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mework 가설 

1800년대 초반부터, 많은 기독교인들이 지구가 몇십억년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여 왔습니다. 그 개념은 성경 본문의 단순한 이해와 반대됩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의 초반부 장들과 오래된 나이의 생각을 조화시키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고 애써 왔습니다. 간격 이론, 날-시대 이론, 점진적 창조설 등의 많은 가설들이 제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이 장려되면서, 각각의 관점은 임의적인 해석방법에 기초해 있고, 성경 본문과 맞지 않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명백해 졌습니다.

1924년, 새로운 관점인 framework 가설이, 이러한 문제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한, Arie Noordtzij 에 의해서 개발되었습니다. 약 30년 후, 메리디쓰 클라인은 이러한 견해를 미국에서 유행시켰고, N.H. 리더보스는 유럽에서 같은 일을 했습니다. 그것은 현재 신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창세기 1장에 관한 가장 인기 있는 견해중 하나입니다. 학계에서의 그것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은, 그것에 대해서 조금은 들어 보았을지라도, 이 견해에 대한 완전한 설명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Framework 가설은 근본적으로 창세기 1장의 문학 장르를 역사적 서술이 아닌 다른 문학장르로 재분류하려는 시도입니다. 지지자들은 본문 안에서 상징적인 언어나 준 시적(semi-poetic)인 장치를 찾으려고 시도해 왔습니다. 성경의 첫 장이 그 단순한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증명했다고 생각하고, 그들은 창세기 1장은 단순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인간을 그분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을 보여 주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언제, 어떻게 그 일을 하셨는가에 대한 정보는 전혀 주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Framework 가설의 가장 앞선 지지자는, 그것을 지지하는 그의 목적에 대하여 설명할 때, 솔직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창세기의 창조주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젊은 지구론자들을 논박하는 것이 이 글의 중심 목표입니다…. 시간의 틀에 관한 결론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가설을 세우는 데 있어서, 과학자들은 성경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메리디쓰 클라인과 같은,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성경 학자가, 그가 과학자들은 “성경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급진적인 주장을 하기 위하여, 창조기사의 문자적 해석은, Framework 가설과 같은, 비문자적 해석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더우기, 무엇이 성경적 학자가 창조기사를 이러한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동기를 부여했을까요?

이 장은 클라인과 다른 framework 지지자들이 그들의 창세기 1:1-2:3을 비문자적 해석하는 데 사용한, 세 커다란 주장(삼일로 이루어진 두 그룹의 날들 (two triad of “days”), 끝나지 않은 제 칠일의 성질, 그리고 평범한 섭리)을 평가하는 데 촛점을 맞춥니다. 이러한 세가지 주장에 대한 평가 다음에는 framework 견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가정을 평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삼일로 이루어진 그룹의 날들” (Two Triads of “Days”)

삼일로 이루어진 두 그룹의 날들 이라는 주장은 모든 framework 지지자들이 동의하는 전제입니다. Framework 지지자들은 두 그룹의 “날들”은, 첫번째 3일의 주제가, 나중 3일의 주제와 평행적으로 전개되는,  주제의 평행적 전개(topical parallelism)라고 주장합니다. 첫째날과 넷째날의 평행적 성격에 대하여, 마크 푸타토는 “첫째날과 넷째날은 같은 창조 사건에 대한 두개의 다른 관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전체 창조기사의 전체적인 주제의 배치로 돌아가서, 클라인은, “연속적인 날들로 이루어진 첫번째 그룹 (첫째날 – 셋째날)은 연속적으로 이루어 진 두번째 그룹(넷째날 – 여섯째날)과 일치한다”라고 기록합니다. 다른말로 하면, 첫째날과 넷째날은 같은 사건에 대한 두가지 다른 기록 방식이고, 둘째날과 다섯째날, 그리고 셋째날과 여섯째날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다음의 표는 많은 framework 지지자들에 의해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며, 주제의 평행성을 반영합니다.

