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부활은 실제 사건인가?

기독교에서 결정적인 이슈는 “예수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셨는가?”하는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 육신의 부활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어떤 종류의 영적인 표시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날부터, 가치를 깎아내리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부인하려고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4절에 기록된 대로, 진정한 부활은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크리스쳔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믿을 필요가 있으며, 또한 실제적 부활사건에 대한 변호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 그 자체가 주님의 육신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실재적 사건에 기반해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로마서 10:9 에따르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성경에 기록된 다른 부활사건과 구분 할 필요가있습니다. 다른 부활사건의 경우, 그 기적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예수님이나 선지자들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더우기, 부활한 사람들은 언젠가는 다시 죽었고, 따라서 그러한 기적들을 예수님의 부활(resurrection)과 구분하기 위해서 소생(resuscitation)으로 부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8에따르면, 예수님은 그자신의 권능으로 무덤에서 일어나셨고, 다시 죽지 않으실 것입니다.

부활사건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그의 사역을 인증하셨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주장하셨고 (요한복음 8:58, 10:30), 죽음에서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John 2:19). 만약 예수님이 거짓 교사셨고, 하나님이 그럼에도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셨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장이에게 신뢰성을 부여하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부활사건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메세지에 전적으로 동의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부활사건은 단지 예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할 뿐 아니라, 그가, 마지막 아담으로서 성공적으로 첫 번째 아담의 후손들의 죄의 값을 지불했다는 것을 보증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7-18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구원 간의 필수불가결한 연관성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따라서 진정한 육신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 가운데 아직 죽어있을 것입니다. 더우기 바울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육신적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살지 말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말합니다. “죽은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고린도전서 15:32)

부활과 우리의 구원과의 관계는, 바울이 우리의 죄로 인해 죽으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셨다고 우리에게 말하고있는, 로마서 4:25에 좀 더 설명되어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죄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은 충분했고, 그가 죽음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바로 그가 우리를 죽음과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할 권능이 있음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으로서 피를 흘리시기 위하여, 인간의 혈과 육을 입으셨습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그가 우리와 같은 육신적 존재로서, 우리로 하여금 죄악의 형벌로부터 구원받게 하기위해서,  문자적이고, 실재적인 사건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께서 정말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있나요? 어떻게 우리가 누군가 3일 동안 죽었다가 다시 살게 되었다는 주장을 평가할 수 있을까요? 결국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일상경험에서 부활이라는 사건이 늘 일어나는 일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과거에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다른 모든 역사적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지해야 합니다. 창조의 경우 유일한 목격자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창세기에서 그가 직접 보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부활의 경우, 하나님은 신약에 기록된 증언들을 한 많은 증인들에게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그 증인들의 증언이 기록되기 이전에 조차, 부활의 소식은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세계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에 관한 답변을 하려고(베드로전서 3:15) 하기 전에, 우리는 부활을 증언하는 기록들을 면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기록들은, 성경에 기록된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들의 증언, 그리고 1세기를 살았던 세속역사가들의 기록도 포함합니다.

역사적인 자료들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과 그의 삶 그리고 죽음에 관한 정보의 원천은 성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우리의 주장의 근거를 “종교적인 책”에 두는 것이 합당한 일 일까요? 실재적으로, 성경은 종교적인 책 그 이상입니다. 성경의 시, 우화 및 풍자, 그리고 다른 문학 장르의 형태를 포함하고 있지만, 대부분 역사책입니다. — 세계의 실재역사입니다.

비평가들은 성경이 온갖 종류의 에러와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고 주장하며, 성경을 정보의 근원으로 여기는 것에 반발합니다. 결국 이러한 혐의는, 논란이 되는 문장의 올바른 이해와 해석에 의해서 다루어 질 수 있습니다.

역사적 문헌으로서 성경의 신뢰도는 계속해서 증명되어 왔습니다. 역사가들과 고고학자들은 역사적인 사건에 관한 성경의 정확성을 계속해서 확증합니다. 더우기 성경의 고대 필사본의 갯수는 다른 고대문헌에 비해 월등히 많습니다. 따라서 만약에 우리가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필사본이 존재하는 자료들로부터 고대의 사건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가 훨씬 더 많은 문서들이 존재하는 자료를 사용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 이외에, 우리는 다른 몇몇 자료들로부터 정보를 찾을 수 있습니다. 비 기독교 저자였던, 요세푸스, 루키안, 그리고타키투스등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과 초대교인들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이들의 기록을 살핌으로써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 단지 오래된 역사책은 아닙니다. 성경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쓰여졌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러한 주장을 증명합니다. (chapter 24,25 참조) 만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어떤 다른 외부적 기준으로우리가 그 주장을 판단할 수 있나요? 그 누가 하나님이 어떤것에 대하여 틀렸다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까? 하나님은모든 지식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골로새서 2:3), 그는 그 어떤 것에도 틀릴 가능성이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이야말로 모든 다른 주장을 판단하는 기준인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성경의 기록이야말로 가장 믿을만한 기록인것입니다. 다른 기록과 증거들은 단지 성경의 기록을 확증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돌아가셨나?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알아보려면, 우리는 먼저 그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야합니다. 결국 부활은 누군가가 정말로 죽었어야지 진짜일 수 있으니까요.

