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뉴스레터]

저자 우종학 박사는 창조과학을 비판 하는데 한 단원을 할애 했을 뿐 아니라, 책의 여러 부분에서 창조과학을 비판한다.그 예들을 살펴보자.

솔로몬 성전의 물통
저자는 미국 창조과학 연구소의 창시자인 헨리 모리스 박사를 예로 들며 그 분이 ‘성경을 과학 교과서’로 봐야 된다는 주장을 비판한다(p. 110). 그러나 단순히 이 구절만으로 비판할 내용은 아니다. 모리스 박사가 과학 교과서라고 말한 것은 성경이 천체의 위치와 궤도를 설명한다든지, 지구의 구성 물질 언급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과거 역사(즉 역사과학)는 거기 계셨던 창조자를 통하여 가장 쉽게 알 수 있으며 과학자들이 갖고 있는 증거들이 그 창조자가 계시한 성경과 일치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어 열왕기상 7장에 등장하는 솔로몬 성전의 물통(바다) 규격이 수학적으로 맞지 않는 것을 예를 들며 모리스 박사의 자세를 비판한다(p. 112). 비판 이유는 성경에서 물통의 규격이 “지름이 10자요, 둘레는 30자”라고 기록 되었는데, 둘레는 지름의 3.14배이기 때문에 지름이 31.4자가 되어야 하는데 30자라고 하는 것은 수학 지식과 위배된다는 말이다. 이 비판은 저자가 KOSTA나 여러 세미나에서 여러 번 거론했던 바이기에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겠다.

이는 저자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생각이다. 물통에 대한 설명 중에는 23절의 지름과 원주 외에 26 절에 물통에 대한 중요한 요소가 명시 되어 있다. “두께가 한 손 너비(약10cm)만 하다”고 물통의 두께가 기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두께를 적용하면 물통의 규격은 성경 기록과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1규빗을 46 cm로 보면, 물통의 외곽 지름인 10규빗은 460 cm며, 둘레인 30 규빗은 1,380 cm다. 물통 둘레 1,380 cm을 가지고 역으로 물통의 지름을 계산하면 440 cm(≈1,380 cm/3.14)가 나온다. 즉 물통 지름에서 20 cm 가량이 부족한 것처럼 생각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지름은 물통 외곽의 지름이며 둘레는 물통 내곽의 둘레인 것이다. 물통의 두께가 약 10 cm라고 할 때 양쪽을 적용 시켜야 하므로, 내곽 지름440 cm에 두께20 cm를 더하면 정확하게 외곽 지름인 460 cm가 된다. 이 물통의 규격을 기록하는 방법은 참으로 지혜로운 방법이 아닌가? 3.14(π)라는 것이 무리수이기 때문에 정확히 적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두께 또한 정확한 계산이 나올 수 없다. 이 때 외곽 지름과 내곽의 둘레만 알려주면 자동으로 그 두께가 나오니 말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 두께가 한 손 너비인 약 10cm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단지 열왕기상 7:26은 무시하고 7:23만을 갖고 “솔로몬의 성전 기구들에 대한 묘사는,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 주는데 있는 것이지 수학적 원리를 주려는 목적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성경 구절이 수학적 원리를 주려는 목적이 아니었을지라도 어떻게 물통을 지으라는 정확한 규격이 기록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사실 이런 궁금증에 대한 내용은 기존 크리스천과 창조과학자들 가운데서 이미 설명되어 왔던 것이다(Harold Lindsell, Battle for the Bible, 1976, The Zondervan)(Henry Morris, Henry Morris Study Bible, 2012, p. 541, Master Books). 저자가 이 물통을 가지고 이 책에서나 세미나를 통해서 성경에 대한 그릇된 비판을 주었던 것을 어떻게 회수할 수 있을지 안타까울 뿐이다.

창조과학은 안식교에서 출발했다.
저자는 창조과학의 출발을 제칠일안식교의 극단적인 문자주의 성경 해석의 전통에서 왔다며 비판한다. 사실 이런 질문은 창조과학을 비판하는 크리스천 들에게 종종 접하는 질문이기에 이 기회를 빌어서 대강 설명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창조과학자들이 홍수지질학을 언급한 안식교인인 맥크리디 프라이스(George McCready Price, 1870-1963)를 따른다고 말한다. 실제로 프라이스는 저자가 말한 것처럼 안식교인이다. 그는 과학과 성경에 대하여 높은 지식을 가진 소유자였으며, 그리고 홍수 지질학에 대하여는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설명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하여 분명히 해두어야 하는 것은 창조과학자들이 그의 지질학적 해석을 공유하는 것이지 성경의 교리에 대하여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 창조과학 운동의 아버지인 헨리 모리스 박사도 그의 홍수지질학에 대한 업적에 대하여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나 “나는 침례교인으로서 그의 종말론과 구원론에 대하여는 분명히 반대한다”고 선을 그었다(History of Modern Creationism, 1993). 미국 창조과학 연구소에 소속된 사람들중에 안식교에 소속된 사람은 한 명도 없으며 모두 거듭난 크리스천들이다. 단지 과학적 해석에 대한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안식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말은 언어 도단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저자는 창조과학자들이 문자적으로 6일 창조를 믿는다고 해서 이단인 안식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만약 이단으로 규정할 때,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기 때문에 이단 단체로 묶어서 취급 하려는 태도가 옳을까, 아니면 오히려 6일 동안 창조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이단 규정이 적용 되어야 옳을까?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마틴루터가 “6000년 전에는 세상이 없었다”고 했는데, 6일간의 창조를 믿는 그가 극단적인 문자적 해석자인가?

