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전도시 지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지옥이 얼음으로 뒤덮힐 때까지

덴버로부터 로스 엔제레스까지 가는 비행기에서 2시간 30분을 보내기 위해서 저는 존 웨인의 옛날 영화를 DVD 플레이어에 집어 넣었습니다. 그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몇 분 내에, 듀크는 “지옥처럼 확실하게” 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내가 지옥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지옥에나 가라!”고 말했습니다. 지옥에 대한 이러한 부적절한 사용은 그리스도인들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 세속주의적 사회에서 자주 발생하며, 심지어 아이들을 위한 TV쇼나 책에서도 많이 일어납니다!

지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저의 전도에 대한 노력도 없을 것입니다. 그 대신 저는 저의 열정인 서핑을 즐기며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징적으로 말하면, “서퍼가 상어와 함께 누울 때”까지 (이사야 11:6) 제가 잠시 접어 둔 것입니다. 그때까지, 저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데” 저의 시간을 쏟을 것입니다 (골로새서 1:28).

이 세상 사람들은 격노한 번개처럼, 지옥이라는 끔찍한 곳으로 보내질 위험에 쳐해 있다는 것을 들어야만 합니다. 금속 모루대 위의 전자석처럼, 영원한 공의가 그들이 움직이는 위를 맴돌 것입니다 (요한복음 3:36). 그들의 악한 행실로 말미암아 그들 마음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진노의 날에 드러날 진노를 쌓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21, 로마서 2:5-11).

여러분은 저의 작은 불쾌함을 느끼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는, 지옥(Hell)을 이야기 할 때, 소문자 h 를사용하는 것 때문입니다. 지옥은 뉴욕과 로스 앤젤레스처럼 매우 실재적인 장소이며, 이런 대접을 받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지옥은 직장에서 좋지 않은 날을 경험한 것, 혹은 우리의 적들에게 우리가 말하는 것들 이상입니다. 지옥은 실재적이고, 끔찍하며, 영원하며, 하나님의 완벽한 법을 지키지 않은 죄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이 영원하지 않다거나, 그것은 단지 무덤의 상징이거나, 예루살렘 밖의 쓰레기 소각장이었다고 말하는, 교육을 많이 받은 설교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쓰레기 이야기(trash talk)”는 매우 “심각한 실수 (grave mistake)”이며, 이러한 실수의 뿌리는 십계명의 두번째 계명을 어기는 것에 있습니다.

미묘한

조각한 상을 만드는 것은 매우 미묘한 죄입니다만, 모든 죄악의 근본 뿌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나무를 깎아서 가족 예배를 하기 위한 우상을 만드는 비이성성을 이미 넘어섰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오늘날에는 이상하게 들립니다.

그 대신,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 자신의 마음에 드는 우상을 새깁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무나 돌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상상으로 만들어 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손짓하면 달려와야 하고, 우리가 즐거움을 추구하거나, 풀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부를 수 있는, 신적인 하인입니다. 현대의 우상숭배자들은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시고 전적으로 인자하시지만, 완전히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아니라고 하는 잘못된 이미지에 매달립니다. 따라서 그는 결코 지옥을 만드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옳습니다. 그들의 신은 지옥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결코 만든 적이 없습니다. 그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는 죄악된 생각의 상상속에 만들어진 존재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무신론의 어리석음조차 우상숭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자주 그들의 마음 속에, 구약에서 “매몰차고 공정치 않은” 심판을 하는, 어떤 신의 형상을 만듭니다. 그 형상은 독재적이고 공격적이며, 따라서 그들이 역겨워하며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로그 그들은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지 않는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을 내던지며, 그들은 무 (無)가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그들 자신의 관점이 정당화되었다고 느낍니다. 그들 자신의 마음에는, 그들의 악한 마음을 따라 살 수 있는 좋은 이유를 갖게 된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소멸시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누군가가 날카로운 칼로 당신의 목을 베료고 와서 위협한다거나, 자살 폭탄 협박을 한다거나, 당신의 얼굴에 총을 거둔 날카로운 눈을 한 미친 사람이 당신의 머리를 터트리겠다고 말하는 것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구요? 어떻게 온전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살해당하는 이러한 끔찍한 시나리오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손에 의하여 심판당하는 것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재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시편기자처럼, “나의 살이 당신을 향한 두려움으로 인해 떠나이다” (시편 119:120)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과거에 어떤 현자는 말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그 다음으로 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두렵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훔치며, 심지어 죽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가 잡히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말이죠. 그것이 바로 미국에서 1990년과 2010년 사이 40만 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난 이유 입니다 – 그리고 이 수치는 낙태를 통해 살해된 수백만 명의 아기들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 단지 20년간, 우리는 수퍼보울의 평균 관중수의 4 배에 달하는 시체를 쌓아 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 국가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잃고 창조주에 대한 자신 나름의 거짓 형상을 만들었을 때 생기는 일입니다. 미국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 가운데 있는 국가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 시대를 돌아보면, 이스라엘의 피로 점철된 슬픈 역사는, 그것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법을 져버리고, 우상 숭배의 길로 빠져들어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잃어버리고, 성적인, 그리고 다른 죄에 빠진 후, 하나님의 심판 하에 놓이게 되었음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배워야만 합니다.