예수님의 죽으신 경우에, 성경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부터 로마 병사들에게 잔혹하게 매맞고 채찍질 당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이런 종류의 구타는 매우 무시무시했고, 얻어맞고 채찍질이 동반 되었습니다. 채찍질은 그리스도의 살을 심하게 훼손하고, 찢었으며, 엄청난 양의 혈액손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에 너무도 약해져 있었음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7:32)

그는 병사들에게 끌려갔고,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고통 가운데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그가 구타와 십자가에 못 박힘에 그를 내어주시며, 자신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내려놓으셨습니다. 로마병사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너무도 확신한 나머지, 십자가 형벌에서 관습적으로 행해지던, 다리 부러뜨리는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마지막 모욕은 한 병사가 그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것입니다.

이 모든것이 행해졌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벌에서 살아남으셨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역사적인 사건은 의사들에 의해 면밀히 연구되어왔고, 항상 결론은 예수님이 정말로 이러한 과정 때문에 돌아가셨다는것 이었습니다.

더욱이 1세기 후반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결론적으로, 그 기록을 없애기 위하여, 네로는, 대중으로부터 크리스쳔이라고 불리는, 그들의 수치스러운 행동으로 인해 미움받는 집단에 대한 격렬한 처형과 유죄를 확정했다. 크리스천의 이름이 유래한, 그리스도는 디베료 지역에서, 우리의 총독 중 하나인 본디오빌라도의 손에 의해서 극형에 처해졌다.” 따라서, 몇 세기 이후의 고백은 예수님이 정말로 이러한 극형에 의해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에 반하는 믿을만한 기록이 타키투스의 기록과 동시대에 나타났어야하지만, 단 하나도 없습니다.

위에서 기록된 증거를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일종의 코마 상태에 빠지셨다가, 생명을 유지하신 채로 십자가에서 내려지셨다고 제안합니다. 이것은 “기절이론”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기절이론은 몇 가지 이유로 인해 타당 해 보이지 않습니다. 첫째, 그 누구도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일을 당했을 때 살아남기 힘듭니다. 둘째, 로마 병사들은 처형에 있어서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죄수가 죽었는지 아닌지 결정할 수 없었다고 제안하는 것은 비 이성적입니다. 결국 그들의 직업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고, 그들은 이 의무를 꾸준히 수행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끔찍한 형벌을 받고 생존한 사람은 오랫동안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기절하셨다면, 그는 무덤을 막은 돌을 옮길만한 체력을 갖고 있지 않으셨을것입니다. 더욱이, 그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의 모습은 죽음을 정복한 권능자의 모습이 아닌, 심하게 다쳐있고, 엄청난 고통 가운데 있는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의 그리스도를 보았다면, 제자들은 그들의 목숨을 빼앗아갈 정도로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수 없었을것입니다.

빈 무덤

빈 무덤은 예수님이 육적으로 부활하셨다는 주장에 있어서 결정적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에 아직 있다면, 부활은 처음부터 부정되는 것이죠. 성경의 증거는, 그 누구도 무덤이 비어있다는 것을 논박하지 않았습니다. 몇몇은 그 사실을 억압하려고 했죠.

