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예수 세미나에서 발견된 것들을 신뢰해야 하는가?

도입

70 명이 넘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부활절 연구소를 형성하기 위하여 버지니아의 린츠버그에서 일년에 두 차례씩 6년간 만났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 중 다수는 다양한 교파의 학자들입니다. 그들 중 약 20 퍼센트는 그들의 분야에서 존경받는 학자들입니다. 나머지는 기독교 변증학자, 저자, 신학자, 심지어 가장 충실하게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영화를 만든 영화제작자들도 있습니다. 이들 각각은 주님과 충심으로 동행하였을 것이고, 그들은 그들의 작품을 통하여 그들이 성경의 권위와 영감, 실수 할 수 없는 무오성에 대하여 최고로 헌신되어 있음을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작업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 그리고 정경이 아닌, 도마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검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예수님이 실제 그 말씀을 하셨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련의 발표와 특정한 논란이 되는 구절들에 관하여 토의를 듣고, 그들 각각은 색깔이 있는 구슬을 사용해서 그 구절의 진실성에 관하여 투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만약 예수님이 정말 그 말씀을 하셨다고 믿는 다면, 빨간 구슬을, 예수님이 아마도 그 말씀을 하셨을 것이라고 믿는다면 분홍 구슬을, 만약 예수님이 직접 그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후대의 예수님의 생각을 반영하는 기록으로 생각된다면, 회색 구슬을, 그리고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 거의 확신한다면 검은 구슬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실험의 결과가 어떠했겠습니까? 가상의 부활절 연구소의 구성원들이 이미 성경의 무오성에 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은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의 이의 없이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언급들은 빨간 구슬들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정경이 아닌 도마복음을 연구했을 때, 복음서와 일치하는 구절들은 빨간 구슬들을 많이 받았을 것이고, 복음서의 내용과 일맥 상통하는 구절들은 분홍 구슬을, 이상한 구절들은 회색 구슬을, 복음서와 반대되거나 영지주의를 장려하는 구절들은 검은 구슬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모임이 마쳤을 때, 부활절 연구소의 최고의 학자들 몇몇이 근대의 성경 학자들이, 실재로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한것들이 정말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며, 그 모든 기록된 기적들이 실재로 일어난 일이었다는 사실을 극구 칭찬하는 세권의 책을 출판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더우기 주류 매체에서 이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고, 전혀 부활절 연구소의 동기를 의심하지 않은 채 쉬지않고 방송에 내 보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히스토리 채널, 디스커버리 채널, A&E,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그리고 다른 방송들에서 이러한 학자들을 초대해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그들의 주장을 세상에 알리며, 그들을 그들의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자로 여기는 동시에,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마치 진정한 학자도 아닌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위의 가정은 매우 열매가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한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죠. 안 그렇습니까? 당신은 가상의 부활절 연구소에서 알아낸 것들에 동의할 지 모르지만, 위와 같은 시나리오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 하셨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진정성에 대하여 투표하기 위해,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에 관하여 같은 전제를 가진 사람들을 모으는 것은 순환논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논란이 되는 말씀들을 예수님이 하신 것이라는 가정을 가지고 출발하고, 그들은 예수님이 진짜로 그러한 말씀을 하셨다고 결론내립니다. 그들의 결론이 옳을지라도, 이것은 결코 올바른 학문적 접근이 아닙니다.

예수 세미나 입문

위의 가상의 시나리오가 매우 희한하게 들리지만, 매우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매우 비전통적인 방식이긴 하였지만, 주류 언론은, 그 모임에서 내린 결론을 마치 신약학의 최고 권위를 대표하는 것처럼 다루었습니다.

1985년, 첫번째 “예수 세미나” 가 웨스타 연구소로 알려진 후원 조직 하에서 열렸습니다. 작고하신 캘리포니아 산타 로사의, 신약과 그리스학자인 로버트 W. 펀크가 그것을 이끌었습니다. 그 모임은, 무신론자들, 자유주의적 개혁주의자들, 카톨릭, 유대인들 그리고 신학 훈련을 받지 않았고, 몇몇 선정적인 영화만을 찍은 영화제작자들로 이루어 졌습니다. 그들중 약 절반은 하버드와 클레어몬트 혹은 밴더빌과 같은 자유주의적 신학교에서 졸업했거나, 가르쳤습니다.

