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종학 교수 비판에 대한 이재만 선교사 글은 아래에 들어가시면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이재만 선교사의 우종학 교수 비판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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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대하여
“우리가 믿는 것은 ‘성경을 우상시하는 성경교’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기독교’이다. 성경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해석의 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p. 110)
이 문장은 저자인 우 박사의 성경에 대한 자세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장에서 저자가 “성경을 우상시한다”고 하는 표현은 무엇인가? 성경 안에서 ‘예수’ 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 부분은 소홀이 해도 된다는 말일까? 아니면 다음 문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 자체보다 해석이 더 중요하다는 말일까? 저자는 책 전체를 통틀어 성경에 대한 이와 같은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한다. 실제로 이는 성경을 대하는 저자의 자세 가운데 가장 심각하게 점검해보아야 할 부분이다. 과연 저자는 왜 성경을 우상 중에 하나로 취급했을까? 이는 책 전반을 읽을 때 쉽게이해된다. 왜냐하면 저자는 진화 역사를 진짜 역사로 놓고 이 진화론과 어긋나는 성경 내용은 진화론적 사고로 재해석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창조 과정에 대하여 극단적인 ‘유신론적 진화론’의 자세를 취한다. 책에서는 ‘진화론적 유신론’이란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이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인 ‘유신론적 진화론’과 다를 바 없다.

“우주진화와 생물 진화를 인정하고 진화 이론을 수용한다”(p. 248).
“예를 들어 창조주가 진화라는 방법을 사용해서 생물을 창조했다고 보는 진화 창조론을 꼽을 수 있다” (p. 43).

그리고 이에 기초한 저자 자신이 믿는 창조 과정은 책 말미에 잘 그려놓았다. “138억 년 동안 우주는 멋있게 변해 왔다. 중력은 균일했던 아기 우주를 성장시켜 거미줄처럼 엮인 거시 구조로 바꾸어 놓았고, 오색찬란한 은하들이 병합되고 자라는 과정에서 수많은 별들이 피고 졌다. 별은 내부의 행융합 반응을 통해 탄소나 산소와 같은 새로운 원소를 만들었다가 죽음을 맞이하며 우주 공간에 다양한 원소들을뿌렸다. 이 원소들은 다음 세대에 태어난 별과 행성의 원료가 되었고,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을 구성하는 탄소 원자 하나하나가 바로 이름 모를 별들의 내부에서 만들어졌다. 과학은 은하와 별과 행성의 생성과 소멸을 담은 장구한 우주 진화의 역사를 우리에게 흥미롭게 들려준다”(p. 242).

위의 글에서 저자가 설명하는 우주의 역사는 단 한번도 관찰되거나 실험으로 검증된 사실이 아닌, 저자의 진화론적 믿음일 뿐인데, 저자는 이 진화 역사와 상반되는 성경 내용을 진화론적으로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창세기 1장을 마음대로 해석(!)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저자는 “창세기가 육하원칙에 의해 쓰여질 필요가 있을까?”라고 반문하며, 창세기 1장이 전쟁을 경험했던 한 주민의 전투기록과 같은 것이지 정보장교가 육하원칙에 의해서 쓴 전투기록이 아니라고 말한다(p. 210-212). 즉 창세기 1장을 전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한 주민의 전쟁기록으로 비유한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책이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그린 책이 아니라 제한된 시야를 가진 부정확한 사람의 책으로 전락된 것이다. 사실 육하원칙이란 상황을 정확하게 기술하도록 ‘사람이’ 정한 기준이다. 그런데 우리가 만든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을 평가절하 한다면, 이는 성경을 자신의 사고 아래 가두려는 무례한 자세라고 여길 수 밖에 없다.

