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틀리셨습니까? 피터 엔스는 그렇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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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wers in Genesis 에서, 우리는 인간의 실수하기 쉬운 생각을 성경 본문으로 억지로 끼워 넣는 것의 위험성에 대하여 자주 경고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협의 문을 열게 되는 것이며, 반드시 다음 세대에 의해 그 문은 더 넓게 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를 통해 많은 영역에서 추적해 낼 수 있습니다. 지구의 나이에 관한 논란에 있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경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기원에 관해서는 그들이 믿기를 원하는 그 무엇이든 믿게 할 수 있도록, 창세기 1장의 많은 부분에 관한 준-문자주의적 해석으로부터, 본문의 문학 장르를 완전히 재분류한 근대적 견해까지, 다양한 조화론적 견해가 만들어 졌습니다.

자유주의적 신학자들이 유신진화론을 오랫동안 받아 들인 반면, 많은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오래된 연대라는 개념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대부분 첫번째 사람이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가 아니라는 그 어떤 개념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몇년간, 표면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 땅의 먼지로부터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전통적인 해석에 도전하는 책들을 써씁니다. 그 대신, 이러한 저자들은 인류의 기원에 있어서, 창조와 진화의 어떤 절충적인 혼합물을 주장해 왔습니다.

오래전의 실수가 새생명을 얻게됨

우리는 교회들에게, 위험한 해석학적 선례를 남기게 되는, 창세기를 재해석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거부하라고 끊임없이 도전해 왔습니다. 만약 우리가, 초자연적인 것을 반대하는 전제에 근거한, 과거에 관한 인간의 실수하기 쉬운 의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특정 부분을 재해석하기 시작한다면,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성경을 재해석하기를 멈출 것입니까? 몇십억년의 연대와 대부분의 과학자들에 의해 제시되는 다른 진화론적 사고를 수용하기 위해 창세기가 재해석되어야 한다면, 대부분의 과학자들의 의견과 배치되는 동정녀 출산이라든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같은, 성경의 다른 부분들도 재해석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럴일은 결코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말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AiG가 문제를 침소봉대 한다던지, 미끄러운 비탈길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믿는 기독교인들로부터 계속해서 이러한 말들을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타협의 문은 벌써 열렸고, 복음 그 자체가 공격을 받는 정도에까지 왔습니다. 피터 엔스 박사가 현대 진화론의 주장의 조명 하에 기독교를 재해석하기 위한 이유를 제시하기 위해 쓴 책에서, 그는 아담과 이브는 실재, 역사적 인물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독려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엔스는 모세오경이 바벨론 탈출 이후에 쓰여졌다는, 이미 신빙성이 떨어진 문서가설에 의지합니다. 모세가 모세오경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후대의 서기관들이 구전 혹은 기록으로 전승된 전통을 모아서 편찬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을 반박하는 많은 성경적, 역사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엔스는 그에게 필요한 학자들에의하여 제공되었고 받아들여진 것으로써 묘사합니다. 그가 새로 낸 책의 각주에서, 엔스 박사는 이러한 관점에 대한 그의 목적들 중 하나, 즉, 예수님이 모세는 자신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이 주제를 온전히 다루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멀리 벗어나게 하겠지만, 저는 적어도 모세가 저자라는 주장에 대한 적어도 몇몇 일반적인 변호에 관하여 언급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모세오경의 저자를 모세라고 인정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복음 5:46-47). 그러나 저는 이것이 명백한 대조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모세가 저자라는 것을 가장 열열히 방어하는 사람들도 모세 오경의 몇몇 부분은 마치 수정된 적이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예수님이 의미하시는 듯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의 모습을 한 성자 하나님으로써의 예수님의 지위가, 요한복음 5:46-47과 같은 발언이 마치 저자에 관한 역사적인 판단에 대한 법적 구속력이 있는 듯 이해되어야 할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여기서 예수님은 그 자신도 1세기를 살았던 유대인으로써 전승받은 전통을 반영하며, 또한 그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도 그렇다고 가정하셨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이러한 주장으로부터 따라오는 재앙적 결론을 살펴보기 전에, 논란이 되는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요한복음 5:45-47).

