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고통
[2006년 8월 뉴스레터]

“좋아요. 큰 틀 안에서 보면 아담의 타락이 슬픔을 설명한다고 하지만, 욥과 같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예들은 설명이 가능한가요?”
고통은 죄가 연관된 큰 그림의 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각 개인들의 고통이 항상 개인의 특정한 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욥에게 고통을 허락하셨다. 욥은 그의 시대에 지상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엄청난 고통을 당하였는데 단 하루에 자녀들을 비롯해서 종들과 재산을 모두 잃었고, 그 후에는 고통스런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욥기를 읽는 사람들은 하늘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을 알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그 일을 숨기셨기 때문에 욥은 전혀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주님은 욥의 고난을 허용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 분은 욥에게 전혀 그 자세한 이유들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또한 그 분은 욥 자신이 창조자의 결정에 의문을 달지 말 것을 요구하셨다.
제자들은 어떤 한 사람이 왜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났는지를 예수님께 물었다. ‘태어날 때부터 있는 그 사람의 장애가 그 사람의 죄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그 부모들의 죄 때문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둘 다 이유가 아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그 선천성 장애를 고치실 때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비참하게 죽은 사건도 설명해 주셨다. 이런 예는 2001년 9월 11일 뉴욕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펜타곤이 테러 공격으로 무너진 비참한 사건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 13:4 말씀에 의하면 그 실로암 망대가 무너질 때 죽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런 것이 결단코 아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우리 생활 가운데 겪는 고통들이 항상 한 개인의 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다 멸망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느 것에 주의해야 한다. 꼭 알아야 할 것은 우리 모두 다 죄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는 죄인들이고 그래서 죽는다는 판결을 받았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서 수 천명이 죽었다. 그러나 이 광경을 지켜 보았던 수 억명의 사람들도 어느 날 죽을 것이다. 사실은 그들 가운데 수 천명이 매일 죽고 있다. 죄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이미 사형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고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다. 성경은 고통에 대한 질문에 활짝 열려 있다. 지난 날 하나님의 정죄로 인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고통이 야기 되었고, 아직도 그분은 절대적인 능력과 권위를 모든 사람들의 생활 속에 계속적으로 행사하시고 계신다. 가장 기억할만한 그리스도의 가르침들 중 하나에서도(눅 16:19-31) 하나님의 독생자는 이 세상이 불공평하게 보이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주셨다.
악한 부자는 화려한 삶을, 몸에 부스럼이 난 신실한 거지 나사로는 부자 집 문 밖에서 상에서 떨어진 음식들을 먹으며 살았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사로는 축복 받은 곳으로, 부자는 괴로운 곳으로 갔다. 영원한 나라가 온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모든것을 바로 잡으실 것이다. 부활의 소망이 우리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열쇠다.
사도 바울의 편지들에서 그는 그가 겪은 고통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었다는 것이 열쇠였다고 한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들의 전파도 헛되고 너희 믿음도 헛되고… 우리들은 모든 사람들보다 더 비참한 자들이다 (고전 15:14, 19).”
- 최우성 (ACT Speaker, 생리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