모임 안의 몇몇 복음주의쪽으로 기운 학자들을 제외하면, 예수 세미나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을 단호히 무시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초자연적인 것들을 거부하였고, 복음서의 기록의 “신화성을 없애기” 원했습니다. 따라서 에수님의 말씀에 관한 투표에 있어서, 그 모임은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 대부분이 진짜가 아니라며 거부했습니다.

그들의 노력의 결과는 세 권의 책으로 출판되엇습니다: The Five Gospels (1993), The Acts of Jesus (1998), The Gospel of Jesus (1999). 주류 언론은, 예수세미나의 리더인 펀크, 마르커스 보그, 그리고 존 도미닉 크로산을 다루었으며, “The Search for Jesus” 로 명명되었고, 고 피터 제닝스에 의하여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대중화된, 2000년 ABC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세미나의 결론을 “복음의 진실”로써 다루었습니다. 보그와 크로산은 히스토리 채널과, 디스커버리 채널, A&E, 그리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방영되는 기독교와 관련된 다큐멘터리에 정기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관하여 다음의 거짓된 주장을 하였습니다.

  • 예수님은 마리아와 로마 병사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에서 태어났다.
  •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개념은, 태양의 신 아폴로가 한 여자와 성관계를 했다는 로마 신화로부터 빌린 것이다.
  •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나지 않으셨다.
  • 어거스투스 황제 때, 로마에서는 인구조사를 한 적이 없다.
  • 유다는 반 유대주의적 누명으로써 초기 기독교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 예수님은 요셉의 무덤에 묻히신 것이 아닌, 얕은 무덤에 뭍히셨고, 그의 육신은 개나 소에게 먹히셨다.

명백하게, 이러한 것들이 성경의 많은 비평가들의 학문적 연구를 통과한 것입니다. 다시금, 이것은 순환논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서, 당신은 이미 그들이 주님의 말씀 대부분을 거부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투표하게 한 후, 그들의 주장이 “가장 최신의 성경적 연구”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방법론

역사에 잇어서,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어떠한 기록의 신뢰성을 결정할 때, 특정한 기준을 따릅니다. 그 어떤 사람도 완벽하게 객관적일 수 없고, 특정한 정보만을 기록하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모든 고대의 기록을 의심없이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지난 몇십년간의 사건들은 역사성을 입증할 수 있는 신문이나 잡지와 함께 비디오나 오디오 기록을 가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명백히, 먼 과거에 일어났다고 하는 사건들에게는 같은 기준이 적용될 수 없고, 따라서 역사가들은 어떤 사건이 실재로 일어났는지를 깨닫기 위하여 다른 지침을 따릅니다. 내부적 비평, 원전 비평과 같은 다양한 접근을 취할 수 있지만, 역사가들이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몇몇 사항이 있습니다. 여기에, 존경받는 역사가이자,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전문가이신 게리 헤이버마스 박사가 제시한  5 가지를 제시합니다:

  1. 여러 명의 독립된 증인들의 증언은 일반적으로 단 한명의 증언보다 강력하다고 생각됩니다.
  2. 중립적이거나 적대적인 자료에 의한 확언은, 어떠한 사람이나 입장에 대한 호의적인 편견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일반적으로 동조적인 자료의 확언보다 강력하다고 여겨집니다.
  3.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입장을 약화시킬 구체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4. 직접 목격한 사람의 증언은 일반적으로 한, 두 사람을 거친 이야기보다 강력하다고 생각됩니다.
  5. 논란의 사건과 매우 가까운 시점의 증언은 일반적으로 그 사건이 일어난 후 몇년 후의 증언보다 더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만약 예수 세미나가 이러한 다섯가지 원칙을 따랐다면, 4복음서는 그들의 투표에서 훨씬 더 잘 다루어 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비평가들은 몇가지 측면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속임수를 썼습니다.

