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은 정말로 일어났는가?

기독교 백과사전 웹사이트인 Theopedia 는 기적을 “초자연적인 사건을 통해 일반적인 자연의 작동이 중지되는 사건”이라고 정의합니다.

근본적으로, 기적은 특정 목표를 이루시기 위해 디자인된, 범상한 하나님의 능력의 발현입니다. 일관된 그리스도인은, 우주가 늘상 운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만물을 유지한다고(히브리서 1:3)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능력을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주를 유지하시는 일반적인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기적이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특별해야만 합니다.

기적은 자연법을 범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연법을 특별한 방식으로 사용하심으로 그의 능력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바람(자연 현상)을 사용해, 홍해의 물을 가르셨고,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4:21). 물리학 법칙이 명백하게 범해 지지는 않았지만, 그 누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 그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기적적이었습니다. 물론 만약 하나님이 자연의 법칙을 중지시키기 원하신다면, 그는 충분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모든 자연의 법칙은 결국 그가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특정 기적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자연의 법칙을 중지시키셨다는 가정을 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의 법칙을 다 알고 있지도 않습니다.

대부분의 기적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흥미스럽게도 부분적입니다. 유명한 기독교 저자이자 방송인인 C.S. 루이스는 이 주제에 관한 그의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기적이라는 단어를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자연에 일어나는 간섭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사용한다.” 같은 페이지에서 그는 이러한 정의를 각주에 설명했습니다.

이 정의는 많은 신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나의 정의를, 신학자들의 정의보다 우수해서가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단순하고, 인기가 있으며, 그 정의가 나로하여금, 기적에 관한 책을 읽는, 일반적인 독자가 생각하고 있는 질문들을 쉽게 다룰수 있게 해 주기 때문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루이스는 기적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그의 책을 사용했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그는 자연(nature) 밖에 있는 개념인 초자연(supernatural)을 사용했습니다.

18세기의 세속적 사상가 데이비드 흄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했습니다. 그는 기적을 “신의 특정한 자유의지에 혹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간섭에 의해, 자연의 법칙이 범해지는 것”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기적이 존재한다는 증거보다는 자연계의 법칙에 대한 증거가 훨씬더 강력하고, 따라서 그는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기적 대신 자연계의 법칙을 지지해야 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따라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흄의 정의는 기적의 표준적인 정의를 넘어서는 것입니다만,  우리가 그의 제한적인 기적에 대한 정의를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의 주장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흄과 루이스의 주장모두 순환논리(circular reasoning)를 사용한다고 비평받아 왔습니다. 순환논리란, 논쟁의 결론이 어떠한 선입관으로서 이미 가정되어 있는, 논리학적 오류입니다. 기적이라는 것이 자연의 법칙을 뛰어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라는 개념은 논리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그 주장은 단지 그 주장이 증명해야할 바로 그 사실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의 암묵적인 가정은 자연계의 법칙을 뛰어넘는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기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된 결론을 되풀이한 것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창조론자들의 주장이 성경의 무오함을 가정하기 때문에,  창조론자의 주장이 순환논리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무오함은 자연법칙이 깨지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미리 가정을 하지 않고도 주장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책의 다른 곳에 기록했듯이, 자연 법칙은 성경을 떠나서는 절대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데이비드 흄은 바로 이 주제로 인해 막혔습니다. 그는 기독교 세계관을 떠나서는, 귀납법(자연 법칙의한시적 일관성)이 존재하는 이성적인 근거를 내세울 수 없었습니다.  성경이 진리라는 우리의 가정은, 이러한 법칙이 변할 수 있느냐 아니냐에 상관 없이,  균일한 자연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해 정당화 됩니다. 따라서, 성경에 묘사된 기적들이 일어난 방식을 찾는 것과, 성경이 진리라는 우리의 가정을 사용하여, 기적들의 존재에 관해 어떤 제안을 할 수 있을지 보는 것은, 논리적으로, 지속적으로, 합리적입니다.

