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박해를 받는 종교이며, 서구 사회에서 크리스천을 향한 적개심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어두움은 빛을 싫어합니다. 오늘날과 과거 역사를 통해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궁극적으로 오직 두개의 기본적 세계관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빛 안에 있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의 생각과 원수의 거짓말인 깜깜한 진흙탕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생각 사이에 벌어진 전쟁인데 창세기 3장만큼이나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왔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우리가 말씀 위에 서서 믿음을 방어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불신자들의 세계관을 공격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중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선포함으로써, 사람에게서 나온 것들이 거짓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기초를 공격하는 것은 그들의 세계관의 전체 구조를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의 기초가 무너진다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생활하고, 정당화하고, 토론하고, 선택하고, 과거를 극복하고, 현재의 의미를 찾으며, 미래를 위한 계획을 하든지 간에 그들의 모든 세계관의 체계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의 기초가 무너짐과 동시에 그들의 정체성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이 자신의 생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그들이 크리스천에게 열정적인 감정을 갖고 방어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선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의 문화와 교회의 각 부분이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에 닻을 내리지 않는다면, 진리에 대하여 유동적이고, 개인적이며, 감정에 의해 정의되므로 세속적 견해가 지배적이게 됩니다. 이는 하와가 죄를 지은 후에 아담도 동일하게 행한 것과 같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이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생각해왔던 ‘존재에 대한 정의’를 흔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점점 더 감정적으로 공격하도록 해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왜 불신자가 기독교를 공격할 때 그토록 감정적이고, 자주 비논리적이며, 비이성적이 되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성경이 말씀하신 방법대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합니다. 우리는 논쟁에서 이기거나 우리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함이 아닌, 온유와 존중을 갖고 잃어버린 자의 영혼이 구원받을 소망을 갖고 진리를 타협없이 방어해야 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 3:1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딤후 2:25-26)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대화, 페이스북, 트위터 등은 사람에 대한 사랑, 하나님에 대한 사랑, 하나님의 계명에 의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성향들로 가득차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있는 용기는 존중없는 자신만만함이나 가혹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불신자들에게는 충분히 도전적입니다. 비유하자면, “당신은 누군가의 코를 자르면서(남에게 아픔을 주면서), 장미의 냄새를 맡으라고 주지 않습니다(장미 자체가 향기로운 냄새를 냅니다).”

크리스천은 방어적이지 않게 보이면서 방어를 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의 진실성에 대하여 확신을 갖고 반대할 때, 우리는 그가 아무리 열정적이더라도 겁을 먹거나, 무서워하거나, 불쾌하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과 말씀은 그들이 믿든지 아니든지 진리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갖고 진리를 나누며 그들이 믿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옳다고 변증하는 것을 넘어 이는 영원히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분의 뜻을 진정으로 따르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