이리 조용한가?

저는, 하나님과 그의 공의로우신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현대 미국의 종교계에 있다고 믿습니다. 많은 현대의 설교자들은 동기를 부여하는 사람, 복음을 인생의 성공과 성취의 수단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전락되었습니다. 영원한 지옥에 관한 생각으로 공포에 떠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지옥의 끔찍한 불꽃을 피해 예수님께로 달려가라고 애원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습니다. 이중적 비극은, 이러한 설교자들은 그들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생산해 내서, 교회의 자석을 현 상태에 안주하는 사람들로 채워 왔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대한 묘사를 피하는 설교는, 하나님의 도덕 법칙 (십계명)에 대한 무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로 여기는 것을 내버리는 것에 그 이유를 둘 수 있습니다. 만약 율법이 무시된다면, 범죄의 엄청난 사악함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7:13). 율법은 죄에 대한 이해를 가져다주며, 우리로 하여금 그 본질을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로마서 3:19-20). 바울은, 우리는 율법 없이 죄를 깨닫지도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7:7). 따라서 율법이 간과될 때, 인류는 그들의 도덕적 상태에 관하여 암흑 속에 남겨지게 됩니다. 만약 당신이 저를 믿지 못하신다면, 아직 회개하지 못한 죄인들 중 누구에게라도, 그들이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은 아마 테레사 수녀나 마하트마 간디 의 화신과 이야기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실 것입니다.

다시한번, 율법의 조명하심 없이 (잠언 6:23), 우리는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몇몇 약점이 있긴 하지만, 단지 인간일 뿐입니다.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많은 교계의 발언되지 않은 결론이 나옵니다: 히틀러와 몇몇 다른 끔찍한 사람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지옥에 보내신다면, 하나님은 가혹하고, 공의롭지 않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주제에 관하여 침묵합니다.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이 설교될 때, 지옥을 정당화하기란 어렵습니다.

율법이 없고, 비 성경적인 복음제시의 해로운 결과는 무관심을 양산하는 것보다 더 깊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에 대한 경박한 이해를 하게 합니다. 돌아온 탕아도 마찬가지 입니다 –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종이 되기 위해서가 아닌, 아버지로부터 더 많은 돈을 받기 위해서 돌아오는 꼴입니다 ; 탕아는 그가 바라는 것이 돼지여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 하지 않고, 죄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치 부패한 곡식이 밀과 함께 있고, 양들 가운데 염소가 풀을 뜯고 있는 것과 같이, 교회를 채웁니다.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같이 수영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 – 율법을 사용해서 그들로 하여금 죄악에 대해 깨닫게 하신 것(마가복음 10:17) – 을 하는 데 우리가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로마서 2:21-22) 라고 설교한 사도 바울을 따라가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을 모방하여, 죄인들이 떨도록, 죄와 공의,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죄인들에게 설명하는 대신, 우리는 좋은 말들과 공평한 설교로 죄인들을 위로해 왔습니다. 만일 누군가 그가 율법을 어겼다는 것에 대하여 듣지 않는다면, 그를 위하여 예수님이 대속의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에 대해 과연 누가 애통해 할 것입니까?

