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할까?

한 인기있는 신학교 교수가 아담과 이브의 창조에 관해 최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이 에덴 동산 밖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시기 전까지 경험했던 죄악들은, 다른 동물들이 경험했던 것, 자연적 죄악과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되었습니다. 고통은 실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의도적인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써 경험된 것은 아닌 것입니다. 더우기, 하나님이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신 후에는, 우리는 첫번째 인간들은 그들의 과거의 동물로서의 삶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는 경험을 했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생기가 불어넣어진 후에, 더 높은 차원에서 자각하며, 그들은 그들이 과거에 행했던 낮은 동물적 자각을 초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 그들은 다시 그들의 낮은 동물적 자각을 의지하려는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교수님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으시기 전에는 동물이었습니다. 생기를 불어 넣으셨을 때, 그들은 그들의 동물로써의 생활에 대한 기억 상실증을 경험했고, 그들의 동물로서의 과거를 더이상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주장이 어떻게, 하나님이 아담을 땅의 먼지로 지으셨고 (창세기 2:7), 이브를 아담의 갈빗대로 지으셨다는 (창세기 2:22)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될까요? 이 교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타당한 해석을 내리고 있나요? 그가 내린 해석의 노력이,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진리의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려고 노력하기를 쉬지 말라고 조언할 때, 바울의 머릿속에 있던 것일까요(디모데후서 2:15)?

위의 예는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포스트 모던 시대에,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어떤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괴상한 해석도 받아들여집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의미는 관찰자의 견해에 따라 다르고, 당신은 당신을 위해 진리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예수님의 예에 위배됩니다. 그는 늘상 성경말씀을 왜곡하거나, 잘못 적용하는 사람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성경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메세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정확하게 그의 말씀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달하실 수 있다는, 완벽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하게, 우리가 작가가 의도한 의미(Author’s Intended Meaning)가 무엇이었는가를 결정할 수 있도록, 우리가 어떻게 올바로 해석할지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주어진 문서는, 저자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도한 바를 의미합니다.다른 대안은 의사소통을 의미없이 만들 것입니다. 만약 독자가, 작가가 의도한 바가 아니라,  문장으로부터 그들이 원하는 것만 취하려고 한다면, 그 어떤 것도 기록할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의사소통은 언어가, 저자 혹은 화자의 의도를 싣고 있다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물론 화자가 우리를 미리 속이려고 작정하고 있지 않다면 말이죠.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말씀을 이해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해석

해석학은 성경해석의 원칙을 확인하고 적용하는 데 촛점을 맞추는 신학의 한 분야입니다. 성경은 일반적으로 그의미에 있어서 평범하지만, 올바른 해석은 조심스러운 연구를 필요로 하고, 늘 쉬운 작업만은 아닙니다. 성경이 약 2,000년에 걸쳐 40 여명의 저자가 세가지 다른 언어(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를 사용해서 기록했음을 고려해 보십시오. 저자들은 각기 다른 문학장르와, 다른 단어, 각자의 성격, 문화적 배경, 그리고 사회적 지위에 따라 기록했습니다. 성령님은 그들 각각을 움직이셔서, 그의 영감으로 되어지고, 완벽하고, 무오한 그의 말씀을 만들어 내셨으나(디모데 후서 3:16, 베드로후서 1:20-21), 그는 그들의 다양한 글쓰는 스타일과 인격이 성경에 표현되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성경은 현대 사회와는 매우 다른 문화 가운데 쓰여졌고, 그 원래 언어로부터 번역이 되어 졌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이러한 몇몇 요소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사실, 많은 성경학교와 신학교에서 학생들은 해석학 과목을 수강해야 합니다. 해석의 원칙을 설명하기 위하여 많은 책들이 쓰여졌고,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들이 몇몇 특정 부분에서 동의하고 있지는 않지만, 진리의 말씀을 구분하기 위해 필요한 주요 법칙에 대해서는 대부분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단지 학문적 엘리트들만이 올바로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안타깝게도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윌리암 틴데일은 단지 몇몇 특정한 사람들만이, 일반인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라틴어 번역본만 존재하였던 16세기 초기에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인들이 접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영어로 번역하려고 시도했습니다. 틴데일은 한 성직자에게 자신은 쟁기를 끄는 소년이 그 성직자 보다 성경에 대해서 더 많이 알도록 할 수 있다고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갖을 수 있도록,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가 하신일에 대해서 배울 수 있도록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견해가 언제나 옳다거나, 어떤 특정한 교사의 믿음이 늘 옳다고 생각하게 하는, 우리의 자만심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의 명령대로, 구약을 매일 찾아봄으로 바울의 교훈이 사실인지 알아보려 했던, 뵈레아 사람들과 같아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7:11).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그의 말씀을 알고 이해하기 원하십니다 –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이유이며, 아버지들에게 집에서 성경을 자식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신 이유입니다 (신명기 6:4-9). 그러나 우리는 몇가지 중요한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 말은, 성경이 어떤 “초논리적” 영적 통찰력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제한된 이해력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교만으로 인해 방해 받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올바로 생각하고 성경을 왜곡하지 않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베드로후서 3:16).

