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 2:23-24)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하나님께서 하와를 이끌어 오셨을때 아담의 첫반응이다. 앞선 글에서 아담의 ‘갈빗대’는 살, 뼈, 피를 모두 담고 있는 옆구리(side)에 가깝다고 언급했는데, 아담이 하와를보며 이뼈와 살을 그대로 표현했다. 또한 “남자에게서 취하였다”라는 표현도 하와가 이미 자신에게서 취했음을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가오고 있는 배필에게 아담이 지어준 이름인 ‘여자’는 히브리어 ‘잇샤’(אִשָּה)인데, 남자를 뜻하는 ‘이쉬(אִיש)와 동일한 뜻의 상대적인 여성형 단어이다. 원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담은 하와가 자신의 신체에서 취해진 존재라하더라도 단지 성(性)만 다를 뿐 인격적으로는 그 본질이 같음을 알고 있었다. 이는 아담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27절)에서 남녀를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을 정확히 이해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도울 존재로 다스릴 동물에게서 택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심장하다. 이 두 인격체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평생의 반려자(伴侶者)로 창조된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동물의 신분이 올라가(= 사람의 신분이 떨어져) ‘반려동물’이라 부르는 상황까지 이른 것에 대하여 크리스천들은 성경적 시각으로 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동물은 아무리 귀하다 할지라도 잘 다스려야 할 대상이지 결코 사람의 배필이 될 수는 없다. 이런 자세는 이 사회가 진화론적 그릇된 사고에 젖어 있음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부모를 떠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전에 언급 되었다는 점에서 본문 말씀은 바른 결혼의 목적과 방향을 순수하게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어린 아기에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성년으로 바로 창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떠난다’라고 언급한 것은 흥미롭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는 자식이 되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아직 아기도 없고, 부모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이 첫 부부가 앞으로 자녀를 낳아 부모가 될 것, 또 그 태어난 자녀의 성장, 또 자녀의 결혼과 자식 양육 등 앞으로 펼쳐질 인간 성장과 역사를 예견하며, 인류를 향한 영원하고 웅장한 메시지이다.

이 메시지 안에는 가정을 세울 때까지 자녀들은 부모와 함께 있을 것이며, 배우자를 만남으로서 부모를 떠나야 한다는 기본적 의미가 담겨 있다. 부모의 측면에서 보자면 자녀가 성장하여 결혼할 때까지 바르게 교육할 의무도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얘 나이였을 때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지!”

아담과 하와는 부모가 됨으로써 자녀들에게 서로 다른 기대를 가지고 있음을 배웠다.


“부모를 떠난다”라는 표현은 결혼이란 기본적으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 물리적 결합을 말한다. 십계명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부모에 대한 공경을 중단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는 결혼 후 관계에 있어 우선순위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 우선순위는 부모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된다는 의미이다.그러므로 만약 결혼한 후에도 기존의 우선순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바른 결혼이라 할 수 없다.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부부관계의 또 하나는 ‘육체적 일체’이다. 여기서 ‘합하여’란 단어는 히브리어 ‘다박크’(דָבַ֣ק)인데 문자 그대로 ‘풀처럼 달라붙는 것’을 의미한다. 부부 간의 성적관계는 타락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부부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다. 부부는 성적으로 즐기며 그의 열매인 자녀를 갖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리를 누릴 수 있다.

창세기 1장에 남자와 여자에게 하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은 성적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첫 부부에게 향한 명령이다. 그러나 결국 곧 온 인류에게 하신 명령이 된다. 만약 타락이 없었다면 인류는 한 명도 빠짐없이 결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결혼관계의 불완전한 상황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 지상명령을 제대로 이행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므로 본문의 명령을 볼 때 독처하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도 이와 같이 언급했다.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딤전 5:14)

물론 오늘날의 상황은 창세기 1, 2장과는 다른 타락한 이후의 세상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혼자사는 자도 있음을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마 19:10)라고 묻자,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마19:11~12)하신 말씀은 타락 후 세상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한 말씀임에 틀림없다.

본문에서 남자와 여자 모두 단수인 점으로 보아 바른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간의 결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일부다처, 동성애, 간음, 성적 문란 등 성경적 결혼관계를 벗어난 제도와 행위들은 잘못된 것이며, 이런 일들은 반드시 악한 열매를 맺게 된다.이런 맥락에서 성경은 그릇된 결혼과 성적 관계에 대하여 사형과 심판과 같은 엄중한 단어를 사용하였다.

동성애: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 즉 반드시 죽일지니(레 20:13).

간음과 성적문란: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둘 다 돌로 쳐죽일 것이니…(신 22:22~24).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 13:4).

구약성경을 보면 인물들 가운데 일부다처가 등장하기도 한다. 아브라함, 야곱, 다윗 등을 보아도 그렇다. 그러나 이는 타락 이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허락(allow)하시는 것이지 일부다처를 제도로 정하셨거나기뻐하시는것이 아니다. 실제로 일부다처 가정의 어려움들은 성경 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마태복음에 바리새인들이 이혼에 대하여 예수님을 시험하는 장면이 등장한다(19:3~9).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물으셨을 때 예수님께서 창세기 2장의 본문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신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마태복음의 이부분은 예수님께서 구약을 가장 완벽하게 인용하신 구절로 꼽힌다.

이 대답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은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라고 집요하게 물어본다. 이때 예수님께서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타락 이후 결혼의 비성경적이고 복잡하게 타락한 상황을 총망라해서 답변을 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 앞에 ‘창조 때에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것과 둘이 한 몸을 이루어야’하는 원칙을 먼저 언급하셨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타락한 이 세상에서는 혼인관계가 깨어질 수 있음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대답 속에는 여러 가지가 총망라해서 들어있다. 자신이 모세보다 더 위에 계시고, 율법을 주신 실재 의도를 아는 분이며, 창세기의 타락 이전 상황과 첫 결혼의 순결함, 즉 지금은 타락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여졌지만 본래는 (from the beginning, 처음에는)는 결코 부부가 나뉘지 않았다 성경 역사 등…

이번에도 살펴본 바와 같이 창세기 본문의 어디에도 진화론적 개념이 들어갈 틈이 없다. 덜 진화된 유인원에서 진화된 흔적을 어디에도 찾을 수 없으며 불완전한 부분도 없다. 과연 결혼과 부부에 대하여 이와 같이 완벽한 시작을성경 외에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창조주를 찬양할 뿐이며, 그분께서 계시하신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이 감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