 

Page 191. 표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저자들이 무언가 의미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러한 주장에는 몇몇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이러한 소위 준 시적인 구성은, 창세기 1장이 역사적인 기록이라는 사실과 부합되지 않습니다. 히브리 학자 스티븐 보이드는 창세기 1장이 시가 아닌 역사적 서술로써 쓰여졌음을 명백하게 밝혔습니다. 히브리 시는 미완료 및 완료동사를 많이 사용합니다. 대조적으로, 히브리 역사 서술은 자주, 과거 시점의 순차적 사건을 가리키는, waw-consecutive preterite verbs 를 사용합니다. 사사기 4장과 5장의 비교는 이러한 차이의 좋은 예를 보여줍니다. 사사기 4장에서, 드보라와 바락이 시스라의 군대를 쳐부순 기록은 역사적 서술로써 설명되어 있습니다. 다음 장은 같은 사건을 묘사하는 시적인 노래입니다. 단어의 차이는 영어 번역에서조차 매우 명백합니다. 같은 차이점이 역사적 서술인 창세기 1장과, 시편 104편과 같은, 창조기사의 시적인 묘사 사이에서도 발견됩니다. 522 문장을 연구하고 분류한 후, 보이드는 창세기 1장은 실질적으로 100 % 역사적 서술로 분류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둘째, 위의 표는 창세기 1:1-2:3 장의 본문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물은 둘째날 창조되지 않았고, 첫째날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1:2는 “하나님의 영이 수면위를 운행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첫째날 빛이 창조되기 이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첫째날과 다섯째날이 평행적으로 보아져야 할 것입니다. 이 도표의 또다른 문제는, 넷째날의 천체의 빛을 머금은 것들 (heavenly light-bearers) 이 둘째날의 천체(heaven)에 놓여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첫째날과 넷째날이 같은 사건을 두가지 다른 관점에서 관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framework 지지자들에게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둘째날과 다섯째날에 묘사된 사건 이전에 생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별들이 아직 존재하지도 않은 곳에 놓여질 수 있었습니까?

셋째, 여기서 사건들의 순서가 중요합니다. Framework 가설은 날짜들이 연대순이 아닌, 신학적이라고 제안합니다 (days are not chronological, but theological).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시간적인 순서를 재배열 한다면, 그것은 불합리하게 되고 맙니다. 첫째날의 물은 둘째날 나누어 지기 위하여 이미 존재했어야 합니다.셋째날, 마른 땅이 물에서 나타납니다. 넷째날의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은 궁창 (heavens, expanse, firmament) 에 놓여집니다. 다섯째날의 새들은 둘째날의 궁창에서 날았고, 세번째날의 땅에서 번식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모든 창조물을 다스리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 졌습니다 (창세기 1:28).  창조의 날들을 재배열하려는 어떤 시도도, 불가능한 것을 본문에 끼워넣게 됩니다.

분석을 마치며, framework의 창세기 1:1-2:3 을, 삼일로 이루어진 두 그룹의 주제적 기술로써 재해석하는 것은, 창조기사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데 실패한, 적절하지 않은 접근입니다.