학문적 어리석음의 일곱개의 기념비

그 세미나의 최초의 출판인, The Five Gospels, 는 즉각적으로 독자들에게 소위 “학문적 지혜의 일곱개의 기념비”라는 것을 소개합니다. 그것은 세미나 참석자들이 사용한 안내하는 원칙으로써 사용된 것들입니다. 이러한 기념비들은, 누군가가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그를 단지 믿음, 신학, 그리고 교리적 예수님으로 받아들이거나, “역사적 이성과 연구”의 예수님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거짓 딜레마를 세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비평적 학자들과 동의하는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역사와 과학과 같은 편에 선 사람들인 반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단순히 신학과 교리에 있어서 맹목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들이 제시한 “학문적 지혜의 일곱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1. 우리는 역사적 예수님과 믿음의 예수님 사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2. 마태,마가 누가복음은, 영적인 예수님을 묘사하는 요한복음보다 훨씬 더 실재 역사적인 예수님과 가깝습니다.
  3.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보다 먼저 쓰여졌습니다.
  4. 누가와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모았다고 하는 가상의 문서인 Q 에 의거하여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5. 학자들은 이미 예수님이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한번도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결정했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개혁주의자이며, 냉소적인 현자였습니다.
  6. 1세기 이스라엘은 오늘날과 같은 문서적 문화가 아닌, 구전문화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보다 잘 기억할 수 있도록 짧은 어구를 사용하셨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7. 복음서는 그 옳음이 증명될때 까지는 틀리다고 여겨져야 하며, 그것을 증명할 책임은 복음서가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님과 믿음의 예수님

이러한 기념비들은, 그들이 증거를 살펴보기도 전에 이미,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을 거부하고, 소위 신화적 요소가 제거된 예수님을 선호할 것을 보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가정들은 그들이 자동적으로 특정한 정당한 설명을 제외하기 때문에, 본질상 비과학적입니다. 그들은 또한 몇몇 점에서 비논리적입니다. 예를 들면, 첫번째 조항은 믿음의 예수님과 역사적 예수님 사이를 구분해야할 것을 선언합니다. 이것은 명백한 세번째 대안이 존재함에도, 단 두개의 경쟁하는 선택안만을 제시하기 때문에, 분기오류(bifurcation fallacy)입니다. 세번째 대안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가장 최초의 추종자들에 의해, 끔찍한 방식으로 처형될때 까지도 강렬하게 주장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역사적 예수님과 믿음의 예수님은 한분이며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믿음 사이의 관계를 충분히 명확히 설명합니다. 그는 복음의 메세지가, 구약의 예언의 성취로써 일어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사건 위에 기반해 있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그 장을 시작합니다 (고린도전서 15:3-4). 그는, 그가 편지를 쓸 때까지도 많이 살아 있던, 한꺼번에 예수님을 목격한 500명을 포함한,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사람을 인용함으로써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무덤으로부터 육신적 부활을 하신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가르침은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또한 헛됩니다” (고린도전서 15:14), “우리는 하나님의 거짓 증인들입니다”(고린도전서 15:15), “여러분의 믿음은 헛되고 여러분이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v 17),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v 18),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v 19). 누가는 예수님이 “고난 받으신 후에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셨다고” (사도행전 1:3) 덧붙힙니다. 더우기 예수님은 그 자신의 육신적 부활을 예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18-19; 요한복음 2:19). 만약 예수님이 실수하셨다면, 그는 죄인이었을 것이고, 따라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의 죄로인해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적 부활 없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다고 지체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기념비로 시작함으로, 예수 세미나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본질적인 요소가 제외되는 것을 보장했습니다. 각각의 요소를 온전히 논박하기에는 공간이 부족하므로, 이러한 기념비 몇개를 더 조사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마태, 누가, 그리고 Q