구약의 기적 가리키는 단어들

기적을 이야기하기 위해 세개의 히브리 단어들이 구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은 oth, mo-pheth, 그리고  pala 입니다.

  1. oth – oth 라는 말의 뜻은 징조 혹은 표시 입니다. 이 단어는 다음 구절들의 강죄된 부분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공간에 빛들이 생겨 낮과 밤을 나누고 절기들과 날짜들 및 연도들을 나타내는 표시가 되게 하라” (창세기 1:14)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 가인을 죽이는 사람은 일곱 배로 복수를 당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한 를 주셔서 누구를 만나든 그가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4:15)

위의 어느 구절도 표시를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하여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표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표시는 문자 그대로 표시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방향을 찾는데, 별들을 항상 이용해 왔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표는 가인이 살해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다른 구절들에서, 우리는 oth 가 기적을 나타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기적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 것이며 이집트 땅에서 많은 표적과 기적을 일으킬 것이다(출애굽기 7:3).

같은 단어가 영어 버전의 많은 부분에서 기적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내 영광과 내가 이집트와 광야에서 보인 표적을 보고도 내게 불순종하고 나를 열 번이나 시험한 사람들 가운데는 어느 하나도…(민수가 14:22)

기분이 베푸신 기적들과 이집트 왕 바로와 그 온 나라에 행하신 일들과 (신명기 11:3).

  1. Mo-pheth – oth 가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기 위한 기적을 표현한 것이라면, mo-pheth 는 기적은 “확신을 주기 해 하나님이 보이시는 것” 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Mo-pheth 는 자주 “놀랄만한 일(wonder)” 로 변역되고, oth 와자주 함께 쓰입니다. (e.g, “signs and wonders”).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모든 기사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으니 너는 이집트로 돌아가서 바로 앞에서 그 기적들을 다 보이도록 하여라” (출애굽기 4:21).

모세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집트 땅에서 바로에게,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그의 온 땅에서 하신 모든 것을 너희의 눈으로 보았으니, 이는 곧 너희 두 눈으로 똑똑히 본 큰 시험들과 이적들과 놀라운 기사들이다(신명기 29:2-3).

  1. Pala – 자주 쓰이지는 않은, 기적을 나타내는 단어는 pala 이며, 뭔가 대단하고 놀라운 일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기드온이,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를 떠날 때 동반되었던, 기적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질문할 때, 그는 앞의 두 단어들과는 다른 강조점을 기적에 두었습니다. 그는 기적의 목적이 아닌, 기적의 보여주는 것 자체에 촛점을 맞추었습니다.

기도온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왜 우리에게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이집트에서 구출해 내지 않으셨느냐?’ 라고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말했는데, 그분의 모든 기적은 어디에 있습니까?지금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고 미디안 사람들의 손에 우리를 넘기셨습니다” (사사기 6:13).

요약하면, 구약은 기적을 표현하기 위해 세 단어를 사용합니다 –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고, 다른 하나는 확신을 심기 위해 디자인 되었으며, 다른 것은 기적의 결과를 강조합니다.

신약의 기적 가리키는 단어들

신약의 세 그리스 단어를 논할 필요가 있습니다.

  1. Dunamis – 이 단어는 능력의 인지를 의미합니다. W.E. 바인은 “이 단어는 자연적인 방식으로 일어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기원 및 성질의 일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능력의 인지는 왜 이 단어가 영어로 들어올 때, 다이나모 혹은 다이나믹이라는 개념으로 바꼈는지를 알려줍니다.