과연 자신이 6일 동안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6일 동안 창조하셨다고 직접 말씀 하신 하나님은 누구며(출 20:11), 안식일을 범하는 자를 죽이라고 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출 35:2)? 실제로 그렇게 창조하지도 않으셨는데 안식을 범하는 자를죽이라는 것일까? 실제로 본인이 안식하지도 않았는데 안식하셨다고 하신 것일까? 그러면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 예수님은 누구인가(막 12:8)? 그 분이 부활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우리 크리스천은 무슨 일을 하고 있단 말인가(눅24:1)? 과연 창세기 1장의 하루를 하루로 믿지 않는 다면, 하나님께서 돌판에 세기신 십계명과,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범한 자들에게 내리신 조치와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안식일의 주인은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이단 들은 우리가 6일 동안 창조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비웃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성경기록을 믿지 않기 때문에 비웃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창조론 사역은 안식교인만이 했던 것이 아니라 개신교 안에서도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꾸준히 진행해왔었다. 과학과 신학을 공부했던 루터교 목사 바이런 넬슨(Byron Nelson)의 “돌 속의 홍수 이야기(Deluge Story in Stone, 1931)”는 창조론적 지질학의 뛰어난 책으로 꼽힌다. 그의 “종류대로(After Its Kind, 1932)”와 “아브라함 이전(Before Abraham, 1948)”도 그의 역작이다.

그 밖에 “진화에 대한 에세이(Essay on Evolution, 1925)”와 “하나님과 우주(God and the Cosmos, 1943)”를 쓴 데어도르 그래브너(Theodore Graebner), “홍수(The Flood, 1951)”를 쓴 알프레드리 윈클(Alfred Rehwinkel), “크리스천을 위한 매일 과학(Everyday Science for the Christian, 1947)”과 “창조-사실, 이론, 그리고 믿음(Creation- Facts, Theories, and Faith, 1953)”을 쓴 데어도르 헨드리치(Theodore Handrich) 등 (여기서 지면상 모두 소개하지 않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 모른다! 가까운 미래에 뉴스레터를 통해서 현대 창조과학 역사에 대한 내용도 소개할 예정이다). 이런 수많은 사람들은 진화론의 세파 속에서 소위 말하는창조과학의 위치에서 글을 썼다. 그럼에도 자세한 역사적 연구 없이 한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며, 성경 그대로 적혀있는 6일 동안 창조하신 것을 믿는다고 해서 창조과학을 안식교에 뿌리를 두었다는말은 참으로 책임 없는 자세가 아닌가?

창조과학자들이 하는 일은 과학이 틀렸음을 말한다.
“창조과학자들이 주로 취하는 방법은 과학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p. 140). 저자는 여기서도 ‘진화론’이란 단어를 넣어야 할 곳에 ‘과학’이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잘못된 편견을 심어준다. 창조과학자들은 ‘과학’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증거와 방법들을 통해서 ‘진화론’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위의 문장에서도 과학 대신에 진화론을 넣어보라. 창조과학의 올바른 정의로 바뀐다.

쉽게 말하자면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이나 화석에서나 전이생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생물들을 교배할 수 있는 단위(종, 속, 또는 과)로 묶을 수 있으며, 돌연변이나 자연선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이 단위가 바뀌는 예를 관찰하거나 실험에 성공한 예가 없다. 이 결과 진화론은 과학적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님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생물들을 창조 하실때 “종류대로”라는방식을 사용하신 것이 증거와 잘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창조과학 내용이 국제적인 학술지에 실리지 않았다.
“창조과학은 과학이라 할 수 없네. 과학계에서 인정할 수 있는 새로운 과학 방법론을 창조과학자들이 제시한 것도 아니고…”(p.139). 저자는창조과학자의 글을 국제적인 학술지에 실릴 수도 없는 학문활동을 하는 알맹이 없는 빈약한 주장이라고 치부하였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비판은 잘못된 것이다. 창조과학자 중에는 네이처지나 사이언스지에 논문을 수록한자도 있고, 노벨상 후보에까지 올라간 자도 있다. 또한 현재도 과학분야에서 자신의 분야에서 활발하게 연구 활동을 하는 자들도 많이 있다.