둘째, 그 어떤 사람도, 그의 일생을 바친다고 할지라도, 성경말씀의 깊이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그 기본적 의미를 알 수 있는 반면에, 가장 교육을 많이 받은 신학자라 할지라도 연구할 때, 새로운 것을 계속해서 배울 수 있는, 놀라운 방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교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데 일생을 바친, 지혜로운 사람과, 재능있는 교사들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에 앞서간 선조들의 노력을 자동적으로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기록된 자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문법과 해석의 기본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법과 규칙을 (특별히 창세기에 관하여) 나중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두가지 개념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해석”과 “적용”은, 서로 연관성이 있긴 하지만,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석은 다음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입니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고 “본문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적용은 해석을 따르며, 다음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내가 어떻게 이 진리를 오늘 내 삶속에 적용할 수 있겠는가?” 결국, 성경을 연구하는 목적은 단지 우리의 머리를 정보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가 무엇을 알기를 원하시는지를 배워서, 그가 원하는 삶을 살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을 사용할 것인가?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역사적-문법적 접근 방식으로 알려진 해석 방법을 따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책이 기록된 역사적 문화적 환경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여, 단어의 문자적 의미를 알아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문에 대한 해석을 내리기 위해, 그 책의 특정 문학장르에 따라, 문법의 기본 법칙을 따릅니다. 우리는 세심한 해석, 혹은 “주해(exegesis)”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 그것은 작가가 의미하려고 했던 것으로부터 문장을 파악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각으로 본문을 재해석하여, 독자가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결정하는,  “자기해석(eisegesis)”의 반대개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해(exegesis)는, 그 문장의 진정한 의미가, 독자가 아닌, 필자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에, 문장의 저자가 의미한 바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학적 접근은 몇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을 해석했던 신약의 저자들 역시  이러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방법이야 말로, 우리가 올바른 길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견제와 균형”의 내부적 체계를 제공하는 접근방식입니다. 우리가 보여드릴 것처럼, 다른 해석방법은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진정으로 반영하지 않는, 개인적인 견해가 그의 해석에 스며드는 것을 허용합니다.

마지막으로 주해적(exegesis) 접근은 우리가 타인과 교류하며 늘상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예를 들면,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는 내일 아침 운전해서 일하러 가겠소.”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즉각, 그가 무슨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가 그가 고용된 장소로 운전할 수 있는 차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명백하게 그가 다음날 이른 시각에 하려고 계획한 것입니다.