많은 경우, 이 단어는 히브리 단어인 pala와 동등합니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 8:13, 고린도전서 12:10, 그리고 갈라디아서 3:5에 기적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시몬 자신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 빌립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시몬은 빌립이 행하는 큰 표적들과 능력을 보고 놀랐습니다 (사도행전 8:13)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 여러분이 율법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기 때문입니까? (갈라디아서 3:5)

  1. Semeion – 이 단어는 기적, 표적, 기사를 의미하며, 구약의 oth 와 같습니다. “자연의 일반적인 경로를 초월하는 특이한 사건”을 의미하는 듯 합니다.

헤롯은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예수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헤롯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고, 예수께서 어떤 기적 행하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3:8).

그들이 서로 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요?그들이 대단한 기적을 행했다는 사실을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고, 우리도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4:16).

  1. Teras – 이단어는 사실 기적으로 번역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에 포함시키는 이유는, 이 단어가 놀랄만한 일로 번역되고 신약에 있어서, 구약의 mo-pheth 와 동일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표적과 기사”라는 문구에서처럼, semeion 과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합하면, 신약에 있어서 기적을 나타내는 단어는 구약의 그것들과 비슷한 듯 보입니다. 한 단어는 하나님을 기적의 근원으로 지칭하는데 촛점을 맞추고, 다른 하나는 기적의 깜짝 놀랄만한 속성을,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는데 맞춰져 있습니다.

이러한 기적에 관한 성경의 정의로 무장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한 기적들을 통해 역사하셨는지 보기 위해서, 몇몇 기적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구약을 통해 나타난 기적적인 사건들

만약, 성경의 기적들이, 확실한 기적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이 그 근원이시며,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는 사건으로서 인지된다면, 우리는 성경의 거의 모든 책에서 기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기적을 열거하는 것은 우리의 연구의 목적에 비추어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모든 기적들 중에서 가장 기적적인 사건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라 여겨집니다. 창조주간 동안, 하나님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자연 법칙들도 하나님이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을 기적적으로 창조하실 때 만들어 졌습니다. 다른 창세기의 기적적인 사건들은, 대홍수, 바벨에서의 언어의 혼란, 소돔과 고모라의 파괴를 포함할 것입니다.

모세의 일생동안의 사건들은 특별히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국가의 태동시, 하나님은 그가 누구이신지와 그가 얼마나 놀라운 능력을 가지신 분이신지를 강조하는 듯 보입니다. 이집트에서 재양의 목적은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이집트 왕이 너희를 보내 주지 않을 것을 나는 안다. 그러므로 내가 손을 뻗어 그들 가운데 행할 모든 기적으로 이집트를 칠 것이다. 결국 이집트를 치고 나야 그가 너희를 보내 줄 것이다(출애굽기 3:19-20).

바로 앞에서 행해져야 했던 기적들은 바로를 즉각 설득하도록 특별히 고안되지 않았습니다. 실재로, 하나님은 바로가 즉각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 주지 않을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대신, 그러한 표적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나머지 부분을 통해, 우리는 많은 기적에 관하여 봅니다. 레히의 우묵한 곳에서 물이 나옴(사사기 15:19); 용의 우상이 언약궤 앞에서 두번 떨어짐 (사무엘상 5:1-12); 죽었던 과부의 아들이 살아남 (열왕기상 17:17-24); 사드락,메삭, 아벧느고가 바벨론의 용광로에서 살아남음 (다니엘 3:10-27); 그리고 큰 물고기에게 먹힌 요나 (요나 2:1-10).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엘리사의 때에, 여러 기적들이 있었으나,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신 구약의 다른 많은 시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

신약에서, 기적은 더욱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삼위의 두번째이신 예수님의존재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구셨을 뿐 아니라, 잔치의 주인에 따르면, 그 포도주는 최상급이었습니다. 포도주는 화학물질들의 복잡한 조합입니다. 좋은 포도주는 적당한 비율로 섞인 물질 안에서 느린 화학 변화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일어나야지 생성됩니다. 예수님은 기적적으로, 정상적인 숙성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그는 최초에 모든 세상의 원소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에 놀랄 일은 아닙니다.