예수님은 단지 모세오경의 저자가 모세인 듯 보인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모세가 적어도 모세오경의 일부는 기록하였다고 이 본문에서 확언하십니다. 유대인들과의 이 충돌 이전에,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성경을 연구한 이유는 그들이 그 안에서 영생을 찾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이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시는 것이고, 사람들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주님께 나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그는 구약의 특정 부분으로 범위를 좁히십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경을 두 (어떤 경우에는 세)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서 (누가복음 24:27; 어떤 경우에는 선지서들이 선지서와 산문으로 나뉩니다). 따라서 모세를 언급함으로써, 예수님은 성경의 첫 다섯권의 책의 저자가 모세라고 여기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이 모세가 자신에 대하여 기록하였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문제는 해결된 것입니다. “그러나 잠깐만” 이라고 엔스는 말하며, 이 주장에 대하여 두가지 논쟁을 제시합니다. 첫째, 엔스는 “오늘날 모세가 저자라는 것을 가장 열열히 방어하는 사람들도 모세 오경의 몇몇 부분은 마치 수정된 적이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예수님이 의미하시는 듯한 것은 아닙니다” 라고 말합니다. 모세 5경의 몇몇 부분이 수정되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34장은 모세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기 때문에 모세가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그것은 여호수아에 의해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서 엔스는, 예수님이 그 어떤 수정의 여지를 남기지 않으셨다고 말할 때, 그의 견해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모두는 과도한 문자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명백하게 허수아비 논쟁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엔스는, 예수님이 모세를 저자라고 부르셨을 때, 그것은 모든 글자가 모세 자신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고 이해되어야만 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모세가 정말로 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오늘날의 저자들도 그들의 작업에 기여를 하거나 수정을 하는 편집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 대부분을 기록한 사람의 저자권을 거부하도록 할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다른 사람이 그를 대신해서 기록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울이 저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용 이론

엔스는 이것이 그의 가장 강력한 논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의 더욱 중요한 주장은, 예수님이 모세의 저작이라는 것에 대하여 권위있는 역사적 발언을 하시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여기서 예수님은 그 자신도 1세기를 살았던 유대인으로써 전승받은 전통을 반영하며, 또한 그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도 그렇다고 가정하셨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이 발언을 다시 읽어 보시고, 이 공격의 심각성을 이해해 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피터 엔스 박사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때 당시의 잘못된 전통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모세 5경을 모세가 기록했다고 “잘못” 주장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대두된 엔스 박사의 생각은 수용이론이라고 불리며, 18세기, 독일 이성주의의 아버지인 요한 셈러에 의해 처음 대두되었습니다. 수용이론은 자유주의적 신학자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으며, 기본적으로 예수님이 그 당시의 다양한 사상들을, 비록 그것이 그릇되었다고 할지라도, 받아들이셨다고 주장합니다. 이른바, 예수님은 주로 영적인 문제에만 관심이 있으셨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된 역사적 과학적 믿음을 교정하려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예수님의 진짜 메세지를 듣지 못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사고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성경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자주 꾸짖으셨고, 그들을 교정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마태복음 22:29)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누군가의 실수를 수용하는 태도가 전혀 아닙니다. 더우기,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는 관습에 강력하게 대응하셨습니다. 그는 성전의 환전인들을 쫒아 내셨고 (요한복음 2:15-16),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맹렬히 비난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16-33). 만약 예수님이 그 당시의 실수를 수용하셨다면, 그는 결코 이러한 행동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수용이론을 선전하는 사람들은 예수님 자신 조차도 그가 돌아오실 날을 알지 못했다고 말하신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24:36). 그러나, 한 학자는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지적합니다. “이해함에 있어서의 제한은, 잘못된 이해와는 다릅니다. 그가 어떠한 것들을 알지 못하셨다는 사실은, 그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틀리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어떠한 것이 사실이라고 확언하셨을 때, 그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아셨음을, 우리는 확실히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완벽한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의 잘못된 사고를 결코 수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언제나 진실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그시대의 실수를 수용하셨는지 아닌지가 왜 중요합니까? 만약 예수님이 실수를 가르치셨다면, 예수님은 청중에게 거짓말을 하신 것이 되고, 따라서 그는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부지불식간에 실수를 가르치셨다면, 그는 제자들을 잘못 인도하신 것이며, 그것은 예수님을 거짓 교사로 만들어 버립니다. 위의 두가지 모두 우리로하여금 예수님이 죄인이시며 하나님보다 못하신 분으로 결론내리게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죄를 범하셨다면, 그는 그의 십자가에서 대속적 죽음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달랠 수 있는 흠없는 어린양이 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죽으실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죄악 가운데 있으며, 영원한 불못으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모세가 자신에 대하여 기록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고려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마태복음 19:8; 신명기 24:1-4).