만약 포스트모던적 접근이 정확하고, 메세지의 의미가, 말하는 사람이 아닌 듣는 사람에 의해서 결정된다면, 아마 당신의 친구는 단지 그가 팬케이크를 좋아한다고 당신에게 말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의사소통은 불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만약 당신의 친구가 당신 뿐 아니라 여러 명의 친구들에게 동시에 이야기한다면, 더욱 악화됩니다. 한 친구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에 대하여 얘기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친구는 그가 공기의 존재에 대해서 믿지 않는다고 의미하는 것이라 해석하고, 또다른 친구는 그가 10년후, 일히러 걸어가겠다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단어는 특정한 문맥에서 특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단어들이 문장이나 단락에서 조합되어 있다면, 우리는, 올바른 의미를 추론해 내기 위하여, 상식적인 문법을 따라야 합니다. 메세지를 보내는 사람이, 특정한 순서나 문맥에서 단어들을 조합하고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들이 그들이 사용한 단어를, 그들이 사용한 순서대로, 고르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저자가 의도한 의미(AIM)를 알아내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해석의 원칙

성경을 해석하는 목적이 저자가 의도한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추론한 원리들을 따라야 합니다. 다음의 원리들은 철저한 목록은 아니지만, 해석에 관한 대다수의 책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요 개념들입니다. 그리고, 이 다음 부분에서는이 장의 도입부에서 사용된 예화가 과연 이러한 기준 법칙들을 올바로 적용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을 주의깊게 살피라

명백해 보이지만, 이 원칙은 자주 간과됩니다. 우리는 본문이 실질적으로 뭐라고 말하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본문이 실재로 무엇을 말하는가 보다, 그들이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하는 바에 기초해서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은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당신이 특정 구절을 읽을 때, 문장을 이루고 있는 다른 형태의 단어들을 주의 깊게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주어가 단수입니까, 복수입니까? 동사형이 과거입니까, 현재입니까, 미래입니까? 문장이 명령입니까, 사실을 기술한 것입니까, 아니면 질문입니까? 문장이 대화의 한 부분입니까? 그렇다면, 말하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는 왜 이러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까? 어떤 반복되는, 따라서 강조된다고 여겨지는 단어를 찾을 수 있습니까? 어떠한 생각들이 비교되거나 대조되었습니까? 문장의 인과 관계, 혹은 질문과 답변을 밝힐 수 있습니까? 문장의 어조는 어떻습니까? 감정적인 언어가 사용되었습니까?

문장의 주의깊은 관찰의 실패는 성경에 관한 수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켜 왔습니다. 예를 들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아담과 이브가 하루의 서늘한 때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는 것이 가능하긴 하지만, 성경은 결코 그렇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이 범죄한 후, 아담과 이브는 “하루의 서늘한 때, 하나님이 동산에서 걸으시는 소리를 들었고”, 그들은 그를 피해 숨었다(창세기 3:8)고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본문의 자세한 관찰은 또다른 일반적인 실수를 범하는 것을 막아 줍니다. 단지 성경에 어떤 문장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경건한 문장이라는 것을 확증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욥기의 많은 부분은, 욥과 네 친구들의 계속되는 대화로 구성되어 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려 깊지 않게도, 욥기의 특정한 구절들을 인용해서 그들의 생각을 지지하는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엘리바스에게 그와 그의 친구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들이 옳지 않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욥기 42:7). 이러한 것은 우리의 다음 원칙과 결부됩니다.