일곱번째 날의 끝나지 않은 상태

Framework 을 지지하는 두번째 논쟁은, 창조의 일곱번째날은 끝나지 않은(적어도 길고 아직까지 지속되는)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는 framework 지지자들에게 표준적인 논쟁인데, 그것은 첫번째 안식일이 지속되고 있고, 따라서 나머지 6일도 긴 시간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두가지 요소가 일곱번째 날이 끝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이야기됩니다. 첫째, 창조의 각 6일이 저녁-아침의 공식으로 끝마쳐지는데 반해, 창세기 2:1-3의 일곱번째 날의 묘사는 저녁-아침 공식을 생략하고, 이는 지속되는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둘째, 히브리서 4장은 영원한 안식일의 휴식에 관한 주제로써 이러한 일곱번째 날의 이해를 확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쟁에 대한 답변을 하려면,  창조기사에서 “저녁”과 “아침” 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인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녁이 되고”와 “아침이 되고”라는 구절은, 창조기사에서 창조의 한 날로부터 다음날로 바뀌는 것을 표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녁”은, 하나님이 하루의 창조 사역을 중단하실 때, 빛의 기간이 마쳐짐을 의미하고, “아침”은 하나님이 그의 사역을 재개하실 때, 빛이 갱신되는 것을 표시한다는 것입니다. 명령(“let there be”와  같은)과 이루어짐(“it was so” or “there was”)같은 표현들이 창조의 매일 사용되었지만,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마쳐진 일곱번째 날에는 필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끝났기 때문에, “저녁” “아침” 결론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곱번째 날의 저녁-아침 공식의 생략이 그날이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하거나 증명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추가적으로, 히브리서 4장은 일곱번째 날이 영원한 날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실질적인 증거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4장에 제시된 영원한 안식은 창세기 2:1-3에 나오는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고 쉬시는 것과 비유됩니다. 저녁-아침 결말의 모자이크적인 생략에 근거해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첫번째 안식일을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을 좆은 패턴 형식으로써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2:2-3의 쉼의 종류는 히브리서 4:3-11의 쉼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창세기 2:2-3의 쉼은 신성한 창조 기사의 중단입니다. 오직 창조주만이 이런 활동으로부터 멈추실 수 있습니다. 피조물이 그러한 중단을 경험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4:3-11의 안식일-휴식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실재로 경험하는 안식입니다. 따라서, 두 구절에서 쉼은 동일할 수 없습니다. Framework의 입장은 창세기 2장의 “안식”이 히브리서 4장의 안식과 동일하다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의 안식과 히브리서 4장의 안식이 동일하다는 것을 가정하는 대신, framework 창성자들은 이 동일성을 증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우기, 히브리서 4장은 일곱번째 날이 계속된다고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쉼이 계속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신적인 창조사역을 그날 중단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날 자체는 계속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일주일간의 휴가를 금요일에 떠난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주 화요일에, 그는 아직도 일을 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금요일이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만약, 일곱째 날이 끝나지 않은 것을 보일 수 있다면, 이 논쟁은 실재로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입증해 버린 셈입니다.  만약 일곱번째 날이 저녁과 아침이라는 구절이 없기 때문에 계속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처음 6일이 일반적인 길이의 하루라는 것에 대한, 의도되지 않은 인정인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저녁과 아침”이라는 구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섭리

메리디쓰 클라인은 일반적인 섭리 주장을 “전통적인 해석에 대항하는 가장 결정적인 주장”으로 불렀습니다. 클라인에 따르면, 창세기 2:5-6은 창조의 셋째날의 지구를 묘사합니다. 그는 들판의 식물들이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아직 비를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관찰할 수 있는 자연적인 방법을 통해 창조하신 증거로써 보았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2:5에 단단히 박혀 있는 것은, 신적인 섭리의 작업 방식은 창조주간동안이나, 현재의 일반 섭리나 동일하다는 원칙입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접근이 창세기 1장을 해석할 때, 이러한 계시와 통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2:5절과 대조적으로, 24시간 학설은, 하나님이 그의 사역을 수행하심에 있어서, 일반적인 이차적 방법 이외의 것을 사용하셨을 것을 가정해야만 합니다. 하나의 예만 들어 본다면, 물이 바다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 식물들로 뒤덮여야 하는 것이 “셋째날”의 작업입니다(창세기 1:9-13). 우리가 의심하고 있는 학설들에 따르면, 이 모든 일들이 24시간 내에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물에서 바로 드러난 대륙들은, 일반적인 증발 현상에 의해서는, 그렇게 빨리 마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5에서 드러난 원칙에 의하면, 그 당시의 증발작용은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다시금, 클라인의 주장에는 많은 문제점이 존재합니다. 첫째, 창세기 2:5-6은 셋째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인간을 창조하기 직전인 여섯째날을 가리킵니다. 이 구절들에는 “들판의 초목”(siah hassadeh)과 “들판의 식물”(eseb hassadeh)을 가리키는 두개의 특정한 히브리어 단어가 있습니다. 이 히브리 단어들은 하나님이 셋째날 만드신 “풀”과 “씨맺는 채소”그리고 “과일을 내는 나무”들에 대해 사용된 단어들과는 다릅니다(창세기 1:11-12). 공교롭게도, Framework을 지지하는, 루타토는 “들판의 초목”을 스텝지대의 가시와 엉겅퀴를 포함한 야생관목들, 그리고 “들판의 식물”을 재배되는 곡물들로 묘사했습니다. 가시돋힌 식물들과 경작된 곡물들이 왜 아직 존재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것은 쉽게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땅을 경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직 창조되지 않았으며, 죄로 인한 저주의 결과인 가시 돋힌 식물도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창세기 3:18).

