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실패할 염려 없이변증할 있을까?

베드로 사도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변호할 준비가 되어 있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15). 사실 복음 전도에 있어서, 믿음을 변호하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많은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과학적 증거는 성경의 주장을 반박한다고 주장해 왔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이러한 말씀의 명령이 어렵고, 두려운 것이라고 여깁니다. 우리가 과학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에게 대답하겠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학문적 엘리트들의 거창한 수사법에 답변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느끼는 것이 이해할 만 합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나이나 교육수준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에게 믿음을 변호할 기본적인 방법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당신은 과학이나 신학에 고등 학위를 갖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몇몇 성경적 원리만 이해하면 됩니다.

최종적 이슈 서로 경쟁하는 세계관

우리가 기독교 믿음을 변호할 때, 우리는, 뉘앙스라던가 과학적 논쟁과 같은, 부차적인 주제쪽의  곁길로 새려는 유혹을 피해야만 합니다. 논쟁은 궁극적으로 경쟁하는 세계관의 이슈라고 하는 문제의 본질로 주의를 빨리 환기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관찰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갖추게 해 주는 세계관(생명과 우주에 대하여 생각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세계관들이 동등한 것은 아닙니다. 비기독교적 세계관은 항상 내부적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들 세계관의 기초에서 성경을 배격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일관적이지 않고, 임의적이며, 궁극적으로 비이성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연습을 통해, 누구나 이러한 결점들을 판별해 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정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경배적 순종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가르칩니다(잠언 1:7). 따라서 일관성 있게 이성적인 세계관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사물을 평가하는 기반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해야합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아시고, 따라서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무엇이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지 말씀하실 수 있는 위치에 계십니다. 오직 성경만이 지식을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의 논리적인 기반을 제공합니다.

지식이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

인류가 어떤 주제에 관한 진정한 지식을 갖기 시작하기 위해서, 우리가 의식적으로 인지하건 않건 간에, 몇몇 것들은 사실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생각은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주는 이해 가능하고, 규칙적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우리 주변에 있는 세상에 관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이러한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생각을 만드셨기에, 우리는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만드셨고, 그것을 일관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유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감각을, 우리가 우리 주변의 세상을 정확하게 탐구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당연시 여깁니다. 그들은 어떻게 인류가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맹목적으로 우리의 감각이 신뢰할 수 있고, 우리의 생각이 이성적이며, 우주가 논리 정연하고, 이해가능하다는 것을 가정합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왜 지식이라는 것 자체가 가능할까?” 라고 묻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보기와는 달리 명확하지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 없이, 우리는 우주가 이해가능하다는 사실을 기대할 아무런 이유를 가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구체적인 과학적 논쟁이 필요한 때가 있긴 하지만, 과학 그 자체가 기독교 세계관을 전제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끈기있게 불신자들에게, 그들은 만약 그들의 진화론적 세계관이 옳다면, 과학활동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어야 합니다.

만약 진화가 사실이라면, 우리의 생각이 이성적인 분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만약 이 우주가 단지 대 폭발의 결과물이라면, 우리는 왜 이 우주가 질서 정연하고, 이해 가능하다는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만약 우주가 움직이고 있는 물질들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수학과 논리학 같은, 이성적인 사고가 필요한, 관념적인 법칙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 어떤 기독교의 대안이 사실이라면, 지식에 필요한 그 어떤 것의 기반도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기독교인들이 그 어떤것도 알수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백하게 그들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단지 그들이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들은 한쪽으로는 성경을 부정하면서도, 암암리에(인지하지 못한채로) 성경적 원리에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계관과 기독교에 대한 그 어떤 논쟁을 하는 중에도 늘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입니다. 결국, 우리는 기독교가 진리인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언가에 알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기초적인 이슈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개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방어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워야 하는 개념입니다.

대답하지 말고….

이 땅에 살았던 가장 현명한 사람이고,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성경을 기록했던 솔로몬 왕은 우리에게 비기독교적 세계관의 결점을 노출시키는 전략을 잠언 26장의 두 구절에서 알려줍니다. 첫째, 4절은, “어리석은 사람에게 그 어리석음에 맞춰 대답해 주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너 자신도 그와 같이 돼 버린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명확히 하기 위해, 성경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욕하고 싸우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그래서는 안됩니다 (마태복음 5:22). 오히려, 성경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잠언 1:7, 시편 14:1). 성경의 하나님을 거부함으로써, 불신자는 지식에 필요한 기초적인 진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의 위치는 비이성적이고, 히브리어 단어의 뜻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불신자가 대화중, “당신은 성경을 당신의 주장 가운데 사용할 수 없습니다”, 혹은 “기적은 합당한 설명으로써 허용될 수 없습니다.” 라고 대화의 규칙을 정하려고 할 때, 그는 이러한 사고의 비논리적 출발점을 포용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그 어리석음에 맞춰 대답해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지식의 존재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대답하라!

