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모순되는 내용들이 존재하는가?

“당신은 성경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순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매우 인기 있는 견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란 단지 동화나 신화 혹은 모순으로 가득 찬 철지난 책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이야기는 어린 아이들에게 좋고 아마도 좋은 도덕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듣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비평가들은, “이러한 이야기들은 과학과 기술의 현대 사회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성경은, 떠다니는 도끼머리, 태양이 거꾸로 가는 것, 우주가 6일만에 창조되었다는 것, 지구에 구석들과 기둥이 있다는 것, 사람이 물 위로 걷는 것, 태양 이전에 빛의 존재, 이야기하는 뱀, 이야기하는 당나귀, 용, 그리고 모든 동물 두마리를 큰 배에 태운 늙은이에 관하여 이야기 합니다! 특별히 기독교적 세계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일들은 표면적으로 이상하게 보일 지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성경이 모순되는 점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한 곳에서는 어떤 주장을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정 반대의 주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믿어야 합니까? 분명히 두개의 모순되는 주장들 모두가 진실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많은 이상한 주장들을 받아들이게 되더라도, 진정한 모순은 원칙상 진리일 수 없습니다. 해가 빛나는 밤, 결혼한 총각, 마른 물, 진정한 거짓말 등과 같은 것들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는 주장은 진정 심각한 도전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단 하나의 모순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진리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실수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모순이 있다는 주장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반하는 심각한 혐의를 제기하는 것이고, 우리는 이러한 주장들에 대하여 성경을 변호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합니다.

논리적 vs 심리적 문제들 (Logical vs. Psychological Problems)

성경에 모순이 있다는 주장 뿐 아니라, 성경에 대한 대부분의 반발은 실재로 논리적인 관점으로부터 온 문제들이 아닙니다. “성경은 기적에 관한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적은 명백하게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은 그것이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이므로(미증명사항을 사실로 가정하므로)(it begs the question) 이성적이게 들리지 않습니다. 분명히 성경에 기록된 전능하신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따라서, 단지 기적이 불가능하다고 가정함으로써, 비평가는 이미 성경이 진리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해 버린 것입니다. 그의 논쟁은 순환적입니다. 그 비평가는 실질적으로, 성경이 거짓인 이유는 성경이 거짓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성경이 진실이라면, 전능하신 하나님께, 태양이 거꾸로 간다던지, 물 위를 걸으신다던지, 당나귀가 말하게 하신다던지, 죽은자를 살리시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직관에 반대되는 듯 보이기는 하지만, 비논리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진정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심리적인 문제입니다. 따라서 누군가 주관적으로 열왕기하 20:11에 기록된 것처럼 태양이 거꾸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일을 하셨다는 것에 있어서 비논리적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것이 직관에 반대되는 듯 보이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한 변호사가 그의 의뢰인이 무죄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존경하는 재판관님, 저는 정말로 정말로 제 마음 깊은 곳에서 그가 무죄라고 믿습니다. 저는 정말 그가 그 죄를 저질렀을 것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단지 그의 의견일 뿐입니다. 그것은 증거가 전혀 아니며, 멍청한 주장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과 같은 종류의 사고를 성경에 적용합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그들이 옳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에 성경이 진리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기적이 불가능 하다거나, 어떠한 성경의 주장이 그에게 타당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할 때, 그는 본질적으로, 성경이 거짓이라는 것을 가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주장들은 반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논리적 부정이 아닌, 단지, 심리적 의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진정한 도전을 제공한다기 보다,  단지 비평가의 감정적 상태에 대하여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모순의 도전

그러나 모순들은 다릅니다. 만약 성경이 특정한 주장을 하고, 또한 반대적인 주장을 한다면, 양쪽 모두는 같인 시각에 옳을 수 없습니다. 만약 성경이 진정으로 모순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진리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두가지 모순되는 주장 중 하나는 반드시 거짓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엇이 타당할 것 같은지에 대한 주관적 의견들과는 달리, 성경이 모순되는 점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주장은 진짜 심각한 도전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도전입니다.

그러나 모순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성경의 모순들은 “명백한” 모순조차 아닙니다. 왜냐하면 두 명제 사이에 꼭 부딪치는 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아담의 후손이다” 와 “예수님은 노아의 후손이다.”라는 언급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쪽 모두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모순이란, 하나의 명제와 그 정반대되는 명제 (상징적으로 “A 그리고 not A”)가 같은 시각에 같은 관계속에서 존재할 때 발생합니다. 비모순의 법칙(The law of non-contradiction)은 모순은 진리일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A와 not A 가 같은 시각, 같은 관계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It is impossible to have A and not A at the same time and in the same relationship.”). 이 정의의 나중 부분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명백히, A와 not A는 다른 시각에 모두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소위 말하는 성경의 모순들을 해결합니다. 그들은 같은 시각에 다른 관계하에 있다면 또한 모두 진실일 수 있습니다.