“공관 복음서의 문제(Synoptic Problem)”라고 일반적으로 불리는 것들로 인해, 학자들은 각 복음서들이 쓰여진 순서를 결정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태, 마가, 그리고 누가복음에 묘사된 사건들의 순서적 차이를 해결하고, 왜 저자들이 같은 장면을 묘사하며 다른 단어를 사용했고, 다른 장면을 묘사하면서 비슷하거나 동일한 단어를 사용했는지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 복음서들은 성경에 나타나는 순서, 즉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복음의 순서대로 기록되었다고 가정되었습니다. 19세기에, 원전 비평가들은 마가복음이 맨처음 기록되었고,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의 기록을 차용했거나, 마가복음과 가상의 Q 문서 (독일어 Quelle, meaning “source”)로부터 빌려왔다고 제안했습니다.

Q문서의 그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고, 이러한 가설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교회 역사상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역사성은 많은 비평적 학자들과 심지어 몇몇 보수적 학자들에게 의해서 사실로써 받아들여 졌습니다. 비평적 학자들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언급에 기초해서, 이 가상적인 문서를 출판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문서는 몇몇 어려운 점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타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 큰 문제들을 불러 일으킵니다.

마가복음과 Q 문서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원전이라고 제안함으로써, 비평가들은 실질적으로 1차적 자료의 숫자를 줄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마태복음은 더이상 기록된 많은 사건을 실재로 목격했던, 예수님의 제자 중 한사람의 기록이 아닐 것입니다. 사실, 비평가들은 교회 역사동안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진 것보다 훨씬 더 늦은 연대를 각각의 복음서에 배정했습니다. 만약 복음서들이 1세기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실재 목격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며, 예수님에 관한 전설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들은 실재로 꾸며진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세기가 끝나기 전까지, 신약 전체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매우 확고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투표의 결과

예수 세미나의 참석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속임수를 쓴 또하나의 방법은 그들의 반-초자연적인 편견에 있습니다. 이러한 학자들은 예언과 기적은 불가능하며 하나님은 존재하시지 않거나, 만약 존재하시더라도, 우리는 그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합니다. 결과적으로, 초자연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구절은 자동적으로 무시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첫번째 기념비를 사용하는 것을 설명해 줍니다.

누군가 그들의 투표의 결과를 살펴본다면, 예수 세미나 참석자들의 편견을 명백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도마복음이 성경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거짓 기록일 뿐 아니라, 사도들이 모두 죽은 훨씬 이후인2세기에 쓰여졌으며, 교회에 의하여 권위가 있거나 진본으로 여겨진 적이 없습니다.

 

 

 

Page 90. 도표

 

 

이러한 결과들은 예수 세미나의 편견을 명백하게 보여 줍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에 관한 투표 결과를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단 한구절만이 진짜일지 모른다고 투표했습니다 (요한복음 4:44). 이 구절은 다른 기록들과 평행을 이루며, 따라서 예수 세미나의 투표자들은 명백하게 요한이 예수님의 입술을 통하여 나온 최초의 말씀을 직접 갖고 있지 않았다고 믿었습니다.

정경이 아닌 도마복음이 에수님이 실재로 말씀하셨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가장 높은 투표율(21.3%)을 기록하였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닌 것이 명백하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가장 낮은 표(45.5%)를 받은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왜 예수 세미나는 요한복음을 이토록 의심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낮은 점수는 요한복음이 정경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쓰여졌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며, 따라서 역사적 방법론에 따라, 사건으로부터 더욱 가까운 시점에 기록된 문서들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보다 훨씬 늦게 기록된 도마복음이 요한복음보다 30배 이상 많은 빨간 구슬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은 할 수 없습니다.

