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뉴스레터]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 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1, 12).

물이 한곳으로 모이며 드러난 뭍에 식물을 창조하시는 장면이다. 모두 하루 안에 일어났다. 여기서 식물을 세 가지로 구분하셨는데, 풀, 채소, 과목이다. 이들은 후에 창조될 동물과 사람의 먹을거리가 된다.

식물을 창조하실 때 세 번씩이나 등장하는 단어가 있는데 “종류”다. 히브리 원어로는 민(min)이란 단어인데 영어로는 kind로 번역되었다. 히브리어 원뜻은 ‘한 계가 지어졌다(defined)’란 의미다. 더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 찾아보는 것이 분명할 텐데 노아 홍수 당시 동물들을 방주에 넣을 때 구체적으로 정의한다.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 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창 6:20).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창 7:3).

그러므로 방주에 동물들을 종류대로 넣는 목적은 씨를 유전케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종류란 단어는 생물학책에 등장하는 용어는 아니다. 생물학책에는 종 (species)란 단어를 쓴다. 종이란 용어는 영국 사람인 존 레이(John Ray, 1628- 1705)가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이어 생물분류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카를로스 린네(스웨덴, 1707-1778)가 생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기 시작하면서 정착되었다.

아직 유전법칙(1866년)이 발견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모양을 통한 형태학적인 분류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1900년 초부터 유전법칙이 생물학계에 알려지면서 1900년도 초부터 종에 대한 정의에 수정의 필요성이 제기되어왔는데, 오늘날에는 개체 사이에 교배가 가능한 무리를 지칭한다. 그러나 그 정의만큼 종이 명쾌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생물에게 교배를 시도해봐야 하는 어려움도 있으며 어떤 경우는 외견상에는 차이가 있으나 교배를 하여 자손을 남기는 경우가 있고, 또 어떤 경우는 형태학적으로는 유사한 모양을 가진 듯하면서 교배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종에 대한 정의가 형태학적 특징에서 유전학적 한계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생물 분류학자들은 새로운 분류방식이 기존 방식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늑대, 카요티, 딩고, 개들은 염색체 숫자가 78개로 같으며 서로 교배가 가능하다. 이들 각각은 기존의 분류방식으로는 개과라는 한 과에 속해있지만 각기 다른 종으로 분류되었었다. 그러나 새로운 분류방식으로 는 모두 한 종으로 묶을 수 있다. 고양이와도 마찬가지다. 호랑이, 사자, 고양이 등은 기존에 각기 다른 종으로 분류되었지만, 염색체 숫자도 38개로 같으며 직접은 아니지만 자연 교배로 유전자의 상호교환이 가능하다. 이처럼 교배의 한계로 정했을 때 가장 가까운 것은 ‘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물분류학자들은 새로운 정의를 제안하고 어떤 자세를 취했을까? 모든 새로운 분류방법으로 다시 재편성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기존의 분류 방식을 그대로 놔두었다. 실제로 종 분류를 재편성하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먼저 새로운 방식에 대한 학자들의 동의, 이해, 교육 등이 이루어져야 하고, 기존 논문들도 다시 조정해야 한다. 여기까지 이루어졌다고 할지라도 각 동식물의 염색체 숫자도 세어보아야 하고, 교배가 가능성도 실험해보아야 한다. 아울러 새로운 분류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 학자들에게 의무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미 보편화한 기존 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 학문의 슬픈 상태다. 왜냐하면 대다수 일반인들에게 여전히 혼돈을 주기 때문이다. 종의 기원에 대한 세미나를 할 때면 거의 빠지지 않고 “라이거는 어떻게 된 거예요?”라는 질문이 등장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교과서에는 종이라는 정의를 서로 교배가 가능하다고 적어놓았지만, 분류학 도표에는 기존의 형태학적 분류를 그대로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봄이 되면 각 종류의 꽃들이 피고, 벌과 나비가 온갖 꽃들을 누비면서 날아다닌다. 이들은 꽃들에 도달할 때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꽃가루가 몸에 묻게 된다. 진달래, 개 나리, 호박꽃… 그런데 벌과 나비의 몸에 각종 꽃가루가 묻어있어도 진달래 암술은 정확히 자신의 꽃가루와 반응한다. 나중에 보면 진달래 꽃은 언제나 진달래를 낳고 개나리 꽃은 개 나리만을 낳는다. 그렇지만 같은 종류 안에서도 다양한 모습의 진달래와 개나리 꽃을 볼 수 있다.

언젠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종의 기원에 대한 세미나를 할 때, 앞에 앉아계시던 한 권사님의 툭 던진 말씀이 장내를 웃음바다 로 만들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을 뭐 그렇게 길게 하는 거예요!”

  • 이재만(창조과학선교회 부회장)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