복음서는 빈 무덤에 관한 사실을 연결시킵니다. 막달라마리아, 마리아, 살로메, 베드로 요한등의 많은 증인들이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돌이 옮겨져 있고, 예수님의 수의가 무덤 안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4복음서 모두가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사라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몇몇이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러 무덤으로 갔을때, 천사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마태복음 28:6-7) 이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실재 육신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 어떤 역사적 기록도 시신이 무덤 안에 그대로 있었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간단하게 말해, 시신이 있었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아니죠. 권력자들은 단지 예수님의 시신을 보여줌으로 인해 이 모든 논란을 잠재울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이나 그 어떤 다른 고대문헌에도 시신이 보여질 수 있었다고 제안하는 것 조차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기독교의 적들은 시신이 무덤에 있었다는 증거를 오가는 세대 동안 즐겼을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러한 증거들은 기독교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었을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무리들의 가장 좋은 논쟁은, 무덤을 지키는 병사들이 잠들었을 때, 제자들이 시신을 훔쳤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멍청한 제안인지요! 무엇보다, 십자가 사건 이후 우리는 제자들이 두려워서 몸을 숙이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들이 무덤의 로마 병사들을 제압하고, 인봉을 부서뜨리며, 돌을 굴려서, 예수님의 시신을 훔친다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더욱이, 무엇이 그들의 이러한 뻔뻔한 행동의 동기였겠습니까?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의 부활에 관해 예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메시아가 돌아가셔야 했고, 죽음에서 부활하셔야 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워서 몸을 숙이고 있었다고 묘사합니다. (누가복음 18:31-34) 따라서 그들이 이러한 책략을 생각해낼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그들의 죽은 리더의 시신을 훔치기 위해서 그들의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러한 노력으로 그들은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까? 아니죠. 그것은 무덤이 비어있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단지 시신을 훔쳤다는 주장의 가장 강력한 반박은, 제자들이 부활 이후에 용감하게 증거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떤 끔찍한 시험과 시련 가운데에서도, 단 한명의 제자들도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시신을 훔쳤다면, 그 행위를 숨기기 위해서 그들은 죽음까지도 각오할 수 있었을까요? 역사속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고백에 근거한 믿음으로 기꺼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이 그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본것 때문에 고난을 기꺼이 받았으며, 그들 대부분은 그것 때문에 죽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빈 무덤에 관한 가장 믿을만한 증거는, 빈 무덤에 관해 들었던 대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행동이었습니다. 시신을 만들어내려고 하건, 시신에 대한 수색을 시작하는 대신, 그들은 단지 병사들에게, 제자들이 시신을 훔쳤다고 소문을 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마태복음 28:12-13) 당대의 가장 훌륭한 주장이 그 자체를 반박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어떻게 군인들이 잠자고 있을 때, 시신을 훔쳐간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을까요?

제자들과 여인들의 목격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그가 여러분 나타났음을 기록합니다. 이 나타나심에 대한 묘사와 상황은, 기록된 것이 실재 육신을 가지시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하신 예수님과 만난 것이었음에 대한 의심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습니다.

첫번 째 나타나심은 요한복음 20장에 기록된 대로 막달라 마리아에게였습니다. 그는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정원사인 줄 알았다가, 곧 그가 구원자이심을 깨달았습니다. 마태복음 28에서 우리는 다른 여인들이제자들에게 빈 무덤에 대하여 알리기 위해서 떠날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그의 발 아래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예수님을 만질 수 있었고, 유령을 본 것이 아니라, 그의 육신을 본 것입니다.

여인들이 최초 목격자였다는 개념은 복음서 저자와 초대 교회가 부활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그때 당시, 유대 여인의 증언은 법정에서 채택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 때, 여인들이 최초 목격자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 같이 많은 존경을 받던 사람들이 빈 무덤을 최초에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훨씬 더 받아들이기 쉬울 것입니다. 여인들이 빈 무덤과 부활하신 주님의 최초 증인이라는 사실은 그 기록의 진정성을 확인해줍니다.

다음으로, 에수님은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마가복음 16:12-13; 누가복음 24:13-31) 두 제자들은 예수님과 이야기하며 함께 걸었습니다. 저녁때 그들은 먹기 위해 자리를 펴고 앉았고, 그들이 빵을 뗄 때에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누가복음 24:31).

그리고 주님은 유대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숨어있던 10 명의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한복음 20:20).

도마는 그 장소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에 대하여 들은 그는,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한복음 20:25) 고 말했습니다.

8일후,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도 거기 있었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 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한복음 20:27).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육체를 가지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요구를할 수 있으셨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물고기를 요리하고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갈릴리의 한 산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마태복음 28:16-17).

