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중복되지 않는다. 특별히 이 두 족보를 보면 얼듯 보기 에는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의 아버지가 두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먼저 족보 전체를 보자면 마태복음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하향식으로 내려가서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로 끝을 맺는다. 반면에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가르치심 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로 시작해서 상향식으로 올라가 “아담 그 위는 하나님”으로 마무리한다. 아브라함부터 두 족보를 비교하면 다윗까지는 서로가 맞아 떨어지지만 다윗 다음부터는 전혀 다른 족보가 이어진다. 마태복음은 다윗 다음으로 솔로몬이 등장하며 왕들이 이어지지만, 누가복음에는 나단이 등장하며 왕 이 아닌 사람들로 이어진다. 마태복음에서 왕들의 이름은 여고냐(=여호야긴, Jeconiah)를 끝으로 사라지게 된다(마 1:11). 이는 여고냐의 악한 행동 때문에 다윗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다시 없을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그대로 사용 한 것이다.“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는 그(여고냐)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렘 22:30). 그러므로 여고냐 다음 사람 부터는 왕은 등장하지 않는다.

Read More

지금까지 수회에 걸쳐 진화론의 등장과 함께 만들어진 여러가지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하여 다루어 왔다. 그렇다면 이런 유신론적 진화론은 어떤 역사적 변화에서 일어났 을까? 중세 말에 교회가 타락했을 때 유럽에서는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는 교 회 안에서의 각성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교회 밖에서의 변화다. 교회 안에서 성경으 로 돌아가려고 했던 몸부림이 바로 종교개혁(1517년)이며, 한편 비슷한 시기에 교회 밖 에서도 일어난 변화를 계몽주의라고 부른다. 계몽주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성에 대 한 신뢰이다. 이 두 변화가 일어난 때부터를 우리는 근대라고 부른다. 근대의 시작인 계 몽주의가 태동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을 한 명 꼽으라면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카르트(프랑스, 1596-1650)이다. 잘 알려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 재한다”라는 그의 말은 계몽주의 철학의 근본 원리가 되었다. 즉 사고하고 있는 자신 을 첫 시작으로 본 것이다.

이성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에게 넣어주신 참으로 귀중한 사고의 능력이지 만, 이는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질 때에만 바르게 사용된다고 성경은 말한다. “여호 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beginning, 시작)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 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즉 여호와를 통하지 않은 지식과 지혜는 이미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며 결국 미련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가 말한 “생 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말은 성경이 말하는 순서와 반대이다. 실제는 거꾸로 “존 재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바른 순서이다. 자신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을 먼저 인식하고 난 후 생각하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자신이 존재하지도 않는 데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존재가 먼저이고 생각이 나중이다. 하나님 을 뒷전에 놓은 교만한 발상에도 불구하고 이 짤막한 문장은 유럽 사람들의 사고의 자세를 바꾸는데 중요한 획을 긋는 명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18세기부터 자연 과학에도 향을 주기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과거를 알고자 하는 역사 과학 역까 지 번져나갔다.

Read More

1800년도 말에 진화론교육으로 인해 기독교인들도 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성경이 기록된 그대로 사실이라는 생각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 이 흔들리는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두 가지 자세를 취하였다. 하나는 진화론과 “절충”하려는 것과 다른 하나는 “회피”하려는 자세이다. 지난 호까지 다루었던 유신론적 진화론류 즉 간격이론, 점진적 창조론, 다중격변론 등은 모두 수십억 년의 지구 나이를 말하는 진화론과 절충하려는 타협이론들이다. 실제로 이런 이론들은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과학적으로나 성경적으로 양쪽에 모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반면에 진화론적 접근을 회피하고자 하는 자세에서 비롯된 이론이 나왔는데 이제부터 다루고자 하는 구조 가설(Framework Hypothesis, 또는 골격 해석)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1924년 네델란드 신학자인 누릇지즈(Arie Noordtzij)에 의해 시도되었고 약 30년 후에 클라인(Meredith Kline)과 리더보스(N. H. Ridderbos)에 의해 각각 미국과 유럽에서 인기있는 이론이 되었다. 구조 가설은 한마디로 창세기를 역사적 사실이 아닌 문학 장르로 보며 상징이나 시적 표현을 찾으려는 시도다. 구조 가설은 최근 구약 신학계에서 창세기를 해석하는 가장 인기있는 방법이며 가장 마지막 시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그러나 이들이 진화란 단어를 언급하지 않아서 그렇지 구조 가설을 주장하는 근본적인 동기는 성경이 역사적 사실로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런 시도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창세기의 창조 주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젊은 지구론자들을 논박하는 것이 이 글의 중심 목표입니다…. 시간의 틀에 관한 결론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가설을 세우는 데 있어서, 과학자들은 성경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라고 솔직하게 이야기 한다.

