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ter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하나님의영은 수면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1절에 창조된땅(地)을 2절에서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다.
개역개정성경은 1절은한자인‘지(地)’로2절은한글인‘땅’으로 번역되어 있어서 서로 다른듯 하지만, 히브리원어로는 둘다 우리가 발을 딛고있는 에레츠(erets)다. 영어성경도 모두 우리가 살고있는지구(earth)로 번역했다.
우리말 성경도 둘다 한글인‘땅’으로 번역했다.두절 모두 지구를 언급하는것은 이어지는 1장의 나머지 부분을 보면 더확실해진다.둘째날에 궁창으로 물을 나누는 장면이나, 셋째날 궁창 아래물은 바다가 되고, 이때 드러난 마른땅에 식물이 자라고, 다섯 여섯째날 동물과 사람을 창조하시는 내용이 모두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에 대한내용이다.

이땅을 ‘혼돈과 공허’로 번역한 것은 다소 해석적인면이 들어있는 듯하다.대표적인 영어성경들도 모두‘formlessandempty’(NIV),‘withoutformandvoid’(KJV), ‘formless andvoid’(NASB)와 같이 모두 ‘형태가없으며비어있다’고번역했다. 우리말 성경에서도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으며’로 번역했다. 혼돈과 공허란 단어를 사용할 경우 얼핏 무질서(chaos)한 모습으로 비추어지기 쉽지만, 실제로는 ‘형태가 없고 비어 있다’는 중립적인 묘사다. 성경전체를 통해 이문장을 볼때는 오히려 좋은 모습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창조의 장면은 첫째날 창조사역 가운데 빛을 만드시며“보시기에좋았더라”고하신일련의과정에서속에들어있기 때문이다. 전능하시며 선하신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이며, 이것이 창조때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것이다.

이어서 “흑암이깊음위에있다” 며 빛이 창조되기 전인 지구주위의 캄캄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 이때 깊음이란 단어는 깊은 바다를 의미하는데, 홍수 심판때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창7:11)에 등장하는 동일한 단어인데 주로 심해로 해석된다. 즉 지구는 처음부터 물이 존재한 상태로 창조되었다는 의미다. 이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의 ‘수면’에서 뒷받침 된다.또한 이때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앞으로 자신의 형상인 인간이 살게 될 지구를 감싸며 창조사역에 함께 참여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모습을 엿볼수있다.
진화론적 지질학자들은 지구가 처음에는 뜨거운 불덩이에서 수십억 또는 수백억년의 막연한 기간에 걸쳐 점차식으며 결국 생명이 존재할수 있는 좋은 환경으로 변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성경은 완전히 반대로 말한다. 처음부터 물과 함께 물의지구(wateryearth)를 말한다. 여기서 물이라고 하는 단어는 성경에서 언급된 첫 구체적인 물질의 이름이다. 잘아는것처럼 물은 화학식이 H2O다. 어려운 화학적 논의를 떠나서라도, 물은 가장 단순한 물질이 아니다. 수소, 산소, 핵, 전자, 소립자, 미립자등등… 물보다더 단순한 물질들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앞의 단계없이 바로 물을 만드셨다. 수소는 폭발성이 있다. 산소는 불이나도록한다.전자, 핵, 소립자, 미립자가 독립적으로 존재할수도 없지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아주 불안정하다. 그러므로 이런자연주의적인 사고로 간단한것으로 부터 물이 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믿기 어려운 논리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완전한 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만약 단순한것 부터 시작되는 것이 더 타당한것 같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이분은 그만큼 진화론적 사고에 영향을 받은사람이라고 할수 있다. 진화론자들은 세상이 단순한것부터 시작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이것이 진화의 속성이며 한계인 것이다. 복잡한것 부터 되었다면 결국창조자를 인정해야하기 때문이다.

만약 독자들이 지구는 처음에 뜨거운 불덩이로 부터 시작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이것 또한 진화론적 지질학의 영향을 받은것이다. 이에 대한 어떤지질학적증거도없다. 단지 태양이 뜨겁고, 지구 내부가 뜨겁기 때문에 지구가 처음에는 뜨거웠을 것이라는 상상에서 나온것뿐이다.

세미나후에 “저는 진화론을 믿지 않는데요…” 하며 다가와서 질문하면서도, 이미 그분안에 진화론이 들어 있는것을 자주 발견한다.많은 사람들은 진화론을 원숭이와 사람이 공통조상에서 비롯된것이나 단순한생물에서 인간까지 진화되었다는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진화론은 단지 이런 인류의 기원만을 주장하지 않는다. 진화론은 한마디로 시공간과 물질의 모든역사를 보는관점에 속속히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니까 우주가 겪었던 과거에 대하여 인간 혼자서 깨달아 알려고 하는 모든 영역이 진화론이다.
그런면에서 진화론적 사고는 1859년 찰스다윈이 ‘종의기원’을 출판하기 훨씬 이전부터 모든 나라사람들이 갖고있던 생각이었다. 바벨탑의 언어 혼돈후에 흩어지며 하나님을 잊어버린 각 나라들은 이미 진화론적 사고를 갖출수밖에 없었다. 거기 계셨던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과거에 대하여는 스스로 알려고 노력할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보이는것에서 닮은것끼리 묶고, 간단한것에서 복잡한것이 되었다는 진화론적 사고가 자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진화론을‘ 과학’이란 이름으로 과학책안에 들여 놓은것이 문제였다. 이미 우리마음에 진화론적사고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교과서의 진화론을 처음대하는 사람도 그 과학적 증거와는 별개로 진화론을 쉽게 수용해 버리게된다.
우리는 그런 존재다. 혼자 깨달아 알려고 하면 진화론적으로 사고를하게 되는… 거기에추가해서 어릴때부터 진화론적 교육을 받고 있는 세대에 살고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각사람들은 진화론의 실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진화론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창조 과학프로그램에 참석했을때 “이것까지도틀린거야? 정말 거꾸로 배워왔구나!”등의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진화론에 벗어나서 창세기를 읽어야 한다는 말이 맞는것 같지만, 실현 불가능 한말이다. 이미 우리는 스스로 진화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거꾸로다. 창세기를 읽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진화론적 사고에 젖어 있는지 알수있다.
지구가 처음부터 물로 존재했었다는 것을 읽으며, ‘아!지구가 불덩이였다는 진화론에 젖어 있었구나’라고 발견하는 것이다. 창세기1장의 칼럼을 읽으며, 창세기를 거울로 삼아, 독자 자신이 얼마나 진화론의 흙탕물에 묻었는지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물론진화론이 묻어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하기 위해서만 이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어떤 과정으로 창조 하셨고, 그 만물의 첫주가 기록된 창세기1장을 통해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그려 보길 기대한다.
앞으로 이글을 읽어나가며 창조순서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간단한 것부터 창조하신것이 아니라 필요한것 부터 창조하셨다는 것을 발견할것이다. 여기에 참으로 놀라움이 있다. 필요한 것을 바로 바로 창조하시면서 다음것을 염두에 두시는 모습, 이것이야 말로 자신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신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드러내는 것아니고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