어리석은 자의 우스꽝스러운 철학을 거울에 비추듯 되비쳐 줌으로써, 우리는 그에게 그의 관점이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잠언 26장의 다음 절은, “어리석은 사람에게 그 어리석음에 맞춰 대답해 보아라. 아마 스스로 지혜로운 줄 알 것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표면적으로, 이 구절은 그 이전 구절과 상반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각 구절의 마지막 부분이, 그 어감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해 줍니다. 5절은 우리가 “어리석은 사람”에게 그는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그의 생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알려줌으로써,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불신자의 출발점을 포용하지 않는 대신(“don’t answer”), 우리는 그의 출발점을, 그것이 얼마나 우수꽝스러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논쟁을 위하여, 한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answer”)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만약 진화가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떠한 것이 진리인지 알기 위하여 우리의 뇌를 신뢰할 그 어떤 이유도 갖을 수 없는데, 그것은 우리의 뇌가 무작위적인 돌연변이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순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이상한 철학을 되비쳐 줌으로써, 우리는 그의 관점이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대답하지 말고, 대답하라전략의

“대답하지 말고, 대답하라” 전략은 기독교 믿음을 방어할 때, 강력한 도구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고려해 보십시오, “기독교인들은 정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단지 몇천년 전 세상을 창조했다고 가르치는데, 이는 명백히 거짓입니다.” 먼저, “대답하지 말고” 전략의 측면을 사용해서, 우리는 비평가의 출발점인 가정을 거부하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나는 창조를 가르치는 것이 정직하지 않은 것이라는 당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동일하게 진화가 비진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략의 “대답하라” 부분으로 가서, 비평가의 관점이 모순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논쟁 자체를 위해,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왜 그것이 당신의 세계관에 따르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거짓말을 하는 것이 나쁜 것이라는 생각은 성경적 개념입니다. 거짓말은, 하나님의 성질과 반대되기 때문에 나쁜 것입니다. 그러나 진화론적 우주에서는, 어떤 근거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특별히 그것이 그 사람의 생존에 이익을 줄 수 있다면 말이죠. 저는 당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잘못이다.” 라고 하는 점에서 저와 동의한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의 논점은 이러한 믿음은 성경이 진리일 때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다른 일반적인 불평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당신은 이 과학과 기술의 시대에 성경을 믿을 수 있습니까? 과학은 이미 성경이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성경의 “대답하지 말고” 전략을 사용해서 당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과학은 성경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과학은 많은 영역에서 성경을 확증했습니다.” 당신의 여기서 몇몇 예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답하라” 부분으로 가서, “그러나 논쟁 자체를 위해, 만약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과학 그 자체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끈기를 가지고, 자연의 질서와 균일성, 그리고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생각의 능력 등의 과학적 원칙들은 모두 궁극적으로 성경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설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골로새서 2:3), 우리는 재빠르게 문제의 본질로 행해 가서,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 비이성적임을 노출할 수 있습니다. 잠언 26:4-5의 “대답하지 말고, 대답하라” 전략을 사용해서, 당신은 효과적으로 비성경적 사고의 예들의 비일관성을 노출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20).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집을 반석 – 그의가르침- 위에 세워야지, 인간의 의견이라는 모래 위에 세워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24-27).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위에 섬으로써, 우리는 믿음의 강력하고, 공손한 방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노력을 축복하실 것이고, 우리의 방어를 사용해서 많은 사람들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15 –효과적인 기독교 변증가가 되기 위한 네가지 열쇠

  1. “오직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모든 지식이 예수님 안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골로새서 2:3). 그리고 우리의 방어(변증)이 부끄러움 없이, 그의 말씀에서 나타났듯, 그리스도에 기초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어떤 생각체계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성경적 계시에 근거해 있지 않다면, 그것은 태생적으로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보일 수 있습니다.
  2.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성경을 연구하고, 우리가 준비되기 위하여, 변증에 대한 일반적인 주제들에 관하여 읽어야 합니다. 이 주제들에 관해 생각하고,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믿음에 관한 우리의 방어를 계속 발전시킬, 일생에 걸친 작업입니다.
  3. “여러분이 가진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우리의 역할은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약 그 사람이 설득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믿음에 관한, 좋은 성경적 이유를 줄 수 있었다면, 의기소침해서는 안 됩니다. 회심은 성령님의 역할입니다(고린도전서 12:3).
  4. “온유와 두려움으로(with gentleness and respect).” 우리의 방어는 절대로 감정적으로 격해 지거나, 조롱하는 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현재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존중받아 마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