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창 3:1a)

하와가 유혹 받던 상황

창세기 3장에 들어서면서 당시 상황을 그려보는 것이 첫 순서일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창조 때마다 매번 “보시기에 좋았다” 하셨고, 사람을 창조하시며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라고 하셨다. 그리고 지난번까지 다루었던 창세기 2장 역시 인간 창조를 훨씬 구체적으로 다루며 역시 흠 없이 완벽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뱀이 다가왔을 때 하와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고, 그분께서 창조하신 놀라운 피조물들을 감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이었기에 하와는 무엇이 부족한 것도 바라던 것도 없었으며 불안함이나 외로움 같은 것은 전혀 없던 기쁨으로 가득 찬 완벽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뱀이 하와에게 다가가서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흠 없던 모습은 타락 후에 살고 있는 우리가 경험한 적이 없기에 정확하게 그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뱀이 가장 간교하니라

뱀은 아담이 이름을 지은 동물 중에(창 2:19) 처음 등장하는 동물이다. 성경은 이 뱀을 “가장 간교했다” 라고 묘사했다. 이 단어는 영어로는 crafty, subtle, shrewd, cunning, prudent등으로 번역했는데 교묘하다, 교활하다, 신중하다 등의 모두 비슷한 의미이다. 개역개정의 “간교했다”라는 다소 좋지 않은 뉘앙스를 느끼게 하지만 실제로 이 단어는 중립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구약성경에는 이 단어가 사용된 곳이 몇 군데 있다. 그러나 반드시 나쁜 의미로만 사용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prudent)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잠 1:4) 여기서는 ‘슬기롭다’ 라고 번역했다. 히브리어는 아니지만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shrewd, 영리한)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뱀을 직접 창조하셨던 예수님께서 수많은 동물 가운데 뱀을 지혜로운 동물로 예를 드셨음은 주목할 만하다.

그동안 칼럼을 통해 여러 번 강조해왔듯이 인간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어떤 피조물도 악하지 않았으며 뱀도 예외 없이 선한 존재였다. 또한 “(다른 들짐승보다) 가장 간교했다(more crafty than any beast)”는 비교 최상급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뱀뿐 아니라 다른 모든 동물들도 모두 선하게 (!) 간교했음이 틀림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탄은 사람을 유혹하는 도구로 자신의 목적에 가장 적합한 뱀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하와가 뱀을 마주했을 때에 그것이 지혜롭게 보였을 것이며 의심 없이 사탄의 전략에 넘어갔다.

대부분 사탄의 그림을 보면 붉은색의 무서운 모습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사탄은 그렇게 생기지 않았으며, 그런 모습으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angel of light)로 가장하나니”(고후 11:14) 말씀과 같이 자신을 천사처럼 가장하며 보기에 참으로 지혜로운 모습으로 접근해온다. 사탄의 이런 집요한 전략은 첫 유혹의 도구인 뱀을 이용할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동일하게 진행됨을 알아야 한다.

사탄의 목적은 자신을 무섭게 보이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계시하신 성경을 신뢰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죄가 들어오기도 전인 순전한 하와를 넘어뜨릴 정도로 사탄의 작전은 주도면밀하다. 그러므로 사탄의 전략은 그 겉모습만을 통해서는 분별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만 분별하며 이길 수 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후 2:10, 11)

이와 같이 하와에게 유혹했던 존재는 뱀이 아닌 사탄이다. 뱀은 사탄의 전략을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창세기 3장에는 사탄이란 단어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이 뱀을 사탄이라고 분명히 언급한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천하를 꾀는 자라”(계 12:9)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사탄이라” (계 20:2)

위의 말씀에서 마귀(devil)는 헬라어며 사탄(Satan)은 히브리어로 같은 단어이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고후 11:3).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처음부터 범죄함이라”(요일 3:8)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과연 뱀이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의 동물들은 사람이 하는 식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한다. 특별히 완벽한 문법은 사람에게만 있는 놀라운 의사표현 능력이다. 동물들이 짓거나 꼬리를 흔들며 신호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는 있지만, 사람과 같은 성대를 통한 완벽한 문법을 구사하지는 못한다. 그런 면에서 뱀이 언어를 통해 하와를 유혹했다는 것은 지금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성경에 동물이 말을 하는 장면이 한 번 더 등장한다(민 22장). 여호와의 사자가 나귀를 탄 발람의 길을 막았을 때, 나귀가 주의 사자를 보고 엎드리자 타고 있던 발람이 지팡이로 나귀를 때렸다. 이때 나귀가 발람에게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 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 이렇게 나귀가 말할 수 있었던 상황에 대하여 성경은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여시니”(28절) 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나귀의 발성기관을 여시자 동물이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위의 나귀 예를 뱀에게 똑같이 적용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발람의 나귀는 하나님께서 행하셨다고 분명히 언급이 되어있지만, 창세기 3장의 뱀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창세기 전반부는 오늘날과 너무나도 다른 상황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대한 몇 가지 예가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래의 창세기 예시는 세상에서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른 내용들이다. 소위 오늘날 교과서에 들어있는 내용과는 너무나 큰 불일치가 있다는 점이다.

–        엿새 동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        모든 것이 처음이 좋았다.

–        첫 남자는 흙으로, 아내는 그의 갈빗대로 창조되었다.

–        아담은교육을 받지 않아도 바로 말을 할 수 있었다.

–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        사람은 원래는 죽지 않았다.

–        식물 중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없었다.