문맥이 열쇠이다

아마도 단어, 구절 혹은 문장의 문맥을 이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생각만큼,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해석의 법칙도 없을 것입니다. 문맥이란, “어떠한 단어, 혹은 문장을 둘러싸고 있는 담론의 부분들로, 그 단어 및 문장의 이미를 조명해 줄 수 있는것” 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아마도, 누군가가 문맥에 맞지 않게 특정한 구절을 사용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비평가들은, 성경을 공격할 때, 자주 구절을 문맥에서 빼 내어서 왜곡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문맥을 제시하지 않을 경우, 성경이 아무거나 이야기 하도록 조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비평가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성경이 ‘하나님은 없다’고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나서 그는 성경의 이러한 주장이, 하나님은 존재한다고 하는 성경의 다른 부분과 모순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공격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우리는 이 경우에 그들이 인용한 구절의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이경우에는 시편 14:1 그리고 시편 53:1을 들 수 있겠는데요, 그 구절들은,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은 이러한 말을 어리석은 사람의 속성으로 봅니다. 따라서성경은 이 구절에서, 비평가들의 주장대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혹은 존재하시지 않는다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set”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본다면, 여러분은 제가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 단어는 메리암-웹스터 대학 사전의 11번째 판에서 70 여개의 다른 의미로 정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단어는 동사로도, 명사로도, 그리고 형용사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이제 제가  다음 문장에서 사용된 “set “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어본다면, 당신은 쉽게 그것을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His mind was set on solving the problem.” 이 문장에서, 그 단어는 “의도하다” 혹은 “결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맥 없이, 당신은 이것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혹은 어떤 다른 기록된 의사소통 방식에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문맥은 단어, 구절, 문장의 의미를 명확하게 해 줍니다. 성경에 있어서, 당신이 연구하고 있는 특정 구절의 문맥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그 구절이 발견되는 책과 그 책의 문맥과, 그 책이 성경 전체의 문맥 안에 어떻게 맞아 들어가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또한 그 구절이 역사의 흐름 속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 문장이 범죄 이전인지, 홍수 이전인지, 모세법 이전인지,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인지, 예수님의 초기 사역 기간인지, 부활 이후인지, 혹은 오순절 이후인지 주목하는 것, 필자의 의도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점은 우리가 말씀을 적용할 때 특별히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단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에 양을 희생하라고 명령하셨다고 해서, 우리가 오늘날 같은일을 해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고린도전서 5:7) 그리고 유월절 희생의 궁극적인 성취가 되셨습니다. 성경은 점진적으로 계시되었으므로, 나중의 계시가 이전의 계시를 대체하는 경우들이 존재합니다.

란 로드스는 이러한 진리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성경의 어떠한 구절도, 그 구절을 둘러싼 다른 구절과 떨어질 수 없다. 문맥으로부터 동떨어져 한 구절만 해석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램브란트의 그림을 그 그림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보며 분석하려고 하는 것이나, 헨델의 메시아를 아주 짧은 부분만 듣고 분석하려 하는 것과 같다”.

성경의 명확성

성경의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것을 기대하셨음이 분명합니다. 동일하게, 그가 그의 메세지를, 우리가 진심으로 진리를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정말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달하셨을 것이라는 것은 이치에 합당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고린도후서 4:2)

잠언 8:9는 하나님의 말씀은”총명 있는 자가 밝히 아는 바요 지식 얻은 자가 정직하게 여기는 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원칙이 개혁주의와 로마 카톨릭의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의 명료함, (특별히 복음의 중심 메세지와 관련된)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권리를 가진다고 믿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교리는, 성경은 단지 교도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만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길고, 하나님의 말씀의 우수성을 극찬하는, 시편 119편의 말씀을 고려해 보십시오. “주님의 말씀은 내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편 119:130).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발의 등이요 우리의 길에 빛이어야 합니다. 만약 말씀이 명확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러한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성경의 명확성이라는 원칙은 모든 구절이 쉽게 이해된다거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연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원칙은 하나님의 말씀의 전반은 조심스럽게, 그리고 기도하며 연구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 원칙은 또한 우리는 숨겨진 의미를 찾거나 가정해야하는 것이 아닌, 가장 명백한 의미를 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즐겨 사용하시던 말씀 중 두개가, “기록되었으되”와 “너는 읽지 아니하였느냐?” 였습니다. 그리고서 예수님은 구약의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성경 말씀이 일반적으로 명확하다는 것을 가리키셨습니다.

말씀으로 말씀을 비교하라.

해석학의 또다른 중요한 원칙은, 우리는 성경 말슴을 해석하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에게 “믿음의 유추” 혹은 “말씀의 유추”로 알려진 이 원칙은, 성경 그 자체의 가르침에 기반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은 거짓을 말씀하시거나, 그 자신과 모순될 수 없으시므로(민수기 23:19, 히브리서 6:18), 하나의 구절은 또다른 구절과 결코 모순될 수 없습니다. 이 원칙은 몇가지 이유로 유용합니다.