어감 혹은 관계에서의 차이점

단어들은 다른 어감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만약 관계나 어감이 다르다면, A와 not A 가 같은  시각에 존재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한 남자는 총각일 수 있고, 또한 결혼한 사람일 수 있는데, 그가, “그의 직업과 결혼했다” 라는 표현 하에서 가능합니다. 이 명제는 총각은 아내를 갖지 않았다는 뜻으로 결혼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과 상충되지 않습니다. 만약 어감이 다르다면, 모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몇몇 소위 성경의 모순은 이 부류에 해당됩니다. 에를 들면, 야고보서는 의롭다 하심의 주제에 있어서 로마서의 내용과 모순된다고 주장됩니다.

로마서 4:2-3은 아브라함은 그의 노력이 아닌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2:21, 24는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으로만이 아닌, 그의 행위로 의롭게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순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A 와 not A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계가 다릅니다. 로마서 4장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2장은 사람 앞에서 의롭다 함을 여게 되는 것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18); 행위로 인해 (믿음의 결과로써의) 아브라함은 사람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여김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모순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삼위 일체는 가끔 모순적인 개념이라는 오해를 받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일 수 있습니까?” 그러나 조사를 해 보면, 우리는 모순점이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관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한 어감(in one sense)에서 한분이시고, 다른 어감(in a different sense)에서 세분이시라고 가르칩니다. 구체적으로, 한분 하나님이 계시고 (이사야서 45:5-6, 18,22) 그리고, 하나님이신 세 인격이 존재합니다: 성부 (갈라디아서 1:1), 성자 (요한복음 20:31), 그리고 성령 (사도행전 5:3-4). 하나님이 하나의 상태와 세 인격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 직관에 반대되는 듯 보이지만, 여기에 모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는 몇몇 사람들에게 있어서 심리적 문제일 수 있지만, 논리적 문제는 아닙니다.

거짓 딜레마

어떤 성경의 모순이라는 것들은 진퇴양난 (dilemma)으로써 제시됩니다. “성경은 디모데후서 3:16에서 가리키는 대로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습니까, 아니면, 다른 구절들 (누가복음 1:3, 요한복음 21:24)에서 가리키는 대로 사람에 의해 쓰여졌습니까?” 이 주장이 의미하는 바는, 이 둘 중 하나만이 옳을 수 있으므로, 성경은 오류를 포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 딜레마의 오류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동시에 사람에 의해서 쓰여질 수 있지 않을 아무런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용하여 그의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 (메드로후서 1:21). 거짓 딜레마의 또다른 예는 두 단어 혹은 두 이름들이 동의어일 때입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아들(창세기 35:22-23)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의 아들(창세기 46:8)입니까? 양쪽 모두 맞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야곱이기 때문입니다.

맥락과 관련된 고려

어떤 모순이라는 것들은 문장을 문맥 밖으로 빼내는 오류를 범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1은 하나님이 계시고, 그가 만물을 만드셨음을 가리킵니다. 누군가 이것이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한 시편 14:1 과 모순된다고 주장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나 이것이 모순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편으로부터의 발췌는 문맥 밖으로 꺼내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맥상, 시편 14:1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한다” 라고 가르칩니다. 문맥을 고려했을 때, 모순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발언이나 사건등도 기록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명백히, 우리는 어떤 형태의 글을 연구할 때, 저자의 의도를 존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도 예외는 아닙니다. 역사적 서술은 일반적인(문자 그대로) 방식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성경의 시적인 문구는 그 의도 이상으로 억지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많은 언어적 형상화를 사용한 계시적인 부분들은 그렇게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성경의 이야기에서 제시된 상징들은 그 상징이 아닌 다른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됩니다. 지구는 문자적으로 기둥과 구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징적으로 그렇습니다. 오늘날조차, 어떤 사람은 “그 사회의 기둥”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우리는 아직도 “지구의 네 구석(four corners of the earth)” 이라는 표현을 기본 방향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합니다. 이러한 문구들이 지구가 평편하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제안하는 것은 부당하며, 문장을 문맥 밖으로 빼내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외형을 나타내는 언어, 특별히 어떤 것을 인간의 관점에서 보이는 대로 묘사하는 언어가 있습니다. 명백한 예는 성경에서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구절들의 문맥을 조사할 때, 우리는 저자가 어떤 천문학적 모델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혹은 동쪽이나 서쪽 같은 방향)을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절들을 문맥에서 끄집어 내서, 성경이 마치 천문학적으로 태양이 지구 주위를 공전한다고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전면적인 일반화의 오류