“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누가복음 5:14; 레위기 14:2-32).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누가복음 16:29).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누가복음 20:37; 출애굽기 3:1-6).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누가복음 24:44).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요한복음 7:19, 21-23; 출애굽기 24:3; 창세기 17:9-14).

혹시 여러분이 예수님의 완벽한 진실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신다면,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다음의 말씀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요한복음 8:28-29).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에게 가르치신 것만 말씀하시므로, 예수님이 그 당시의 실수를 수용했다고 말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도 이러한 같은 실수를 저지르셨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친절하지 않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엔스 박사에 의해 광고되는 수용이론적 견해는 이단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귀하신 구세주에게 실수가 있다고 공격하며,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실수를 가르치라고 말씀하셨다고 공격합니다.

결론

이 책에서, 엔스는 성경에 대한 저급한 견해를 보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대한 그 저급한 견해는 논리적으로 구원자에 대한 저급한 견해로 귀결됩니다. 히브리서6:18과 디도서 1:2 에서 우리는 명확한 말씀을 듣습니다 – 하나님은 거짓말 할 수 없으십니다! 예수님이 거짓임을 알고 청중들에게 거짓을 말씀하셨거나, 그가 거짓임을 알고 있는 무언가를 확언하신 것은 단지 거짓말 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성격과, 그 무오성과 실수할 수 없음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러한 생각들을 하나님의 성품과 연결시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으시므로, 그의 말씀인 성경도 거짓말하실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모습을 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가 1세기의 유대인으로 오셨다 할지라도, 그 누구도 속이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거짓말하실 것이라고 제안하는 것은, 그 사상이 “수용”이라고 불릴지라도,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차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 같이 잘 지낼 수 없을까요” 논쟁이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의 중심부를 강타하는 거짓 가르침이며,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18세기에 이 주장이 소개되자마자, 이 문제점이 많은 저자들에 의해 지적되어 왔습니다. 수용 이론의 기본적인 문제점은 구체적으로 매우 잘 묘사되어 있으며, 우리는 여기서 요약만 할 것입니다. 수용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이 그가 의미하시고자 하는 것을 거짓을 포함하지 않은 채 완벽하게 언어적 의사소통을 하실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웨인 그루뎀은 수용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실질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에 대한 효과적인 주권을 행사하신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위에서 언급했듯, 하나님이 거짓말을 사용하여 의사소통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민수기 23:19, 디도서 1:2, 그리고 히브리서 6:18에 묘사되어 있는 그의 도덕적 성품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더우기,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도덕적 성품을 모방하는 사람이므로 (레위기 11:44; 에베소서 5:1; 고린도전서 11:1 등), 만약 하나님이 사람들을 호도하신다면, 우리 역시 의사소통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호도하거나, 거짓말을 사용해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모든 생각들은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엔스 박사와 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오류의 심각성을 깨닫고, 회개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분 역시 기도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하나의 각주는 교회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우리가 세속적 철학을 하나님의 말씀에 끼워맞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칠 필요가 있음을 드러냅니다 (또한 우리가 인식한 채, 혹은 인식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의 신성을 동시에 폄회하는 것임을). 기독교인들은 교리에 대한 궁극적인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 위에 온전히, 타협하지 말고 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