펀크는 요한복음을 이런 방식으로 다루는 이유들 중 하나가, “예수님은 늘상 속담이나 풍자 혹은 우화 또는 대화나 논쟁의 문맥 안에서 반박하거나, 거절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재담 등의 형식으로 말씀하셨고, 그가 요한복음에서 볼 수 있는 긴 독백의 형식으로 이야기 하지 않으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수 세미나의 창설자의 이 특정 발언은 그 모임의 가장 큰 문제들 중 몇몇을 강조하여 보여 줍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난지 거의 2,000년이 지난 시점의 비평가들이 어떤 사건이 일어났었는지 결정하는 데 있어서 목격자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매우 거만한 태도입니다.  이러한 사고를 하는 이유는 모든 면에서 역효과를 낳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 모던 세계에서 매우 만연해 있는 이러한 역사에 대한 부당한 평가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역사가들은 단지 그 당시의 편견과 무지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그들이 살던 세상의 결과물일 뿐이므로, 우리는 역사를 확실하게 알 수 없다고 믿도록 합니다. 더우기, 모든 역사가들은 그들이 지지하는 의제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복음서의 저자들은, 기독교를 홍보하려는 숨은 동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현대 과학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에, 기적의 결과라고 묘사되었던 것들은 오늘날 계몽된 사회에서는 다르게 검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역사를 의심한다면, 예수 세미나의 참석자들 역시 그들 자신의 편견과 계획 그리고 무지의영역을 가진, 그들 시대의 소산물일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세미나가 투표를 하고 그들의 작업을 출판하자마자, 이러한 문서들은 그러한 의심쩍은 역사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세미나의 참석자들은,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의 역사성을 폄훼하려는, 명백한 숨은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학자들은 진정으로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세미나 중 그들의 결론에 도달했을 뿐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이런 주장은 쉽게 논박됩니다. 만약 이러한 학자들이 진정으로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왜 매우 보수적인 학자들은 참석하도록 초청되지 않았을까요? 단지 특정학 개인들만 투표의 결과를 보장하기 위하여 초대되었습니다. 예수 세미나의 구성원들의 가정을 사용한다면, 누구나 이러한 편견을 가진 구성원들이 발견한 것들을 절대적으로 거부해야합니다.

짧은 말만 하신 영적인 예수님

더우기, 세미나의 참가자들은 어떻게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발견되는 긴 독백의 형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주님의 가장 긴 메세지는 산상수훈으로 알려진 마태복음 5-7 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의 두번째로 긴 올리베 담화는 마태복음 24-25에서 발견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메세지에 관한 많은 증거가 있지만 (두번의 설교의 간략한 형태가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세미나는 이러한 설교의 대부분을 역시 거부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긴 독백의 형태로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그들이 이미 가정하고 있는 믿음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비유담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 세미나에 의하여 받아들여진 격언을 좀처럼 인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왜 세미나가 요한복음을 이렇게 멸시하는가를 설명해 주는 명확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말미에 그가 쓴 글의 목적을 명시했습니다. “이 책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다른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기록된 목적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믿어서 예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20:30-31). 요한이 그의 복음을 기록할 때까지 세편의 복음서가 이미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내용적인 면에서 매우 비슷했습니다. 요한은 그 내용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보이게 할 것들만을 나누는 데 첫점을 맞추기로 결정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예수 세미나의 참가자들은 이러한 개념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들은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 세미나는, 복음서의 기록의 역사성과 권위를 훼손하기 위하여, 그들 자신의 반-초자연적 편견에 따라서 투표했던, 자유주의적 신학자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들의 “연구”는 목격자들의 증언과 예수님의 가장 일찍 따랐던 사람들의 믿음을 무시한, 거만하고 그릇된 방법론에 기초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임의 멤버들은 예수 세미나의 가짜 주장들을 영구히 지속시키기 원하는  미디어들에 의해, 최고 권위의 학자들을 대표하는 것처럼 비춰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임의 거짓 주장과 그들의 생각이 우리 문화가운데 어떻게 스며들어 왔는지를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모임은 사탄의 질문인 “정녕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느냐?”(창세기 3:1) 로부터 기인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많은 공격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정녕 예수님이 처녀로부터 나셨고, 죄없는 삶을 사셨으며, 기적을 보이셨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며, 삼일만에 육신이 부활하셨고, 40일간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천국으로 승천하셨으며, 언젠가 온 세상을 심판하러 돌아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말씀에 완벽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죄악을 회개하고 다가오는 심판을 면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신 창조주와 영원히 동행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7:3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