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 뉴스레터]

‘하나님 없이 내 스스로 살겠다’는 결정이 인류를 형벌 즉 죽음과 이것에 이르는 과정인 고통을 불러왔다. 죽음과 고통은 하나님 없이 상태를 우리가 잠시 맛보는 것이라면 과거 죄가 없었던 그 세상에서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이 죄의 대가를 죽음으로 심판하자마자 그 분은 이 세상을 유지하고 계셨던 일부의 힘을 거두어 버리셨다. 그 결과는 이 땅에 무섭고 차가운, 예외가 전혀 없는 자연법칙인 열역학 제2법칙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법칙에 의하면 모든 것은 낡아서 쓸모 없게 된다. 로마서 8:22은 모든 피조물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신음하고 있고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완전했던 모든 것들이 죄 때문에 낡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 없는 세상의 맛이란 폭력, 죽음, 고통, 질병 등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만약 그나마 하나님이 이 세상을 유지하고 있는 힘을 다 거두어 가신다면 창조물들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골로새서 1:16-17은 지금도 창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모든 것들을 함께 붙들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 분은 이제 더 이상 이 피조물들을 완전하게 붙들고 계시지는 않는다. 피조물들이 쇠락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없는 세상의 맛을 볼 수 있을 정도로만 절묘하게 붙들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우리가 원했던 것, 그 분 없는 삶을 주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100% 붙들고 계시는 세상이 어떤 곳이었을지 한 단면을 구약 성경에서 볼 수 있다. 신명기 9:5과 느헤미야 9:21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던 시절 그들의 옷과 신발이 헤어지지 않았고 그들의 발도 불어 트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 피조물들을 붙들고 계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것들이 낡지 않도록 기적으로 붙들고 계셨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발 건강까지도 지켜 주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부분을 이렇게 돌보아 주셨다면 창조 당시 완전한 세상은 어땠을까? 우리는 그저 상상만 해 볼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완전한 세상의 또 다른 일면은 다니엘 3장에 나오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강렬하게 타오르는 풀무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갔었지만 그들이 나왔을 때 그들 옷에서 불에 탄 냄새조차도 맡을 수 없었다. 우주의 창조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몸과 의복까지 불 가운데서 보존하셨기 때문에 어떤 것도 상하거나 망가지지 않았다.

이런 예들을 통해서 우리는 과거 하나님께서 세세한 부분들까지도 붙들고 계셨던 처음의 완전했던 세상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 곳에서는 어떤 것도 낡지 않았을 것이다. 물질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비정한 세상이 아니었음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는 쇠퇴해 가고 있는 우주 속에 살고 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과학자들이 인정하는 법칙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들 주위엔 죽음, 고통, 질병이 항상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신 결과 하나님께서 유지하셨던 힘을 거두어 들인 때문인데 이것은 결국 우리들이 요청한 것-하나님 없는 삶을 맛보고 싶어한 결과다. 따라서 테러리스트들의 행위 같은 참담한 사건들도 “성경적인 눈”을 통해서 보면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우리의 죄를 보게 된다. 물론 그런 개개의 악한 행위들도 테러분자들의 개인적인 죄의 결과다. 반면에 인도네시아에서 있었던 쓰나미나 지진으로 인한 고통을 어떤 개인의 죄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그것 역시 인류 전체의 죄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죄의 결과로 발생하는 비용은 얼마나 될까? 성전에서 제물로 드린 짐승의 값은 얼마나 되었을까? 의료 비용, 법률 비용, 언어와 인종 차별로 야기되는 비용, 전쟁과 갈등 등 죄로 인한 모든 비용과 이 재원을 창조적인 발전에 사용하지 못하는 상대적인 비용까지 생각하면 죄의 값을 조금은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죄의 결과는 ‘영원한 사망’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가벼운 것들이다.

고통과 죽음이 수백만 년 동안 계속 되고 있다는 관점과는 달리, 성경적인 역사관은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놓칠 수 없는 놀라운 소망을 준다. 언젠가 이 세상은 회복될 것이라는 것이다(행 3:21). 다시 한 번 폭력과 죽음이 없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사야 11:6-9은 늑대와 어린 양, 표범과 염소, 사자와 소들, 독사와 어린 아이들이 평화스럽게 함께할 것이라 했다. 이 다가올 세상은 예전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상상의 땅이 아니라 과거 잃어버렸던 낙원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 최우성 (ACT Speaker, 생리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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