엄밀히 말할 때 육하원칙이 사람이 정했다고 치더라도 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 이 요소를 모두 찾아볼 수 있다. 언제(태초에), 어디서(무無에서), 누가(하나님이), 무엇을(천지, 동식물, 별들, 인간을), 어떻게(말씀으로), 왜(사실 이 부분은 창세기  1장에선 찾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보면 사랑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거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필요한 각 요소들이 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창세기 1장의 기록을 육하원칙이 빠진 불완전한 기록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몇백억 년 전에 빅뱅에 의해 우주가 시작되었고 수십억 년 동안 진화와 멸종이 반복되었다는 진화 역사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도 비슷한 부분이다.
“과학은 ‘어떻게’라는 문제를 다루고, 신앙은 ‘왜’라는 문제를 다룬다고 말할 수 도 있다(p. 120)”.
그러나 이는 결코 맞는 말이 아니다. 만약 신앙이 왜에 대한 문제만을 다룬다고 한다면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다른 종교의 신앙이든지 사람들이 상상하는 철학에 어울리는 말이다. 성경에서 의미하는 하나님은(저자가 필요하다고 하는 육하원칙의)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무엇을, 왜 라고하는 이 모든 것을 함께 사용하신다. 이것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나 철학과의 다른 가장 독특한 부분 중에 하나다. 시공간 속에 일어난 하나님, 인간, 피조물, 사탄이 행했던 내용을 담은 역사 속에서 ‘왜’란 점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단지 개념의 하나님이 아닌 실제로 행하셨고, 행하시고, 앞으로 행하실 하나님이다. 크리스천은 이 부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 속에 갇힌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시공간 속에서 여전히 행하시는 하나님임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어떤 사건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가, 무엇을, 왜 일 어났는지 어느 역사책보다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만약 독자가 성경을 읽을 때 일부러 이 부분을 무시해버리지 않는 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래도 비슷한 내용이다.
“성경은 백과사전도 아니고 자연사를 담은 과학책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 내용은 자연이라는 책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든지 읽고 배울 수 있는 것이지” (p. 215). 그러나 성경이 백과사전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주, 생물, 인간의 창조, 타락, 전지구적인 격변적 심판 등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자연사는 분명히 담고 있다. 단지 저자가 진화론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 성경의 기록을 인정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저자는 창세기를 고대 근동 지방에서의 개념으로 쓰여졌다고 단언한다.
“창세기는 몇 천년 전에 고대 근동 지방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우리가 21세기 과학을 통해서 알고 있는 우주 대폭발이나 우주 팽창
혹은 생물 진화를 하나님이 창세기 기자에게 영상으로 보여주었다고 하더라도, 창세기 기자는 자신이 갖고 있던 지식과 우주관을 토
대로 글을 쓸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대폭발을 통해 ‘우주 팽창을 시작하시니라’ 라던가 ‘별의 내부
에서 행융합 반응을 통해 인간의 몸을 구성할 탄소를 창조하시니라’ 같은 표현이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p. 213).
그런데 우주가 폭발이나 핵융합으로 시작했고 생물이 진화되어왔다는 것은 누가 만든 단어며 작품인가? 모두 진화론적인 해석일 뿐이다. 별이나 우주 공간은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석을 한다. 그런데 저자는 자기의 해석을, 말을 하지 않는 피조물에 대한 해석을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위에 놓은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말씀하는 성경을 통해 피조물을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저자는 거꾸로 하고 있다. 말을 하고 있는 성경은 해석해야 하고, 말을 하지 않는 피조물에 대한 해석은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저자는 이와 같이 거기 계셨던 하나님을 통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있지 않았던 과학자 스스로 알도록 하셨다고 주장한다. 아래 두 문단도 저자의 동일한 자세를 보여준다.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와 같은 목적론적 질문을 제외한 모든 과학적 질문들을 궁극적으로 자연적 방식, 즉 ‘과학으로 답할 수 있다’라는 전제를 갖는다고 가정하자는 말일세… 그런데 이런 전제를 크리스천이 가지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이겠나?” (p. 195).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 이 세상의 창조주가 누구인지를 가르쳐 준다. 반면 자연은 하나님이 주신 일반계시로서 하나님이 우주를 어떻게 주관하시는지, 세상을 어떻게 다루시는지 알려준다”(p. 104).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이런 자세를 꾸짖는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깨달아 알았으면 말할지라”(욥 38:4) 과거에 대한 것은 언제나 거기 있었던 증인을 통해서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자연은 하나님이 우주와 세상을 어떻게 주관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단지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자연이 이를 담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를 스스로 알 수 없다. 이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편견에 따라 제각각 해석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어떻게 주관케 하시는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창 1:16, 18).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시 136:8).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히 1:3). 우리는 이 구절을 또 다시 해석해야 할까?

저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 하기도 한다. “과학은 오류와 미신으로부터 종교를 정화할 수 있으며, 종교는 맹목적 숭배와 잘못된 절대성으로부터 과학을 정화시킬 수 있다. 과학과 종교는 각각 서로가 더 번영할 수 있는 더 넓은 세계로 서로를 끌어당길 수 있다.”(p. 106) 요한 바오로 2세는 1997년 진화론을 인정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생각과 유사한 것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저자의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점은 하나님을 자연과정의 틀에 제한시키는 생각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과정을 진화과정에 맞추려는 자신의 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섬과 별과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고 계신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이러한 창조는 기적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원래 창조 세계에 부여하셨던 자연법칙을 따라 자연적인 방식을 통해 섬과 별과 생명을 비롯한 다양한 창조 세계의 구성물을 창조하고 계신다” (p. 244)”
“(하나님이 설계했다는 생각은) 어떤 면에서 신을 우리의 설계 개념 안에 끌어 내리려는 것이다” (p. 199)
그러나 성경에서 가장 큰 기적은 무엇일까? 바로 모든 것을 초월하신 분의 창조행위이다. 저자는 창조는 이런 기적을 통해서 이루지지 않으며 자연법칙에 따라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오히려 창조가 자연과정을 넘어선 설계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설계개념 안에 신을 가두어 놓는 ‘우물 안 개구리’ 간은 자세라고 비판하고 있다. 과연 진화라는 자연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는 저자의 생각과 자연을 초월한 분의 설계로 창조를 설명하려는 두 설명들 중에 어떤 것이 하나님을 더 제한시키는 것이란 말인가?

진화과정에 제한하는 아래 주장도 동일한 맥락에서 읽으면 저자의 의도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두 하나님께서 진화과정을 이용
하셨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물리법칙 자체가 신의 작품이라면 자연현상을 신이 (창조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가 되지 않겠나” (p. 70).
“행성들이 공전하는 질서 있고 아름다운 태양계는 분명 신의 설계였을 테지만, 그 설계가 실제로 구현된 것은 태양이 만들어지고 행성들이 잇따라 만들어진 긴자연적 과정을 통해서야” (p. 88).
“신이 진화의 방식을 통해 생물들이 만들어지도록 설계했다면 어떤가?” (p. 89). “우주 진화는 창조의 과정이다” (p. 243).
“과연 신의 창조 방법을 기적으로만 제한하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p. 243).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자. 정말로 저자는 성경을 그대로 믿는 자세를 ‘성경을 우상화하는 성경교’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말인가? 아래 말씀을 읽어보라.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24:17).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9).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 하신 것이라” (롬 1:2)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만약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는 것이 성경교라면 우리 크리스천은 성경교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경에 갇혀있는 성경 교인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그가 창조한 시공간 속에서 성경 그대로 행하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지금도 내 삶과 피조물에 대하여 성경 그대로 행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