또한 이런 식의 비판은 과학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자세다. 학술지의 수록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큰 부분은 당시의 우선하는 패러다임에 의해서 결정된다. 실제로 19세기 말부터 수십 년간 학술지에 실리지 않았던 것은 창조과학자들의 글만이 아니었다. 지질학적 증거들이 짧은 기간에 격변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문은 어느 지질학자든 지 그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지질학계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제로 격변에 의해 지질과정이 형성된다는 논문들은 1970년대 들어서야 조금씩 등장했고 학계에서 받아 들여졌다. 이는 설득력 문제보다는 분명 패러다임의 문제인 것이다.

저자는 지동설이 등장한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케플러가 타원의 법칙을 통해 수학적으로 지동설을 증명하기까지를 설득력의 문제로 설명했다. 그 사이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의 증거를 제시했지만 설득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지동설로 전환시키는데 실패했다고 말했다. 즉 패러다임보다 설득력이 약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쉽게 선후를 내세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만약 당시에 천문학자들이 지동설을 믿고 있었다면 갈릴레오의 증거들을 쉽게 받아들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계 안에서 이런 예들은 너무나 많이 들 수 있다. 미생물학의 아버지인 파스 퇴르(Luis Pasteur)가 탄저균 백신을 개발했을때 당시 과학자들은 그 백신이 제대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덩치 큰 동물들이 현미경에서나 보이는 미생물에 의해 죽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때 설득력이 먼저일까? 아니면 당시 과학자들이 갖고 있는 편견(패러다임)이 먼저였을까? 파스퇴르는 이미 미생물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수 없이 강조했던 바였다.

의학계 가장 큰 발견을 꼽으라면 리스터(Joseph Lister)의 화학 살균을 꼽는다. 그가 화학살균과 감염 차단을 통해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음에도 당시 대부분의 의사들은 그의 방법에 동의하지 않았다. 많은 생물학자나 의사들이 세균은 몸에서 자연 발생한다고 진화론적 해석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설득력이 먼저인가 패러다임이 먼저인가? 이런 이유 때문에 과학 철학자 쿤(Thomas Kuhn)은 분명히 과학계는가장 큰 전제를 받아들이며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 전제를 따른다고 했다.

과연 어떤 과학자가 “신(god)” 또는 “성경”을 자신의 논문에 개재했다고 치자. 과연 그 논문이 받아들여질까? 천문학자인 저자가 진화론적 우주론을 설명하면서 논문 말미에 ‘맨 처음에는 하나님이 시작했다’라고 쓴다면 어떤 과학저널이 이 논 문을 받아들일까? 지금 자신의 책에서 말하고 있는 유신론적 진화론 내용도 과학 저널에는 실릴 수 없는 것들이다.    

아마 저자는 비과학자들에게 전달하는 창조과학의 책만을 읽었던 것 같다. 저자에게 편견을 버리고 시간을 내서 창조과학자들의 기술적 논문들을 편견 없이 읽어보기를 권한다. 여기에는 1차 문헌을 다룬 논문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비록 유명 논문지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이 과학자들이 전공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필자가 미국창조과학 연구소에 있을 때 그곳 도서관에는 국제적인 학술지를 포함해서 각 분야의 새로운 저널들이 늘 진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실하게 그 논문을 읽고 계셨던 교수님들을 기억한다. 자신의 편견으로 보지 못한 일에 대하여 함부로 남을 판단하는 것은 삼가 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창조과학자들을 거의 매도하는 식으로 글을 서슴없이 써 내려간다.

“(창조과학자들은) 대부분의 과학이 타락했다고 정죄한다”(p. 138):
창조과학자들은 과학이 타락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론이 그릇된 이론이라고 말하고있다.

“창조과학자들은 주로 취하는 방법이 과학이 틀렸음을 보이는 것이다”(p. 140):
여기서도 저자는 진화론과 과학을 혼돈해서 쓰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오해를 준다. 창조과학자들은 과학이 틀린 것이 아니라 진화론이 틀린 것을 보여주고 있다.

“창조과학이 담고 있는 과학이라고 할 만한 내용은 20세기 초부터 창조론 운동에 근간이 되어 온 홍수 지질학(Flood geology)이 유일 하다고 할 수 있다”(p. 139):
창조과학 분야는 홍수지질학이 유일한 것이 아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 미국의 창조과학 관련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라. 지질학 뿐 아니라, 천문학, 생물학, 고고학, 신학 등 다양한 분야의 글들을 발견할 테니까.

“창조과학은… 성경의 내용들이 과학으로 증명될 수 있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p. 33):
창조과학자는 성경의 내용들이 과학으로 “증명(proof)”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구, 별, 생물, 사람과 같은 연구의 대상들이 실험실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과학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연구의 대상들이 성경의 “증거들(evidences)”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구, 별, 생물, 사람을 보니 성경대로 행하신 증거들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 이재만 / 창조과학선교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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