Read More

양승훈 교수(2006, 창조와 격변)가 주장하는 다중격변론은 ‘하나님께서 수십억 년 동안 진화의 순서로 창조와 멸종을 반복하시다가 인간을 창조하였는데 멸종시킬 때마다 노아홍수와 같은 격변을 일으키셨으며, 그 격변은 지구 밖에서 날라온 운석에 의해 발생했다’는 식의 진화론과 창세기를 타협시킨 이론이다. 지난 호에서 이 이론의 과학적 문제점에 초점을 맞춘 반면 이번에는 성경적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

다중격변론은 기본적으로 점진적 창조론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앞서 다루었던 점진적 창조론과 같은 성경적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있다. 실제로 그의 책 안에서 점진 적 창조론을 창시한 휴 로스의 생각을 지지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는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1. 성경 자체에 언급이 있는가?
다른 류의 유신론적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다중격변론의 첫 번째 문제점은 인간 창조 이전에 수많은 격변이 있었다는 기록을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창세기 1장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지구, 우주, 식물, 동물, 사람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진화의 순서로 창조하셨거나 이 생물들을 다시 멸종시켰던 흔적이 없다. 더군다나 멸종시킬 때마다 격변이 일어났다는 기록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다중격변이란 발상은 시작부터 성경과 무관하게 시작된 것이다. 지구가 겪은 적이 없는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라는 상상의 진화 역사를 주장하고자 만든 작품이다. 만약 저자가 주장하는 생물들을 멸종시킬 엄청난 격변이 수십억 년 동안 수없이 발생했다면 성경 어딘가에 이런 분위기가 감지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Read More

창조와 멸종이 반복될 때마다 격변이 발생(1): 과학적 문제점

최근에 한국 기독교계에 어떤 때보다도 유신론적 진화론의 거센 바람이 불고 있다. 진화론이 등장한 이래로 유럽과 미국을 건너 드디어 한국에서도 일고있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캐나다 VIEW 원장으로 있는 양승훈 교수의 ‘다중격변론’이다(창조와 격변, 예영, 2006). 다중격변론은 한마디로 앞서 언급한 점진적 창조론에 격변설을 첨가한 이론이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와 멸종을 수십 억 년 동안 반복하다가 아담을 창조 하였는데, 멸종이 일어날 때마다 홍수 심판과 같은 격변이 일어났다는 이론이다.

그 내용뿐 아니라 이론의 발생한 동기도 점진적 창조론과 유사하다. 진화론자들이 1980년대에 전이 화석이 부재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종류에서 종류로 변하는 대진화에 대한 증거의 부재가 나오자 하나님께서 수십 억년에 걸쳐 진화의 순서대로 창조(!)하였다는 점진적 창조론이 등장했었다. 즉 진화론자 스스로 인정한 부분만 인정하고 나머지 빅뱅, 수십억 년의 지질시대표, 동위원소 방법 등 여전히 버리지 않은 진화론적인 것들은 그대로 수용하자는 것이다.

한편 다중격변론은 최근의 지질학계의 변화에 따라 등장한 이론이다. 지질학은 19세기 초에 지층이나 산들과 같은 대상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퇴적되고 침식되는 자연 과정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여기는 ‘동일과정설’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 동일과정설은 20세기에 들어서기 전에 지질학의 커다란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때부터 지구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오랜 역사를 겪은 것으로 해석되었으며 1872년에 화석들을 진화 순서로 모아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식의 지질시대표가 기본적으로 완성(!)된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중반부터 학계 안에서 동일과정설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여러 지역에서 격변에 의해 지층 형성이 관찰되었고, 산과 골짜기 역시 격변적 침식 과정으로 형성되었다는 격변론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다중격변론은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등장한 것이다. 점진적 창조론과 마찬가지로 진화론자들이 자세를 바꾼 부분만 바꾼 것이다. 한편 진화론자들이 여전히 붙들고 있는 수십억 년의 지질시대표는 여전히 고수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울러 그 격변의 원인으로 외계에서 날라온 운석을 꼽았다.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