많은 곳에서 성경은 일반적인 용어 – 보통의 경우 (그러나 모든 경우는 아님) 진리인 것들 – 를 사용하여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잠언은 이러한 것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법칙들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모순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면적인 일반화의 오류 – 일반적인 원칙을 절대적인 원칙인 것처럼 적용하는 것 – 를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잠언은 절대적인 원칙으로써 받아들여 지려는 의도가 아닌, 대부분의 경우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원칙을 제공하려는 의도로 기술되었습니다.

더우기, 성경은 실재로 법칙인 것들도 포함하고 있지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예외조항이 있기도 합니다. 명백하게, 성경은 살인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정당방위나, 어떤 극악한 범죄 행위를 징벌하기 위하여, 그리고 전쟁시에는 당연히 예외입니다. 일반적인 원칙이나 법규의 에외는 모순이 아니며, 따라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어떤 도전이 될 수 없습니다.

번역상의 문제

또다른 어려움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래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이것은 번역상 문제의 가능성을 허용합니다. 번역으로 인한 혼란의 하나의 예는 요한복음 21:15-17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세 번 그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영어 번역에서는, 모든 경우에 같은 단어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대화가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어에는,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두 개의 다른 단어가 쓰였습니다. 첫번째와 두번째,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가 예수님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예수님은 아가페라는 단어(이타적이고 신적인 사랑을 의미)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대답하였을 때, 그는 필레오 라는 단어 ( 형제의 사랑을 의미)를 사용하였습니다. 영어의 love 가 두 단어를 번역하기에 옳은 단어이긴 하지만, 원문의 미세한 차이는 영어 번역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한 단어의 영어 번역이 올바른지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어떤 가능한 해석이 존재하는지 보기 위하여, 여러가지 다른 버전의 성경을 참조하거나, 히브리어/ 그리스어 사전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저자의 의도를 존중하려고 시도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이것은 논란이 되는 단어 혹은 구절의 조심스러운 연구를 포함합니다. 원문에 모순이 없을 때, 영어 번역에 있어서 모순점이 있다고 매도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추가적으로, 고대 성경의 필사본에는 아주 적은 다양성이 존재합니다. 고대의 필사본 중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하나도 없지만, 어떤 것들은 다른 숫자, 다른 스펠링 혹은 다른 단어 혹은 구절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문맥을 통해 어떤 필사본이 원본과 동일한지를 가리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고대 필사본의 차이점들은 분명히 옮겨 적는 사람들의 실수이며, 저자의 의도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저자는 전달과정의 실수에 책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잘 교육받은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잘못 옮겨적은 것이 오류를 포함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 오직 최초의 기록만이, 거룩하게 영감받은 것이므로 오류를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순이라고 주장되는 것들은 만약 고대의 필사본들이 오류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면, 묵살될 수 있습니다.

추정된 모순

추정된 모순 역시 기독교적 세계관에 있어서 진정한 문제점은 아닙니다. 추정된 모순이란 우리가 단지 본문에서 실재로 말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모순을 삽입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의 예로, 우리는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햄 후에 어디로 예수님을 데리고 갔습니까?” 라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13-15는 그들은 헤롯왕을 피해 이집트로 갔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2:22, 29는 그들이 아이를 예루살렘 (단지 베들레헴으로부터 몇 마일 떨어진)으로 데리고 갔음을 가리키며, 그 이후에는 나사렛으로 데려갔다고 말합니다. 누가의 기록에는 이집트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것이 모순일까요?

우리가 마태와 누가가 같은 기간, 베들레햄으로 간 같은 여행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지만, 본문은 실재로 이것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마태는 베들레햄으로 간 두번째 여행을 묘사하고 있을 지 모릅니다 (혹은 아마도 근처 지역). 사실 마태복음 2:16에 따르면, 동방박사들의 방문은 예수님의 탄생 이후 최대 2년정도 지난 시점이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요셉과 그의 가족은 베들레햄에서 예수님의 탄생 몇 개월 후 나사렛으로 갔고, 베들레햄 지역으로 간 두번째 여행 이후 이집트로 갔을 것입니다. 이것이 단지 하나의 가능성이긴 하지만, 논점은, 마태복음 2장과 누가복음 2장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명백한 모순은 본문이 아닌, 사람들의 마음속에만 존재합니다.