또다른 창조적 기적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5 덩이와 물고기 2 마리로 시작해서 5,000명을 먹이신, 마태복음 14:13-21 에서도 나타납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었을 뿐 아니라, 12 바구니나 남았습니다. 왜 이렇게 많이 남았을까요? 이 기적은 예수님의 능력을 부여주며, 새로운 물질이 만들어 졌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세개의 특정한 기적들은 일반적으로 메시아적인 기적이라고 생각됩니다.

  1. 문둥병자를 고치심 (마태복음 8:2-4)
  2. 어떤 사람을 눈멀게 하고 벙어리로 만든 마귀를 쫒아내심 (마태복음 12:22-37)
  3.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치심 (요한복음 9:1-41)

문둥병으로부터 기적적으로 나음을 받는 일은 상당히 드문 일입니다. (두 번의 특별한 경우를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리암은 모세에게 대적했기 때문에 문둥병에 7일간 걸렸고, 결국 고침을 받았습니다. 나아만은 시리아인이어고, 문둥병이 치료되었습니다.) 실재로 문둥병자들은 부정한 사람으로서 대접을 받았습니다. 유대의 악령을 좆는 예식에서는, 사로잡고 있는 악령에게 그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멍청하게 하는 악귀를 쫓을 때에는 필요치 않을 수 있었습니다. 눈 멀게 된 사람이 고침을 받을 수 있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고침을 받은 경우는 특별한 경우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세가지 기적들은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이시라는 주장이 진짜임을 증명하는 듯 보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 이후의 기적들 역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그가 메시아라는 것을 확증하는 듯 보입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쳤을 때,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라고 말하고 (사도행전 3:6)

증인들

기적들은 – 하나님을 가리키고, 그의 능력을 보여주려는 –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행해졌고,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증인들 앞에서 행해졌습니다.  이러한 증인들의 반응과 기록들이 성경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이러한 기적들이 일어났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실재로, 우리가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말씀을 믿는 것을 심각하게 방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단히 많은 중요한 사건들은 하나님이 역사하신 기적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진리가 아니라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한 사람들은, 많은 수의 기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기적을 다룸에 있어서도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주, 불신자들은 기적들은 어떤 상징적인 목적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추론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러한 상징은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서는 증인들은 사실 속이는 사람들이거나 속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도덕적 교훈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이나, 거짓말장이 혹은 속고 있던 사람들과 관련된 사건으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 모세, 다니엘, 누가, 특별히 예수님과 같은  증인들의 지위를 고려할 때, 이러한 모든 증인들이 틀렸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복음의 메세지에 강하게 반대했던, 산헤드린 공회원들 조차도 베드로와 요한이 “주목할 만한 기적”을 행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사도행전 4:16).

기적과 진화론

신약의 예수님의 기적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창세기의 창조 주간의 기적을 믿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점점 더 힘듭니다. 신약의 진정한 기적들은 창조의 직접적 증거로써 제시된 것은 아니지만, 당연한 귀결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창조가,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 드러내신 그대로 일어났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 이후의 기적들을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몇몇 기적들이 어떻게 그의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지 보았습니다. 우리가 성경이 예수님을 창조주로서 묘사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요한복음 1장, 골로새서 1장, 히브리서 1장), 이것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유신진화론자는, 인간의 역사 중 어떤 시점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고 믿지만, 그 이전의 기적은 없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이 선사 시대에는, 몇백만년에 걸쳐 느리게 진화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관성 없는 사고입니다. 창세기의 하나님의 창조 역사와 동떨어진, 기적에 관한 신학은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1970년대 후반 노팅햄 대학 기독교 연합에 있을 때 들었던 강사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우리에게 애원하기를 “창세기에 관한 당신의 신학을 올바로 정립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것은 자리를 잘 잡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실임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우리가 만약 창세기의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일관성이 없게 될 것이며, 우리는 성경의 다른 부분들도 신뢰하지 않는 경향을 갖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