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뉴스레터]

동성애자들의 리더들 가운데 동성행위의 타당성을 동물에서 찾으려 하기도 한다. 실제로 동물들은 교배 시기가 아닌 경우에는 암컷끼리, 수컷끼리 따로 모여 살기도 한다. 그들은 이런 모습을 통해 동성애를 합당화하고자 한 것이다. 동성애 지지자인 Smit는 이렇게 말했다. “동성행위는 연구된 대부분의 동물에서 관찰 되어왔다. 포유류와 같은 고등 동물로 갈수록 겉보기에 더 많은 동성행위를 보게 된다.”[1]
그러나 위와 같은 언급은 동물들에 대한 아주 제한적인 이해에서 온 것이다. 실제로 동물들이 같은 성끼리 모여있다고 할지라도, 그들 간에는 동성 간에 어떤 성적인 동기도 없으며, 더욱이 성관계는 전혀 갖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관찰 결과는 동성행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어떤 동물도 없다는 점이다.[2]

그렇다면 이들은 왜 동물에서 자신이 행하고 있는 동성애의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것일까? 그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면 잠재된 진화론적 세계관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동성애자들의 글을 보면 직접 어떤 경우는 간접적으로 표현될 때도 있는데 바로 진화론에 대한 언급이다. “동성애나 이성애의 기원에 대한 이론은… 진화론적 생물학과 성 분화의 발생학에서 그 기원을 가진다.”[3] 이 글을 쓴 Money도 성은 진화되는 과정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동성애의 당위성을 펴나가고 있다. 왜냐하면, 결국에 동성애도 다른 도덕적인 문제와 마찬가지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정체성(identity) 문제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글 안에서 진화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기도 한데, 이는 저자가 진화라는 실체를 스스로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진화론적 세계관을 사실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성에 대한 기원을 진화론에서 찾을 수 있을까? 진화론자들이 진화과정으로 가장 강조하는 것이 바로 자연선택이며, 자연선택을 받은 생물들이 더 많이 살아남는다는 것이 자신들의 이론이다. 자연선택으로 보자면 동성애자가 선택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동성애자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은 생산 능력이 없다!

진화론자 대부였던 Gould는 “결론적으로, 생존과 재생산의 유리함 외에는 판단이란 있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4] 진화론자인 Ruse도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동성애에 관한 모든 진화론적 이론은 부적당하고, 문제가 있다.”[5] 그럼에도 많은 진화론자가 동성행위를 옹호하고 있다는 것과 동성애자들이 진화론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진화론자들은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남녀의 성 구분도 진화의 과정인 자연선택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성적충동도 그런 경쟁과 선택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직도 남녀의 성 분화를 설명하는 어떤 타당한 진화론적 이론도 없다.

진화론자들은 동성을 이성보다 더 진화된 상태로 보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이성으로 나뉘었다면 이는 진화론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동성이 진화과정을 거쳐 이성으로 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성적충동도 생존경쟁의 원리인 이성 간의 성적 선택(sexual selection)인 경쟁의 과정으로 적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성의 구분이 없던 상태에서 분리되어 암수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론은 각 동물의 암수 비율이 일정하게 유지한다는 것을 이해시킬 수 없다. 특별히 사람은 왜 1:1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설명하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은 진화는 진화 자체로 모순되고 이 모순된 이론에 성 분화를 설명해야 할 고 여기에 동성애를 꿰맞추려는 모순과 모순으로 가득 찬 불가능한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동성애가 진화론과 깊이 연관되었다는 것은 동성애자에 대한 사고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동성행위는 단지 오늘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 모든 사회에도 있었다. 구약시대부터 동성행위에 대한 경고를 해왔던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창 19장, 레 18:22, 20:13). 그러나 현재와 같은 동성애자에 대한 관점은 1800년도 말부터 근거를 둔다. 그 이전에는 동성애자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했느냐?”라고 질문을 던졌었다. 즉 이들이 한 것이 하나의 성적 취향으로 “옳으냐, 틀리느냐?”가 초점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이를 잘못된 성적 취향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누가 이런 일을 했느냐?”로 질문이 바뀌었다. 즉 동성애자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분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Foucault의 표현은 이를 잘 반영한다. “그때까지는 동성애자들이 잠정적인 정신이상자에서 지금은 하나의 ‘종(species)’이 되어버렸다.”[6] 성경은 동성애를 이를 행하고 있는 어떤 사람으로 분류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릇된 성적 취향을 지적 하는 것이다.

과연 1800년 중반에 지구 상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현대사에 가장 큰 획(!)을 그은 책이 출판되지 않았던가? 바로 1859년에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과 함께 진화론이 대두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성경을 떠나 진화론적으로 모든 것을 다시 해석하기 시작했다. 진화론적 흐름을 타고 결국 동성애도 타락된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보호받아야 하는 특별한 존재로 둔갑한 것이다. 이미 언급했던 동성애자들이 생물학적으로 당위성을 찾으려고 하는 것도 동물을 보며 자신의 행위를 합당하다고 말하려는 것도 그 근본을 보면 내면 깊숙이 스며있는 진화론의 표출이다.

일단 동성애가 그릇된 ‘성적 취향’에서 ‘동성애자’라는 인정해야 하는 존재로 분류되기 시작하자, 그들에게 권리가 부여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른 파급효과는 다음 호부터 다룰 내용이다.

  • 이재만 / 창조과학선교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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