그러나 십계명의 정체가 드러나고, 우리의 죄가 그 끔찍한 모습을 드러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희망없이 심판대에 서서 낙담하고 있는 우리를 향한, 영광스러운 용서가 됩니다. 율법은 죽음과 지옥의 선고를 우리에게 우뢰와 같이 외치셨습니다. 그러나,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천국을 주셨습니다.

착각하게 하는 횡설수설

만일 죄인이 죄가운데 죽으면, 그들은 그들의 무덤으로부터 끌려 나와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옳고, 공의로우며 선하심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8). 이러한 말은, 우리가 잠시 생각해 보기 전에는, 타락한 사람들의 횡설수설처럼 들립니다. 1840년대 서부의 한 마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마을에는 강간과 살인과 같은 불법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마을을 깨끗게 하기 위하여 지역 의회가 모여,  10명의 총을 잘 쏘는 보안관을 데려 오기로 결정했습니다. 다가올 정의에 대하여 움추려들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범죄자들입니다. 그리고 공의가 행해졌을 때 기뻐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마을의 선량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심판의 날에 대한 생각으로 움추려 들어야 할까요? 그것은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이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날에 관하여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 보십시오: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시편 98:8-9).

히틀러에게 정의가 실현될 때, 만물은 큰 기쁨으로 박수칠 것입니다. 만물은 모든 살인자들이 그들이 받을 형벌을 받을 때, “주 앞에서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거기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공의를 갈망하며, 모든 강간범, 도둑, 간통한 사람들, 그리고 거짓말장이들을 모두 빻아서 가루가 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곳에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내면을 감찰하여, 모든 악으로 가득차 있고, 육신적 욕망으로 가득차 있는 아담과 이브의 자녀들을 소탕하여 그들에게 정의를 실현시키실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게으르게 한 말조차 포함하여, 마음 속의 모든 생각과 의도를 심판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6).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잡히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그러나 공의가 이루어지는 날, 진실과 정의는 낯의 해와같이 빛날 것입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칭찬할

최는 저는 지역의 한 대학교의 캠퍼스에서 길거리 설교를 하고 있었고, 약 60여명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좋은 사람들인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육신적 욕망을 간음으로 (마태복음 5:27-28), 그리고 미워하는 마음을 살인으로 (요한 1서 3:15) 보여 주는 십계명의 영성에 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심판의 날의 실존과 그들의 죄가운데서 죽는 모두에게 있어서 지옥의 확실성, 그리고 개인적인 영원한 구원의 필요성에 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 하나님은 자비가 많으셔서, 구원자를 예비하셨고, 죽음을 이기셨으며, 모든 사람들은 회개해야 하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오직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의 임시 연단에서 내려올 때, 한 학생이 일어나서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정죄한 제가 잘못되었으며,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친절하시며, 죄인들을 축복하길 원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추가로, “하나님은 당신이 당신 자신을 믿고 언젠가 여러분들 중 누구라도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라고 덧붙혔습니다. 군중들은 그의 용기를 불러 일으키는 말에 박수쳤고, 그가 올바른 일을 했다고 확신했음에 분명합니다. 챨스 스펄전은 이러한 설교자들을 “살인자”라고 부릅니다.

“여보시오, 의사양반, 당신은 사람이 아프다고 말하기에 너무나 허약합니다! 당신은 환자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면서 그를 고치기 원합니다. 따라서 당신은 그들에게 아첨합니다; 그리고 무슨일이 벌어집니까? 그들은 당신의 농담에 웃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무덤 위에서 춤을 춥니다. 결국 그들은 죽습니다! 당신의 허약함은 잔인함입니다; 당신의 아첨은 독이 됩니다; 당신은 살인자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바보들의 낙원에 머물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그들로 하여금 부드러운 잠에 빠지도록 안심시켜야 하겠습니까? 그들은 결국 지옥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드러운 강연으로 그들의 지옥행을 돕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그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메세지에서 지옥을 제외하는 것은 몸으로부터 뛰는 심장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수년전, 저는 어떤 오토바이 타던 사람때문에 인생이 비참해진 한 나이드신 할머니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몰랐지만, 그가 시동을 걸었을 때, 큰 소리는 그 할머니의 고막을 터트렸습니다. 그 사건 이후 수년간 할머니의 머리 속에는 멈추지 않는 비명이 들렸고, 할머니는 도움을 구하며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오토바이 운전자는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단지 시동을 걸었고, 출발했을 뿐입니다.