성경은 예수님이 한번은 5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셨고, 나중에 제임스에게 나타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고린도전서 15:6-7)

이러한 기록들이 정말로 육신의 부활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역사적인 기록으로서 그 기록들은 신뢰할 수 있는 듯 보이고, 제자들이 실재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났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제자들의 이후행동은 그들이 정말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 유일한 합리적인 결론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이들은 매우 두려워했고, 유대인들로부터 숨어있었으며, 그들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고문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갑자기 두려움 없이 설교하고 전도하게 만들었을까요? 역사는 제자들 대부분이 결국 그들의 믿음 때문에 순교했다고 기록합니다. 유일한 이해할만한 이유는 그들이 진정으로 부활하신 메시야를 만났다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거나 의심하는 사람들은 제자들의 이러한 변화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저 십자가에서 기절하셨다면, 끔찍하게 상처입은 사람과의 만남이 제자들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담대하도록 할 수 있기에충분했을까요? 만약 제자들이 시신을 훔쳤기 때문에 무덤이 비어있었다면, 제자들은 그들의 거짓말 때문에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었을까요? 적어도 그들 중 한 명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거짓말이었음을 드러냈어야하지 않을까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무엇을 주었나요? 아닙니다. 유일한 해답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셨음을 알았고, 살아나신 주님을 다시 만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떠한 이유를 위해 죽기를 각오해왔고, 따라서 제자들의 변화 그 자체는 부활의 증거가 아니라는 논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여러종류의 종교적 광신도들이 그들의 특정한 믿음 때문에 죽음을 무릅쓴다는 반론이 제기되었습니다. 물론이죠. 그러나 진정한 논점은 어떤 죽기를 각오한 사람이 자신의 믿음이 사실이라고 믿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믿음이 사실이냐 거짓이냐를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이 실재로 일어났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거짓말을 만들어 냈다면, 그들은 그들의 사기를 위해서 고통당하거나 죽기를 각오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은, 그들이 진정으로 부활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의 증언

제자들의 증언이 믿을 만하긴 하지만, 사도바울의 변화는 더 더욱 놀랍습니다. 나중에 바울로 불리게 된, 다소의 사울은 초대교회를 엄청나게 박해했고, 성도들을 감금하거나 박해했습니다. 그는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자라.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사도행전 22:3-4) 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초대교회에 단 하나의 적을 꼽으라면, 단연코 다소의 사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히브리인중의히브리인” (빌립보서 3:5) 인 바울을 역대 가장 용감한 크리스천으로 변화하게 했을까요?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의 인생은 영원히 바뀝니다. 그가 증언하듯,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사도행전 22:6-8)

여기에 초대교회에 대하여 무자비하고, 학대하며 옥에 가두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기록을 조작할 그 어떤 이유도 없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 실재로 구주를 만났다고 믿었습니다. 그 만남의 결과, 바울은 초대교회의 가장 두려운 박해자로부터, 예수님을 위하여 온갖 박해를 견뎌낸 사람으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2-29)

야고보의 증언

바울은 예수님이 야고보에게 나타나셨다고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5:7). 신약에는 야고보라는 이름을가진 꽤 많은 사람이 등장하지만, 바울은 예수님의 형제요,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을 지칭하는 듯합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여러명의 형제를 가지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마태복음 13:55).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당시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7:5).

야고보는 후에 예루살렘교회와 예루살렘 공회의 지도자가 됩니다(사도행전 12:17, 15:13). 전승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신전에서 던져졌고, 맞아서 죽음으로써 순교했습니다. 무엇이 예수님과 함께 자랐고 믿지않던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 극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을까요? 유일하고 적절한 설명은 야고보가 예수님이 돌아가셨음을 알았고, 다시 살아나신 그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요세푸스의 기록
요세푸스는 1세기 유대의 군사지도자였다가, 로마인들에게 잡힌 후 역사가가 된 인물입니다. 그의 기록은 주 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많은 목격담을 전해주었습니다. 더욱이 그의 기록은 우리에게, 초대교회의 형성기 및, 예수님에 관한 성경 이외의 기록에 관한 이해를 제공합니다.

“이제 예수라는 현인의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를 인간으로 부르는 것이 온당하다면 말이죠.  왜냐하면 그는 많은 놀라운 일들을 했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기쁨으로 그가 가르치는 진리를 받았습니다. 그는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 중의 중요한 인물인 빌라도가 그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했을 때, 예수님을 처음부터 사랑했던 무리들은 그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대로 3일만에 부활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점과, 그가  행한 만 여가지의 기적들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크리스쳔 종족들(그들의 이름은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합니다.)은 오늘날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요세푸스를“적대적 증인”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크리스쳔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육신의 부활?

비평가들은 예수님의 육적인 부활에 관한 생각을 무시하려고 애써왔습니다. 그 사건을 지지하는 역사적인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이 실재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설명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어떤이들은 부활과 관련된 성경의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꾸며낸 이야기로 이해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기록이 역사적 사실로“오해”되려고 쓰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다른이들은 부활에 관한 기록이 긴 시간에 걸쳐 꾸며졌다고 제안합니다. 제자들이 처음부터 진짜 부활이 있었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고, 초대교회에서 최초의 이야기에 조금씩 내용을 덧 붙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바울과 야고보, 그리고 제자들의 삶이 뒤바뀐 사건을 설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살아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만이 적절한 설명을 제공합니다.