–        뱀이 배로 다니지 않았다.

–        사람들이 900살 이상 살았다.

–        전지구를 덮는 격변적 홍수가 있었다.

–        이 격변적 홍수 이전에는 추위와 더위가 없었다.

–        동물들이 사람을 피하지 않았었다.

–        언어가 하나였다.

위의 모든 창세기 상황은 오늘날 관찰되지도 않으며, 세상에서 말하는 것과 결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다. 진화적 역사로 가득 찬 현대적 상태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어려운 모습이다.

위의 내용들은 거기 계셨던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성경이 사실임을 믿을 때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다. 아울러 이들을 받아들였을 때에야 비로소 창세기뿐 아니라 나머지 성경 기록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정확히 일맥상통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세기 3장 타락 직후에 하나님께서 내리셨던 저주는 범죄 한 사람뿐 아니라 피조물에게도 가해졌다. 특별히 뱀에게 저주를 하실 때 “(뱀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창 3:14)라고 하셨다. 더욱 저주를 받았다는 표현은 뱀만이 아니라 모든 동물들도 저주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 중에 사탄의 도구로 사용 되었던 뱀은 더욱 저주를 받게 된 것이다.

과연 동물들이 저주받기 이전 상태는 어땠을까? 타락 후에 신체에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 능력도 떨어졌을 것이며, 사람과의 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실 때의 그 말씀에서 엿볼 수 있다. “땅이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창 3:17, 18). 즉 피조물의 모양이 안 좋게 변하고 사람과의 관계가 악화된 것이다.

오늘날 동물들이 사람과 같은 뛰어난 성대와 문법 언어를 상용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짓거나 꼬리를 치는 식의 신호를 통해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능력이다. 그렇다면 타락 이전의 일부 동물들은 사람과의대화가 이보다 훨씬 더 용이했던 것은아니었을까? 그 가운데 더욱 저주를 받은 뱀의 상태는지금보다 훨씬 좋았으며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까?

당시 상황으로 그대로 들어가 보자. 뱀이 말을 거는 장면에서 성경은 ‘이때에 뱀이 어떻게 말을 했냐하면…’ 식의 변명이 없다. 하와 역시 ‘어떻게 짐승이 말을 하지? 네가 정말 짐승인 것 맞니?’ 라는 당황하는 반응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와에게는 뱀이 말을 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다.타락 후 하와가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3) 라고 대답했을 때, 하나님께서 ‘뱀이 어떻게 말을 했겠냐? 그런 거짓말이 어디있냐?’ 라는 질문도 없으셨다. 성경 기록 그대로 정황을 받아들인다면 당시에 뱀이 말을 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만약 뱀이 말을 한다고 하와가 놀랄 것을 예상했었다면 사탄이 뱀을 사용했을 리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탄은 뱀이 원래 갖고 있던 언어의 능력을 알고 있었고 이를 이용해서 하와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하도록 한 것은 아닐까? 정리하자면 뱀은 당시에 말을 할 줄 알았으며, 이에 따라 사탄이 뱀을 유혹의 도구로 사용했으며,하와 역시 뱀의 질문에 전혀 놀라지 않았으며, 하나님도 하와의 변명을 지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과 동물들 간의 관계 변하는 노아홍수 심판 사건을 통해서도 발생했다. 하나님께서 방주에서 나온 노아 가족에게 말씀하셨다.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창 9:2) 즉 홍수 이전에는 모든 동물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홍수 이전에 방주에 동물들을 태울 때 노아가족이 도망가는 동물들을어렵게 사냥해서 방주에 실은 것이 아니었다. 홍수 이전에는 오늘날 상상할 수 없이 사람과 동물과의 관계가가까웠던 분위기였다. 그러나 홍수 후에 관계가 갑자기 악화된 것이다.

이런 상황을 더 소급해 올라가볼 때, 홍수 이전보다 타락 이전에는동물과 사람의 관계가 훨씬 밀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는 동물들의 일부가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했던 것은 아닌지, 더욱이 ‘가장 지혜로웠던’ 뱀은 하와에게 말을 건넬 정도로 지혜로웠던 것은 아닌지…

물론 위의 해석이 절대적이라는 주장이 아니다. 성경의 난해한 부분에 대해서는 함부로 단정적인 해석을 내리려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금 모습이 타락 이전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과성경에서 따로 변명을 하지 않는 한, 기록된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홍수 이전에 사람들이 900살 이상 살았다는 기록도 비슷한 맥락에서 예를 들 수 있다. 이들이 이렇게 오래 살았다는 것이 현대 생리학적 지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기록일지라도, 성경은 여기에 대한 어떤 변명 없이 묵묵히 써내려 간다. 그러나 우리는 이 창세기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홍수 이전에 지구의 상황이 얼마나 좋았는지를 그려볼 수 있다. 창세기 3장의 뱀에 대한 기록도 그대로 받아들이며 타락 이전, 즉 창조 당시가 지금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얼마나 좋았는지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 의심없이 그대로 적었다. 의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의 뱀의 유혹을 기록할 때에도 그는 의심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바울 사도도 하나님께 동일하게 계시를 받았기에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고후 15:21)로 창세기 3장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창세기를 읽으며 오늘날과 크게 다르기 때문에 많은 부분을 궁금증으로 남겨놓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과 다르게, 너무 좋았었기에 주님께서 모든 것을 회복하시고 새롭게 하실 천국을 그리며 더욱 가고싶어진다. 천국 소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계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