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 뉴스레터]

이제까지 우리는 크기와 용적이 거대한 상자모양의 거룻배같은 노아의 방주를 살펴 보았다. 그런데 이 방주가 수 백만 종의 동물들을 다 태울만큼 충분히 컸는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대답에 앞서 생각해야할 중요한 점은 방주에 모든 동물들을 다 실을 필요도 없고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단지 공기로 호흡하고, 땅 위에 사는 동물들, 기어다니는 것들, 새들만 태웠을 뿐이다. 모든 수생 생물(물고기, 고래, 대합 등), 곤충들, 많은 양서류들은 방주 밖에서도 충분히 많은 수가 생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방주에 타야하는 동물들의 수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적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필요 공간을 훨씬 줄여줄 또 다른 요소는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엄청나게 다양한 종(species)들이 노아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이 지구에 다시 편만하게 될 이러한 종들의 모체가 되는 종류(kinds)들만 방주에 타면 됐다. 창조론자들은 방주에 탔어야 할 최소한의 동물의 수를 계산하였는데 대략 16,000-35,000마리 정도이다.

성경이 말하는 종류(kind)와 종(species)은 무엇이 다른가? 한 예로, 소형 푸들에서부터 대형인 세인트버나드까지, 현재 200종 이상의 개들이 하나의 원래 개 종류(kind)에서 유래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고양이종류, 말 종류, 소 종류 등 모든 다른 동물들이 자연적으로 혹은 인공적으로 교잡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놀랍게 다양한 종들을 낳았다.

하나님은 이렇나 다양성을 모든 동물과 사람에게까지 유전 암호에 프로그램하셨다. 하나님은 또한 근간이 되는 종류의 동물들이 다른 동물들과 교배하여 번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셨다. 예를 들면, 개와 고양이는 교배되어 새로운 종류의 생물을 만들어낼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디자인이고 진화가 불가능하게 되는 한 가지 사실이다.

이제 배에 탄 동물들을 보자. 어떤 동물은 일곱 마리 씩 방주에 탔다. 많은 화가들과 이야기 작가들은 이 사실을 간과하거나 그 이유를 잘 모르기 때문에 무시해버렸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세 부류의 동물들을 태우라고 하셨다: 깨끗한 짐승들, 부정한 짐승들, 그리고 새들. 깨끗한 짐승들은 세 쌍씩 태우고 한 마리를 더 태웠다.

이 동물들은 교배가 잘 되고 우유나 가죽, 털을 공급할 수 있는 것들이었을 것이다 (홍수 이전에 동물들이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고기를 먹고 살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창 9:3-4). 일곱 번 째 동물은 방주에서 나왔을 때 희생제물로 쓰도록 했을 것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노아는 일곱 마리의 새들을 각 종류대로 태웠다. 부정한 종류들 (아마도 기는 것들, 농장에서 쓰지 않는 다른 생물들)만이 두 마리씩 (암 수 각 한 마리) 방주에 들어갔다.

이제 방주에 동물들을 싣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어떻게 노아는 그 큰 공룡들을 태울 수 있었을까?” 아주 쉽게 떠오르는 질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공룡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파충류들은 그렇게 크지 않다. 심지어 닭 정도의 크기도 있다 (그러나 절대로 조류와의 관계는 없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공룡의 평균 크기가 조랑말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한 때, 즉 어렸을 때는 크기가 훨씬 작다.

한 예로, 하나님은 분명히 노아에게 다 자란 것이 아니라 두 마리의 어린 공룡을 데려왔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코끼리나 기린 등 굉장히 크게되는 동물들도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또한 다양한 수의 공룡들에 관해서는, 실제로 발견 된 각 종류들에 대해 수 백개의 이름들이 있지만 실제로 50 종류(kind) 이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동물들을 노아 가족이 다 몰아들일 수 있었을까?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이적이 있어야만 되기 때문에 이 이야기의 경이로운 부분이다. 성경은 노아가 동물들을 찾아다니거나 방주에 데려오기 위해서 먼 곳까지 여행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나, 울타리나, 수레가 필요 없었다. 동물들이 그냥 방주로 왔다. 마치 창조주가 내린 귀소 본능에 의한 것처럼 행진해서 스스로 방주로 올라 갔다!

이것은 우리의 이해 한계 안에서는 초자연적인 사건이었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심지어 현재에도 우리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나타난 놀랍고 신비한 동물들의 행동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캐나다 거위나 다른 철새들의 이동이나 제왕나비의 놀라운 비행, 고래나 물고기들의 연중 여행, 겨울잠 자는 본능, 지진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 등 셀 수 없이 많은 하나님이 만드신 동물계의 매혹적인 능력들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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