첫째, 모든 성경 구절이 똑같이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명확한 구절이 아주 명확하지 않은 구절을 조명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작가가 더 구체적인 것을 제공해 주었으면 좋았을 듯한, 모호한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9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장의 중간에, 예수님의 부활과 미래에 신자들의 부활에 관하여, 바울은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라고 질문합니다. 바울이 죽은 자들을 위한 세례에 관하여 말할 때, 무엇을 의미했는지에 대하여, 몇가지 생각들이 제안되어져 왔습니다. 그러나이 구절은 성경 전체에서 이러한 개념에 대하여 언급된 곳이므로, 우리는 그 의미에 관하여 확고한 결론을 내릴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다른 성경말씀과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그 말씀이 가르치지 않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확고한 결론을 내릴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죽은 사람을 위하여 세례를 베풀라고 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바울과 다른 성경 저자들은 명백하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을 통하여 얻어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에베소서 2:8-9). 우리는, 죽은 사람에 대한 세례를 행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이룩하기 원하는 것, 즉 이미 죽은 불신자들의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말씀합니다.

둘째, 성경말씀을 성경말씀과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올바른 길에 머물게 해 줄, 견제와 균형의 체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우리는 성경 구절을 올바르지 않게 해석할 때가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같은 주제를 조명해주는 다른 구절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원래 해석을 바꾸려 하지 않고, 모순되는 믿음에 매달리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의 구절 혹은 두 구절 모두 잘못 해석했을 경우, 사실은 성경 말씀이 모순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성경말씀에 접근하고, 우리가 모순되는 듯한 것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우리의 해석에 잘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원칙이 견제와 균형의 체계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것은 어떠한 해석에 관하여 확실성을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떠한 구절을 해석하고, 그 주제에 관련된 모든 다른 구절이 같은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듯 보인다면, 우리는 우리의 해석이 정확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문장의 분류

성경을 해석할 때, 우리는 우리가 연구하는 본문의 문학 장르를 이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여러 종류의 문학 작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장르는 그 특수한 스타일에 걸맞는 원칙에 따라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다음의 차트는 성경의 각각의 책들의 기본적인 문학 장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책들은 하나 이상의 문학 장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는 역사서로서 쓰여졌지만, 15장은 시문 형태로 쓰여진 노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책들은 더 세부적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지금 우리의 목적상 “역사서”는 모세5경, 역사책들, 4복음서 등을 보함하겠습니다. “시”는 시편과 지혜문학들을, “예언서”는 모든 선지자들이 쓴 책들, 그리고 “서신서”는 사도적 권위를 가진 사람에 의해서 한 개인 혹은 교회에게 쓰여진 편지입니다.

이러한 구분,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기억해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각의 분류는 언어를 특정한 방법으로 사용합니다. 역사서는 주로 과거의 사건에 대한 기술이고, 따라서 직관적인 방법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역사서가 절대로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가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창세기 4:10-11). 이 구절에 두개의 명백한 상징적 언어의 예가 나옵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그리고 아벨의 “핏소리가 호소하느니라”가 그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언어적 형태는 역사적인 기록에서 완벽하게 타당하며,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가서와 선지서 그리고 신약의 서신서들 모두 그들의 특정한 뉘앙스와 올바른 해석을 위한 지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두 다루기에는 공간이 부족하므로, 단지 책(혹은 문장)의 장르를 인식하고, 그에 따라 해석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역사적 관점

마지막으로, 우리의 앞선 선조들이 우리가 궁금해하는 문장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우리의 교리는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만 근거해야지, 전통이나 어떤 훌륭한 리더가 믿었던 것에 근거해서는 안되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버낸 사람들의 작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만 합니다. 거의 모든 교리는 이미 토의, 토론되었고, 교회역사를 거쳐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자원을 이용해야 합니다.