둘째, framework 지지자들에의 주장하는일반섭리의 개념은 동일과정설 (uniformitarianism)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 반성경적인 철학체계는 모든 오래된 지구관을 뒷받침합니다. 근본적으로, 동일과정설은, 지금 세상에서 일들이 일어나는 방식이 과거에도 항상 같은 방식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과학자들이 기적을 목격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과거에도 절대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느리고 점진적인 과정들이 과거의 사건들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거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러한 철학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도래할 것이며,  창조와 홍수를 부인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무시하기 위하여 이러한 철학체계를 사용할 것임을 경고했습니다 (베드로후서 3:3-6).

셋째, 하나님은 적어도 두가지 방식으로 그의 능력을 사람에게 보이십니다. 일반섭리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지탱하십니다(히브리서 1:3).  이것이 “자연적”이고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만물의 법칙이므로, 사람들은 자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하나님이 지탱하신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특별한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의 일을 행하시기 위해, 한시적으로 “자연적”인 만물의 법칙을 중지시키십니다. 이것이 일어날 때,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즉각적으로 명백해 집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즉각성의 법칙(principle of immediacy)” 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의 고전적인 예는 예수님이 최근 죽었던 야이로의 딸에게 말씀하셨을 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마가는,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마가복음 5:42-43)”라고 이야기합니다. 즉각성이 중요한 이유는, 만약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여자아이가 며칠 후에 살아났다면, 그 놀라운 사건의 원인을 예수님께 돌릴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52에서, 예수님이 고치셨을 때, 맹인이 “즉각” 눈을 뜨게된 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금 그 맹인이 즉각 시력을 회복하지 않고, 몇년에 걸쳐 느리게 시력을 회복했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기적의 원인을 예수님께 돌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논의와 매우 관련해서, 시편 33:8-9는 창조에 관하여 몇가지 흥미로운 말씀을 합니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하나님의 창조주간 동안 어떠한 것이 존재하게 하셨을 때, “그는 말씀하셨고, 그대로 행해졌습니다.” 창조가 어떤 오랜 시간 동안의 발전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없습니다. 클라인의 말과는 반대로, 하나님은 창조주간 동안 일반적인 섭리를 사용하여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인용되어져야 할 구약의 두가지 기적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4:21-22 는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른 땅”을 지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3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5절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강물로 들어가는 순간, 물이 어떻게 즉각적으로 멈추게 되었는지 묘사합니다. 17절은 제사장들이 “요단의 가운데 마른 땅 위에 섰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삼일째 되는 날, 땅이 나타나게 하셨으므로, 바다에서 갓 드러난 대륙들은 실재로 “마른 땅” 이었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반적인 섭리 주장에는 논리적인 결점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일반적인 섭리의 몇백만년의 시간을 사용해서 바다로부터 땅이 나오고, 땅에 식물들이 자라게 하셨다면, 왜 그 시기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은 것입니까? 결국, 만약에 하나님이 자연적인 과정을 사용하셨다면, 물의 순환 싸이클 역시, 그 때 이미 완전히 작동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점에서 이미 일반적인 섭리 주장은 그 자체적 모순이 있습니다.

가정의 중요성

Framework 에 관하여 다른 문제점들을 지적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 주장을 지탱하는 가정들에 대한 주제를 다루겠습니다. 1800년대 중반 찰스 라이엘의 때까지, 창조주간의 날을 문자적으로 해석했던 견해가 교부들의 지배적인 견해였기 때문에, 어떠한 추정이 framework 주장자들로 하여금 창조기사를 재해석하도록 동기부여를 했을까요? 라이엘의 시기때로부터 근본적으로 바뀌어 온 것은, 사람들이 과학을 정의하고 사용한 방식입니다. 근대과학적 견해는, 성경적 계시와 동등하거나 더 위대한 것의 위치를 점하는 것으로 격상되어졌습니다. 많은 비문자적 해석(창조기사에 관한)은 “과학의” 견해를 일반적 계시로 지칭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격상으로, “과학적 견해”는 많은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창세기 1:1-2:3의 문자적 견해를 버리고, framework 과 같은 비문자적 견해를 취하도록 영향을 끼쳤습니다.

