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뉴스레터]

그렇다면 당시에 모든 지질학자들이 동일과정설로만 지구를 해석하고 있었을까? 그럴리 없다. 왜냐하면 앞에 언급한 것처럼 화석과 지층뿐 아니라 이를 포함하고 있는 지질학적 증거들은 오늘날과 같은 자연과정으로는 형성될 수 없는“격변”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격변론자로서 가장 유명한 지질학자로는 스미스(William Smith, 영국, 1769-1839)가 꼽힌다. 그는 배수공학자였으나 화석과 지층에 매료되어 수 년간 야외조사를 했으며 그 결과로 지질분포를 그렸는데 이것이 영국과 웨일스의 첫 번째 지질도이다. 그는 특별히 유사한 화석 의 비교를 통해서 상대적인 순서를 정하였다. 이런 이유로 후에 “영국 층서학의 아버지”라는 명예를 얻게 된다. 스미스는 자갈, 점토, 모래 등이 지표면에 뿌려지기 위해서는 전지구적인 홍수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화석으로 지층의 순서를 비교함으로써 오랜 지구 연대를 믿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개인적으로도 모든 퇴적과 화석들이 성경의 홍수 심판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믿게 되었다. 실제로 화석의 위치는 시대가 아닌 그 생물이 매몰되었던 위치지만 스미스는 그 생물이 살았던 시기로 해석했으며, 나중에 진화론적 지질계통표를 만드는 중요한 계기를 부여했다. 그는 오랫동안 여러번의 대규모 격변적 홍수가 초자연적으로 일어났으며, 하나님께서 매번 새로운 형태의 생물을 창조하셨다고 믿었다.

다른 한 명의 유명한 격변론자는 비교해부학자며 척추고생물학자인 큐비에(Georges Cuvier, 프랑스, 1768-1832)이다. 그는 지구의 이론(Theory of the Earth, 1813)에서 격변론을 체계화시켰는데, 이 책은 20년간 영어로 여러 개정판이 나올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는 신실한 크리스천이었으며,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여러 번의 격변적 홍수가 있었다는 생각을 했고 홍수 심판이 약 5,000년전에 발생했지만 지구 역사는6,000년 보다 훨씬 길다고 믿었다.

이 시대에 중요한 사건이 앞서 언급된 런던 지질학회의 설립이라고 할 수 있다(1807년). 설립 당시 13명의 회원들이 있었는데 부유했으나 지질학적으로는 지식이 거의 없었다. 아쉬운 점은 학회가 시작할 때부터 이들은 모두 오랜 지구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오랜 지구에 대한 주장을 하는 지질학자들에게 더 많은 연구의 기회가 주어지는 환경을 제공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은 격변론을 주장하면서 오랜 지구를 받아들였을 때는 결국 성경의 역사도 인위적으로 바꾸어버리게 된다는 점이다. 격변이 있었다고 할 지라도 여러번의 격변을 그리게 되며 결국 성경에 대한 신뢰도 함께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실제로 크리스천이면서 이런 여러 격변이 있었다고 주장했던 많은 사람들은 결국 격변론도 버리고 동일과정설로 전환해버리고 말았다. 예를 들어 지질학 교수며 성공회 목사였던 버클랜드(WilliamBuckland, 영국, 1784-1856)는 홍수 심판에 대한 많은 변론을 했었고 스미스와 큐비에와 같은 격변론을 따랐으나, 1830년 초에 홍수심판은 지질학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자세를 바꾸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성경 기록은 실수에 취약하지만, 암석은 신실하고 변질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특별 계시보다 일반계시를 더 위에 놓는 우까지 범한 것이다. 캠브리지 대학에 있던 세드윅(Adam Sedgwick, 영국, 1785-1873) 역시 지질학자며 성공회 목사였는데 여러 번의 격변을 믿었고 이것이 성경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1831년 공개적으로 자신의 격변적 관점을 철회하고 동일과정설을 수용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20년대에 영국과 북미의 많은 지질학자와 목회자들은 오랜 지구를 받아 들이게 되었다.

  • 이재만 / 창조과학선교회 부회장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