한 본문을 연구한 후, 어떤 결론을 내렸을 때, 역사상 그 어느 누구도 같은 방식으로 그 본문을 해석한 적이 없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당신이 반드시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은 분명히 재검증을 통해, 혹시 당신이 간과한 점이 없는지를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당신은, 몇백만명의 성경 해설자가 한번도 발견하지 못한 학설을 제시하기 전에, 매우 조심스러워야 하며, 확실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성경 학자들과 목사님들은, 다른 영적인 선조들의 가르침을 연구할 수 있게 해 주는 자료들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이러한 정보들은 일반 기독교인들도 얻을 수 있습니다. 목사님으로부터 주석을 빌리시거나, 시장에 나와 있는 성경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것을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해석학 원칙들의 적용

도입부에서 다룬 뎀스키교수의 글이, 창세기 2장에서 묘사된 아담과 이브의 창조 묘사와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 고려해 봅시다. 그가 본문을 주의깊게 살폈고, 문맥을 검사했으며, 성경의 명확성을 가정했고, 올바로 본문을 분류했으며, 그의 결론을 그의 선조들의 결론과 비교했나요?

여기 초반에 다룬 그의 글이 있습니다:

“인간이 에덴 동산 밖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시기 전까지 경험했던 죄악들은, 다른 동물들이 경험했던 것, 자연적 죄악과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되었습니다. 고통은 실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의도적인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써 경험된 것은 아닌 것입니다. 더우기, 하나님이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신 후에는, 우리는 첫번째 인간들은 그들의 과거의 동물로서의 삶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는 경험을 했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생기가 불어넣어진 후에, 더 높은 차원에서 자각하며, 그들은 그들이 과거에 행했던 낮은 동물적 자각을 초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 그들은 다시 그들의 낮은 동물적 자각을 의지하려는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말을 하기 직전, 뎀스키 박사는, 이 세상은 죽음과 고통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가 살도록 허용된 완벽한 오아시스(에덴동산)을 창조하셨다고 제안했습니다. 이 언급이 성경과 일맥상통 한가요? 그는 본문을 주의깊게 관찰했습니까?

아담의 창조를 묘사하고 있는 구절인, 창세기 2:7에서, 우리는 즉각적으로 문제에 부딪칩니다. 거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음 구절인, 창세기 2:8은,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신 후, 그가 에덴 동산을 지으셔서 아담을 그것에 넣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아담이 동산 밖에서 지어졌고, 그 이후에 동산 안으로 옮겨졌다는 면에서, 뎀스케 박사는  옳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는 반대로, 아담은 동산 밖에서부터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직접적인 문맥은 아담이 땅의 먼지로부터 만들어졌음을 드러내고 있고, 그는 원숭이같은 조상으로부터 진화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문제들도 있습니다. 창세기 2:21-22에 따르면, 첫 여인(이브)은 아담이 동산에 있을 때,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은 후, 아담의 갈비뼈로부터 만들어 졌습니다. 그녀는 에덴 동산 밖으로부터 온 동물도 아니었고, 그녀가 동산에 들어간 순간, 기억상실을 경험하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뎀스키의 해석은 창세기 2장 본문의 구체적인 부분에 대하여 주목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문맥상, 창세기 1:31 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아주 좋았다”고 가리킵니다. 이 구절은 세계가 이미 고통과 “자연악”으로 가득차 있었다는 뎀스키 박사의 견해와 첨예하게 대립합니다.