어떤이들은 부활 이후의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제자들이 환상을 경험했다고 제안합니다. 다시금 , 이러한 이론은 몇 가지 이유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첫째, 환상은 개별적으로 일어나지, 열명의 사람에게 같은 환상이 같은 시간에 여러번 반복해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우기 500여명의 사람들이 그룹 환상을 체험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또한 여러사람이 빈 무덤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이 환상으로 설명될 길은 없습니다.

성경 구절에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는 구절이 있는가?

어떤 이들은 성경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육신의 부활을 부정한다고 주장합니다. 몇몇 구절이 이러한 주장을 뒷 받침되기 위해 악용되어 왔습니다. 물론 놀랍지 않게도, 자세히 연구해볼 때, 이런 구절들은 가치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의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고린도전서 15:44

성경이 육신의 부활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이론을 뒷 받침한다고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 고린도전서 15:44 입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이 본문의 논점은 다시 살아난 “신령한 몸”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이 장차 육신의 부활이 아닌 영적인 부활만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이 구절에서“신령한 몸”은 물질이 아니고, 육체가 아닌 몸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육의 몸”에 대한 개념도 단지 육체적인 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본문은, 육체적이고 죄된 욕망에 따라사는“육의 몸”과 신령하고 영적인 욕망을 따라 사는 “신령한 몸”사이의 대조적인 모습을 제공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이 구절은 가끔 부활이 단지 영적인 것이라고 주장되는데 사용되지만, 본문은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바를 이야기하고있지 않습니다.

이 구절 어디에도 육적인 부활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육적으로 돌아가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비평가들은,  이 구절이 실재 존재하지않는 내용을 끼워넣어야합니다. 더욱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육적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온전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부활 후에 그는 예수님께서 식사하시는 것을 보았던 무리들 중 있었고, 예수님께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누가복음 24:39) 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20: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어떤이들은 이 구절이 예수님께서 육체가 아닌 영적으로만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제안합니다. 그 주장은 예수님께서 문이 닫혀있음에도 방에 나타나신 것에 근거해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몸은 물질적 성질을 가지고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실재로 예수님께서 문이나 벽을 통과하셨다고 주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본문은 단지 예수님께서 문이 닫혀있던 방으로 들어가셨다고 기록합니다. 설사 방문이 잠겨 있었다 할지라도, 단지 그의 뜻으로 예수님은 잠긴 것을 풀고 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 오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의 죽음과 부활 이전의 육신을 가지고도,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셨는데, 그러한 주님께 이러한 기적은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 경우, 예수님은 제자들이 실재로 그가 부활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셨고, 실재 그들의 앞에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43). 그후, 갈릴리에서 그들을 만나셨을 때, 그들 앞에서 예수님은 다시 식사를 하셨습니다. 유령은 먹지 않습니다.

비평가들은 성경안의 정보를 부활의 증거로 이용하는 것에 반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오랜세대를 거쳐 그 진실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러한 불신적 태도는 비 이성적입니다. 비평가들의 이러한 성경에 대한 반대는, 확실한 증거나 논리적인 주장이 아니라, 임의적인 철학적 편견(arbitrary philosophical bias)에 기인합니다. 대부분의 세속적 학자들도 성경의 정확성은 인정합니다. 따라서 비평가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셨다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실재 적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비평가들은 감정적으로 부활의 주장을 좋아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학문적, 지적근거로 그 주장을반박할 수 없습니다.

왜 부활이 그토록 중요한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하사 산 소망이 있게하시며, 썩지않고 더럽지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 (베드로전서 1:3-4)

우리는 정말로 예수님의 부활이 단지 영적인것이 아닌, 육적인 것이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것이 이유없고 부질없는 논쟁일까요? 그냥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 문제를 그냥 덮어두면 안될까요? 그냥 우리가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혹은 육적으로 부활하신 것에 상관없이, 우리가 당해야할 형벌을 받으셨다는 사실만 인정하면 안될까요? 그 대답은 “아니요”입니다.

간단히 말해, 구주 예수님의 육적인 부활없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말 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고린도전서 15:17) 예수님의 육신적 부활이 없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또한 그것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9).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 안에있는 소망에관한 이유, 다시 말하면 영생의 소망에 대하여 대답할 것을 준비해야합니다. (베드로전서 3:15) 주님의, 그의 부활로써 증명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승리만이 우리가 천국의 상속자가 될 것을 보증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구세주에 대하여 증거할때에, 이 부활 교리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