“과학적 견해”는 framework 지지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처음에 논했던 메리디쓰 클라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사실입니다: “창세기의 창조주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젊은 지구론자들을 논박하는 것이 이 글의 중심 목표입니다…. 시간의 틀에 관한 결론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가설을 세우는 데 있어서, 과학자들은 성경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클라인은 과학자들이, 지구의 나이에 관하여, 성경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제안할 수 있을까요? 쉽게 대답하면, 창조 기사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을 반박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이것은, 그가 창조기사에 대한 역사적인 해석을 거부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물론,  클라인은, 현대과학이 성경해석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라 강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반영하지 않습니까?

또다른 framework 지지자인 부루스 월트키는 과학을 더 신뢰하는 그의 헌신을 나눕니다. 그에 따르면, “창조의 날들은 엄격한 역사적 기록에 문제점을 제기합니다. 현대과학은 거의 이견 없이 한주동안 창조가 가능하다는 것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간략하게 지구과학의 증거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창조의 일반적인 계시는 성경의 특별한 계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주’ 가운데 살고 있고, 모든 진리는 하나의 음성으로 이야기합니다.” “현대 과학자들”에 의해 해석된 “지구과학”을 마치 “일반계시”인 듯 표현하고 있는 것 같이 들리지 않습니까? 이것이 맞다면, 이것은 “현대 과학자들”에 의해 해석된 “일반 계시”가 성경이 일반 계시라고 부르는 것과는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그것은 창조 시점부터 근대까지는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더우기, 이것은 과학적 의견과 일반 계시를 혼동하며, 일반 계시가 특별 계시와 같은 명제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 계시를 정의하는 것은 성경의 명제적 계시입니다 (시편 19:1-6, 전도서 3:11, 사도행전 14:17, 17:23-31, 로마서 1:18-25, 2:14-15, 10:18). 그리고, 말씀은 일반 계시를, 모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하나님에 관한 끊임없는 지식이라고 정의합니다. 결과적으로, 과학자들의 의견을 일반 계시와 동일시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적절하지 않습니다.

클라인과 월트키에 의한 언급의 조명하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현대를 살고 있지 않다면, 이러한 형태의 언급을 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그리고  framework 이나 창세기 1:1-2:3에 관한 다른 해석들이 복음주의자들에게 온당한 선택이긴 하였을가? 우리가 사는 세대의 영성이, 창조기사를 재해석하는 것을 유도하는, 근대적 사고를 만들어 낸 듯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재해석을 빚어내도록 영향을 끼친 것들 대부분은, 성경적 신학에서 온 것이 아닌,  성경 외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결론을 내리면, 창세기 1:1-2:3을 재해석할 그 어떤 성경적 이유도 없습니다.

결론

Framework 가설은 창세기 1장을 재해석하기 위한 기발한 시도입니다. 세련된 주장을 사용하면서, 그것은 많은 사람들로하여금 창세기 1장의 단순한 말씀이, 직접적이고 역사적인 기록이 아닌 다른 것으로 재분류되어야 한다고 믿게끔 했습니다. 그럼에 따라, 창세기 1장에서, “언제”, “어떻게” 창조되었는가를 다루는 단어들은 무시되었습니다.

이 간단한 조사는 이 가설의 지지자들에 의해 제시된 주장의 오류를 보일 수 있었습니다. 이 가설은 그 어떤 조화론적 견해보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신자들로 하여금 본문 자체를 무시하도록 하며, 실질적으로 창세기 1장을 거룩한 이솝이야기로 바꾸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느리고 꾸준한 거북이가 빠른 토끼와 경주해서 이긴 사실이 정말로 중요합니까? 물론 아니지요. 당신이 그 이야기의 교훈인, 꾸준함은 결국 승리한다는 것을 이해만 한다면 말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framework 지지자들은,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그가 인간을 그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창조 기사의 많은 문자적으로 구체적인 요소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의 늘 변하는 의견에 맞추기 위하여,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재해석하려는 아주 많은 실패한 시도들 중 가장 최근의 것이며,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 모두는 그것을 거부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