뎀스키 박사의 해석은 또한, 성경의 명확성이라는 법칙에도 위배됩니다. 단순히 본문을 읽어내려 갈 때, 아담은 땅의 먼지로부터 만들어 졌고, 에덴 동산으로 옮겨 졌으며, 동물의 이름을 지을 것을 명령 받았고,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로부터 첫 여인을 만드실 동안 깊은 잠에 빠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으로 성경말씀을 비교할 때, 우리는 왜 뎀스키 박사의 해석이 실패했는가에 대한 다른 이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아담의 범죄 이전에 죽음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창세기 3:18-19에서,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와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인해,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저주받은 땅은, 아담과 이브가 쫒겨난 에덴동산 밖의 땅이었습니다), 아담의 일이 더욱더 힘들어 지며, 아담은 결국 죽을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그러나, 뎀스키 박사는 명백하게 유신진화적 관점(하나님이 진화의 과정을 사용하셔서 인간을 창조하셨다)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는 가시와 죽음이 아담 이전, 몇백만년이라는 세월 동안 존재했다는 생각을 장려합니다. 그는, 아담의 죄악이 과거로 소급되어, 모든 창조물에 적용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하려고 합니다. 물론 성경의 그 어느 곳에도 이러한 것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모든 말씀을 통해, 성경은 죄악 이전에 죽음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인간에 의해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뎀스키 박사는, 문장의 분류에 따른 창세기의 문학적 스타일을 무시했습니다. 다음 부분에서 보여질 것처럼, 창세기는 역사적 묘사로써 기록되었고, 그대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 1장-11장의 사건들의 역사성을 믿는다고 이야기 하면서도, 그들은 이 문장들을 역사가 아닌 그 다른 것을 재분류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그 부분을 시 혹은 신화로써 봅니다. 우리는 단순히, 창세기가 역사적으로 정확하다는 것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 부분이 역사적인 서술로서 기록되었으며 그렇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뎀스키 박사에 의해 제안된 이상한 생각은, 그가 성경의 처음 장들을, 역사적인 서술로서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장들의 뎀스키 박사의 해석은 상당히 독특합니다. 그의 견해는 교회사를 통해 표준, 혹은 많이 받아들여진 견해는 아닙니다. 저는 단지 비슷한 주장을 하는 다른 한명만을 알 뿐입니다. 교회의 역사적인 견해를 고려하라는 원칙 자체가 그의 주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뎀스키 박사의 견해를 받아들이기 전에 그의 주장을 주의깊게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우리는 뎀스키 박사가 왜 이러한 새로운 견해를 갖게 되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이질문에 대하여 그는 대답하며 기록하기를, “창조의 순서와 자연사를 조화시키는, 젊은 지구라는 결론은 신학적으로, 해석상으로 올바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재로, 개혁주의 까지와 그 동안의, 거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젊은 지구론에 동의했습니다. 저자신도 이러한 주장을 금새 받아들이겠지만, 자연은 젊은 지구론을 반박하는 강력한 증거를 제시하는 듯 합니다.”

위의 언급은 그의 동기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젊은 지구론자들의 견해는 성경의 본문에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지만, 그는 과학자들이 지구와 우주가 몇십억년이나 되었다는 것을 밝혔다고 믿기 때문에, 그는 젊은 지구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는 이 영역에 있어서 성경의 권위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는 인간의 항상 변화하는 견해를, 모든 것을 아시고, 거짓말을 못하시며, 우리에게 어떻게 그리고 언제 창조하셨는지를 드러내신 하나님의 단순한 말씀을 무효화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은 것입니다. 그의 해석에 의하면, 뎀스키 박사는, 성경 자체가, 그 자신이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허용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 그 자신이 성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결정하고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몇몇 다른 문제들도 인용될 수 있지만, 이러한 것들이, 뎀스키 박사가 인간의 창조에 관한 구절을 정확하게 해석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는 충분합니다. 창세기의 앞 장들은 역사적 묘사로써 기록되었습니다. 왜 그런지는, 당신이 주로 맏아들여진 해석의 원칙들을 따를때,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800년대 초반, 오래된 지구론의 맹공격이 시작될때까지, 기독교인들은 거의 대부분, 하나님이 약 6000년 전, 6일 동안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믿었습니다.