이러한 것이 오늘날 율법없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깨닫지 못한 채, 기독교에 큰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God Has a Wonderful Plan for Your Life 라는 책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을 일생동안 비명지르고 싶게 할 통계를 발견할 것입니다. 율법 없는 설교는 수백만의 신도들에게 복음의 진리에 대한 예방 접종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반성경적인 복음 전도의 비극적인 결과는 영원 후 온전히 이해될 것입니다.

복음을 설교하는 많은 사람들은, 복음은 화살이고, 율법은 활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복음의 화살을 날아갈 수 있는 추진력을 주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위험에 쳐해 있다는 점과, 우리가 절망적으로 구원자를 필요로하다는 사실을 이해되게 합니다.

다시금, 스펄전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조명합니다:

“율법을 낮추면, 당신은 인간이 자신의 죄책감을 인지할 수 있는 빛을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인에게 있어서 득보다 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약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신이 율법을 무시할 때, 복음으로부터 가장 강력한 무기를 빼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복음으로부터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데리고 올 교사를 빼앗은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공의와 거룩한 율법 앞에서 떨 때까지 결코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가장 필요하고 축복된 목적을 수행하며, 그 자리에서 치워져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신을 믿지 않는 세상에게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단순히 율법을 엶으로써 가능합니다. 죄인들에게 하나님은 육욕을 간통으로, 미움을 살인으로 여기신다는 것을 보이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율법의 사역”을 충실하게 사용하셔서 그의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로마서 2:14-15). 양심이 하나님이 부여하신 책무를 다하도록, 양심을 휘저으십시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하나님은 죄악을 벌하셔야만 한다고 설명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어떤 판사가 정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 판사를 좋은 판사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질문함으로써 이성에 호소하십시오. 바울이 벨릭스와 했던 것처럼 논리적으로 토론하십시오 – 떨림이 있을 때까지 (사도행전 24:25).

당신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성품을 그릴 때, 성령님이 당신의 가이드가 되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당신은 성령님의 도움으로 죄인들이 “두렵고 떨림으로” 그들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몇몇 영혼들은 심판의 끔찍한 칼날의 위협이 없더라도 하나님께 신속히 돌아오기도 합니다. 또는, 만약 사람들이 “진노의 포도가 저장된 포도원이 짓밝힘”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듣지 않는다면, 기쁨이 넘치는 걸음도 있지 않을 것입니다.(??)

타락한 무관심

당신은 이 사악한 세상의 구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지옥에 관하여 이야기하거나, 죄인에게 회개하고 구원자를 믿으라고 간청한 적이 언제입니까? 혹은 당신은 나사로가 상처 가득한 몸으로 문 앞에 앉아 있을 때, 부자의 식탁에서 먹기에 바쁩니까? 당신은 잃어버린 자들의 운명에 대하여 걱정되십니까?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당신처럼 사랑하십니까? 만약 당신이 타인을 도울 능력이 있었을 때 그를 죽도록 버려 두었다면, 형법은 당신이 “타락한 무관심”이라는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유죄로 선고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이것은 정말 완벽한 단어선택입니다: 타락하였다는 것은 당신이 추락할대로 추락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무관심은 당신이 더이상 적게 관심을 기울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타락한 무관심의 죄에 있어서 유죄인 것처럼 보입니다. 빌 브라이트는 그의 책 The Coming Revival 에서 단지 2 %의 미국의 현대 교회만이 정기적으로 그들의 믿음을 다른이들과 나눈다고 말했습니다. 현대 교회는 그 자신을 먹여 살리는데 너무 바쁘며, 조용히 읊조립니다, “세상사람들이여, 지옥으로 가세요… 우리는 관심없습니다.” 우리는 죄악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들이 지옥으로 보내질 위험에 쳐했다는 것을 보지 못하며, 용감하게도 지옥이라는 단어를 부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는 죄악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그들을 도와 주세요. 하나님 우리를 도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