또다른 추정된 모순은 우리가 X and X only 오류 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독자가 실수로 성경에서 말하는 숫자 (X) 가 단지 그 숫자 (only X)만 가리키지 그 이상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발생합니다. 하나의 에로써, 마가복음 5:2-16 과 누가복음 8:26-37에 기록된 귀신들린 사람의 기록을 고려해 봅시다. 마태복음 8:28-34에 따르면, 귀신들린 두명의 남자가 나옵니다. 이것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과 모순됩니까? 우리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으로부터, 오직 한 명의 귀신들린 사람만 있었다고 추론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본문은 사실 그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주장하는 것을, X and X only 오류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만약 두명이 있었다면, 적어도 한명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어야 합니다(다른 한명과 함께)! 마가와 누가가 다른 한명을 언급하지 않은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아마도 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었거나, 알아챌 수 있는 행동을 했을 지 모릅니다. 우리는 단지 예상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어느 경우든, 마가와 누가는 오직 한 명만 있었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모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추론된 모순은, 우리가 본문에서 제공하지 않은 구체적인 부분을 부정확하게 상상했음을 말해 줍니다. 이러한 모순들은 성경 본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상상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성경적 세계관에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실재로 말씀하지 않는 것들로부터 교리적 결론을 도출함에 있어서 언제나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적 모순 그리고 미증명사항을 사실로 가정하는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Begging the Question)

또다른 형태의 비판은 “명백한 사실적 모순”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성경이 모순적이라고 주장하는 대신, 비평가들은 성경이 이미 확립된 사실과 모순된다고 혐의를 제기합니다. 두가지 종류의 사실적 모순이라고 하는 것들이 있는데, 두 경우 모두 논리저기 오류입니다. 첫번째 형태는, 문장을 잘못 읽음으로부터 옵니다. 이것은 앞서 이미 언급한 오류들로부터 발생합니다. 단어가 잘못된 어감으로 인식되거나, 구절을 문맥 밖에서 꺼낸다거나, 번역 혹은 필사본상의 논쟁, 혹은 어떤 성경의 가르침이 실재 성경에 기록된 것이 아닌, 단지 독자가 단지 추론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형태의 사실적 모순의 한 예는, 성경은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가르치며,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사실과 모순된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이 경우, 성경의 구절들(시편 93:1, 96:10)이 문맥에서 떨어져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 구절들은 시적인 구절들이며,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확립되었고, 그의 계획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을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시들은 어떤 천문학적 모델을 제시하거나 물리적 운동을 설명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사실, 시편기자는 또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I shall not be moved)” 라고 이야기 합니다. 분명히 저자는 그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겠다는 것을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 – 그는 하나님이 그를 위하여 만드신 경로로부터 이탈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번째 종류의 사실적 모순은, 비평가가 성경 본문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지만, 외부적인 사실이 실재로 무엇인가에 대하여 혼동된 것입니다. 이 경우, 세속적 믿음들이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라는 것이 가정됩니다. 그 예들은, 빅뱅이론, 진화론, 몇십억년의 시간의 틀, 자연주의 그리고 세속적인 사건발생순서 등을 포함합니다. 성경은 실재로 이러한 모든 것들과 모순됩니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단지 성경이 틀린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고 나서, 성경이 이러한 “사실”들과 모순되기 때문에, 성경이 틀리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증명사실을 사실로 가정하는,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 (the fallacy of begging the question) 입니다. 비평가들은 (세속적 주장들이 진실이라고 가정함으로) 단지 성경이 틀렸다고 가정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성경이 틀렸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이것은 순환논리의 악순환 그 이상도 아닙니다.

