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을 믿는가 성경을 믿는가
[2013년 8월 뉴스레터]

우리는 모두 신념이 있다. 그리고 그 신념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평화가 올 것이라는 신념,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신념, 성공할 것이라는 신념 등. 신념이란 사람들을 뛰게 한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실로 드러날지 아닐지 알 수 없어서 사람들을 더 열정적으로 만든다. 강한 신념은 더 큰 열 정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신념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진정한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설령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 자신이 하는 작은 노력 하나는 결과에 상관없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그런 작은 노력 하나는 더 의미 있어진다. 따라서 일말의 회의는 오히려 신념을 다잡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렇게 보게 되면, 중요한 것은 세상이 정말 변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내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된다.
오늘날 실존주의의 시대에 교회에서도 믿음 대신 이런 “신념”을 흔하게 보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무신론이 점점 더 팽배해져 가고, 선한 영향력을 잃어가는 제도화되고 경직화된 교회를 보면서, 거대한 자연재해와 악해져 만 가는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란 쉬운 것이 아니다. 여러 신학자들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에 의해 쓰인 여러 문서를 멋대로 모아놓은 책이라고 가르치고, 무신론적 자연주의자들이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라 자연적 진화의 산물이니 창세기는 신화라고 가르치고, 종교적 선생들이 예수는 신이 아니라 위대한 한 스승이었다고 가르치는 세상에서, 성경과 그리스 신화의 차이를 제대로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실재”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 즉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윤리적으로 옳은 말일 뿐 아니라 “사실”을 알려주는 말씀이며, 우리에게 온전히 전해진 바 되었다는 것을 믿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 자연주의적 무신론과 실존주의가 공존하는 시대에 하나님의 실재하심, 예수님의 부활 하심, 성령님의 역사 하심은 하나의 “신념”이 되었다. 하나님의 실재하심, 예수님의 부활 하심,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해 신념을 가진다. 혹은 하나님은 실재하시고,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성령님은 역사하시지만, 성경에 쓰여 있는 대로는 아니고, 상식선에서 “어떤 의미에서” 실재하시고 “어떤 의미에서” 부활하셨고 “어떤 의미에서” 역사하신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그래서 사실이기보다 우리끼리의 약속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처럼” 이야기하고 행동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겉으로 보기에는 강력할지 모른다. 그런데 거기에는 근본적 불안함이 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우리에게 에너지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시자고 믿는 “우리의 신념,” 그 불완전한 심리적 다짐이 우리에게 에너지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젠가 고갈될 수밖에 없다.
절대자가 아닌 상한 갈대 같고 흔들리는 촛불 같은 우리 자신을 믿음의 근원으로 삼으라는 세상에 우리는 던져졌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창조주가 아니라 우리의 신념, 매일 흔들리지 않기로 다짐을 하고, 서로 약속을 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추구하는 “나의 신념”의 대상은 아닌가. 성경이 진리의 말씀임을 알고 우리 믿음의 근원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성경으로 다시 옮기지 못하면 우리는 진지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확신의 기쁨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강도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근원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누
사복음 18:8)”고 한탄하셨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물으신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26)”
- 최태현 박사 (행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