창세기 1 -11장을 해석하기

사람의 과거에 관한 변하기 쉬운 생각들이 성경의 단순한 말씀을 무효화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은 창세기 1장-11장을, 역사적 기술이 아닌, 신화적, 상징적, 풍자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아담의 범죄 이전의, 몇백만, 몇억년동안의 죽음, 고통, 질병 그리고 피흘림을 믿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견해를 허용할 수 있도록, 성경의 첫장들을 재해석할 방법들을 찾습니다. 결과적으로 창조기사, 타락, 홍수, 그리고 바벨탑사건들은 자주 재해석되거나, 무시됩니다.

우리는 성경의 저자가 의도했던 의미(Author’s Intended Meaning(AIM))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본문들이, 신화적으로, 상징적으로, 풍자적으로 해석되기를 의도하셨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구의 시작과 초기 역사 때 그가 무엇을 하셨는지 정확하게(물론 우리가 원하는 모든 구체적인 것들은 아닐지라도) 알려주시려고 하셨을까요? 성경은 이러한 구절들이 진정으로 역사적인 기술이었다는, 충분한 지지를 제공합니다.

첫째, 많은 주석가들이 창세기를 두 부분 (1-11 과 12-50)으로 나누지만, 이러한 구분은 실재 본문에서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어떤사람들은 첫 11장은 원시적 역사이므로, 뒷부분 39장들과는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이러한 접근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은 그 이전의 족보적 배경없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우기, 11장이 셈의 계보(아브라함을 우리에게 소개하는)를 포함하므로, 이것은 창세기 10장의 계보와 연결되며 이것은 창세기 5장과 묶여 있습니다.

둘째, 토드 비알은,  11장과 12장 사이에, 그 누구도 임의로 그 지점을 나눌수 없다는, 또다른 연결을 설명합니다. 그는, “창세기 12장은 waw 진행형 동사인 wayomer(‘and he said’)로 시작되며, 이것은 뒷 부분이, 설명에 있어서 커다란 구분이 아닌,  11장의 연속이라는 것을 가리킨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11장은 아브라함을 언급함으로 끝나며, 12장은 아브라함으로 시작됩니다.

셋째, 창세기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히브리 구절인 eleh toledoth (“이것은 누구누구의 족보를 기록한 책이다…” 혹은 “이것은 누구누구의 역사이다…”)을 토대로 구성되어 있는 듯 보입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를 통해 11번 반복됩니다. 창세기 1-11에 6번 반복되고, 12-50에 5번 반복됩니다. 명확하게, 저자는 두 부분이 같은 방식으로, 즉 역사적인 기록으로서 해석되도록 의도했습니다.

넷째, 신약은 창세기 1장-11장을 역사적 기록으로서 취급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신약의 25 구절들이 창세기의 앞 장들을 직접 언급하며, 항상 그들을 실재 역사로 다룹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이혼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실 때, 예수님이 인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4-6, 마가복음 10:6-9). 바울은 로마서 5:12-19, 고린도전서 15:20-22, 45-47, 고린도후서 11:3, 디모데전서 2:12-14에서 창세기 2장-3장을 인용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1:51에서, 창세기 4장에 기록된 아벨의 죽음을 언급하셨습니다. 홍수(창세기 6-9)는 예수님(마태복음 24:37-39) 과 베드로(베드로후서 2:4-9, 3:6)에 의해서 역사적 사실로 확증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7:26-29에, 예수님은 롯과 소돔(창세기19)에 대한 기록을 언급하실 때와 같은 맥락으로 홍수를 언급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에 대한 누가의 족보에서, 그는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에서 발견되는 20 이름들을 포함했습니다 (누가복음 3:34-38).

결론

이러한 것들이 창세기 1-11이 문자적 역사로 이해되어야 하는 몇가지 이유들입니다. 예수님과 신약의 저자들도 동일하게 보았고, 창세기의 내부적 균일성도, 그것의 역사적 성질을 보여줍니다. 결과적으로, 창세기 1-11을 예수님과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려면, 당신은 본문을 역사적 사실로써 다루어야 하고, 해석의 기본 법칙들을 준수해야 합니다. 당신이 이것을 따를  때, 하나님께서, 약 6000년전,  6일동안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명확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