비모순의 법칙 (The Law of Non-contradiction) – 비기독교인들에 있어서 문제점

비평가들은, 성경이 모순되는 것들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아마도 이 주장의 가장 흥미로운 측면은, 그 주장이 사실 비평가에게 있어 역효과를 낸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성경이 사실이어야만, 모순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모순의 법칙을 단지 가정합니다. 그들은 모순이 진리일 수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 들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한 번 멈추고, 왜 모순이 진리일 수 없는지에 관하여 생각해 보셨습니까?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 안에 모든 진리가 있습니다 (골로새서 2:3, 잠언 1:7), 그리고 하나님은 그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디모데후서 2:13). 따라서, 진리가 그 자신과 대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원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지속적으로 전 우주를 지탱하시기 때문에 (히브리서 1;3),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모순도 이 우주에서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기대합니다.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비모순의 법칙은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상태로부터 기인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떠나서, 우리는 어떻게 모순이 항상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단지 모순이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보면, 항상 틀려 왔다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매우 제한적이며, 미래를 경험해 본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누군가 진정한 모순을 마침내 발견했다고 주장한다면, 비기독교인들은 이 주장을 묵살할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적 세계관만이, 우리는 모순이 언제나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비모순의 법칙에 대한 기반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이야기합니다 (골로새서 2:3), 그리고 우리가 성경적 원리들을 거부할 때, 우리는 어리석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잠언 1:7). 우리는 하나님의 논리의 법칙을 성경을 부인하기 위하여 사용하려고 하는 비평가들을 통해 이 점을 봅니다. 이러한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모순의 법칙은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이 법칙을 가능한 것의 기반으로 사용할 때, 그들은 전략적으로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가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바판자들은 성경을 비난하기 위하여 성경적 원리들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이 의미를 갖으려면, 그들의 주장이 틀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결론

이 장에서, 우리는 성경에 대한 많은 비평들이 실재로 모순점들이 아닌, 무엇이 가능할지에 관한 순수한 의견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의 논리적 문제점들(logical problems)이 아니라, 비평가들의 심리적 문제점들(psychological problems) 입니다. 모순은 “A 와 not A가 동시에 같은 관계 하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경의 모순점들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A와 not A 가 같은 시각에 존재하지 않거나, 같은 어감 및 같은 관계가 아닌, 다른 어감 및 다른 관계하에서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모순이 전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평가들은 때때로 두개의 성경적 원리들을 마치 그 둘이 상호 배타적인 선택인 것처럼 제안하지만, 사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 거짓 딜레마.

다른 예에서, 우리는 단어나 어구가 문맥 밖으로 끄집어 내어졌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시적인 문구가 과도하게 문자 그대로, 상징적 이야기가 그렇지 않게, 외견상의 표현을 마치 뉴튼의 역학을 표현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때때로 비평가들은 전면적인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릅니다: 일반적인 원칙을 마치 예외가 전혀 없는 불변의 법칙으로써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어떤 제기된 오류는 단지 번역상 혹은 필사본의 문제입니다; 최초의 말씀은 그 어떤 모순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추가적으로, 많은 모순들은 단지 잘못된 추론입니다: 그것들은 성경 본문이 아닌, 비평가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많이 발생하는 특별한 경우는, 성경이 실재로 그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음에도, 비평가들은 어떠한 숫자 (X)는 오직 그 숫자 (only X)만을 의마한다고 가정할 때 생깁니다. 또한 성경은 때때로 어떤 외부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가정됩니다. 많은 경우, 성경을 잘못 읽음으로부터 나오기도 하지만, 다른 경우들은, 비평가들이 단순히 성경이 어떤 특정한 믿음과 반대되기 때문에, 성경이 틀렸다고 가정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평가들은 미증명사항을 사실로 가정하는 선결문제요구의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가장 중대하게, 우리는, 모순이 존재한다고 하는 주장이 실재로는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확증한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비모순의 법칙이 성경적 세계관에 기초해 있기 때문입니다. 비평가들이 모순은 전혀 진리일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성경은 진리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 성경이 모순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그 질문을 되돌려 그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만약 성경이 진리가 아니라면, 모순이 어째서 잘못된 것입니까?” 만약 성경이 진리가 아니라면, 모순은 항상 거짓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따라서 비평가들은 이른바 그것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이 거짓일수 밖에 없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성경이 진리라면, 성경은 모순을 포함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른바 모순은 원칙상으로조차 성경에 있어서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몇몇 가장 많이 인용되는 성경의 모순들에 대하여 알고, 왜 이러한 주장들이, 우리가 문맥을 이해할 때, 성공할 수 없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면들을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성경이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 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전체에 걸쳐 진실됩니다. 이른바 모순이라는 것들은 비평가들의 그릇된 논리라는 것이 밝혀 집니다. 본질적으로, 그들의 모든 주장들은 위에서 언급된 범주 중의 하나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운 문제들을 빗겨간다고 책잡히지 않기 위하여, 각각의 주장들을 철저히 보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성경은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베드로전서 3:15)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우리는 이러한 연구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견고히 하며, 비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도전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 시리즈가 우리 구주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기도드립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골로새서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