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ple on Valentines day. Woman and man holding hands.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 2:20b-22a)

하나님께서 아담의 배필(helper)인 하와를 지으시는 장면이다. 두 절 앞인 18절에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며 작정하셨던 일을 이제는 실제로 진행하시는 것이다.

아담의 배필을 지으시려는 계획과 하나님께서 진짜로 하와를 짓는 사이에 아담에게 동물의 이름 짓는 일을 맡기셨다(19-20a절). 그러니까 아담은 잠깐이나마 배필 없이 혼자서 일을 했던 기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와를 지으시고 아담 앞에 데려왔을 때 참으로 반가웠을 것이다. 배필인 하와는 당사자인 아담의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와의 창조를 통해 보시기에 심히 좋은(very good) 창조의 완성을 스스로 이루신 것이다.

깊이 잠들게 하심

아담의 배필을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담을 깊이 잠들게(deep sleep) 하셨다. 여기서 깊이 잠든 상태란 단순히 통증을 막기 위한 마취 상태의 정도가 아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갈빗대를 취할 때나 그곳을 다시 살로 채우실 때나, 또한 다시 눈을 떴을 때에도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아직 세상에 통증(pain)이 들어오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통증은 범죄 이후 하와에게 주어진 “임신하는 고통”(창 3:16) 때 처음 등장한다. 그러므로 아담이 깊이 잠든 상태는 고통을 전혀 느낄 수 없으며, 수술 후에 마취가 풀리면서 겪는 통증도 없는 완벽한 수면상태였다. 이런 통증 없는 상황은 죄가 씻긴 자들이 가게 될 궁극적인 장소인 새 예루살렘 성에서도 엿볼 수 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pain) 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4)

갈빗대 하나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이유는 아담 육체의 일부를 취하여 배필인 하와를 만들고자 함이었다. 개역성경은 “갈빗대”, 대부분의 영어 성경도 ‘rib’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갈빗대(rib)는 실제로 아담의 옆구리(side)에 더 가까운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때 사용된 히브리어 צֵּלָ֛ע(첼라, tsela)는 구약성경에 35번 등장하지만 어디에도 갈빗대로 번역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출애굽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데(15번), 모두 쪽(side)로 번역되었다. 예를 들어 성막을 설명할 때 “성막 다른 쪽 곧 그 북쪽(the north side)을 위하여도 널판 스무 개로 하고”(출 26:20) 와 같다.

옆구리는 뼈와 살, 또한 생명을 담고 있는 피도 포함할 것이다(레 17:11). 그리고 이런 상황은 하나님께서 하와를 이끌어 오셨을 때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로다”(창 2:23)라고 했던 아담의 표현 속에서도 뒷받침된다.

생화학 분야뿐 아니라 박사학위를 세 개나 갖고 있던 창조과학자 윌더 스미스(Wilder Smith, 영국, 1915-1995) 박사는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실 때, 아담이 갖고 있던 유전정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쉽게 말하자면 아담의 DNA를 복제하여 하와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서로 간에 유전적으로 한 가지 뚜렷한 차이가 있다. 바로 성염색체이다. 남성은 XY며 여성은 XX이다. 스미스 박사는 하나님께서 아담의 Y 염색체를 제거하고 그가 갖고 있던 X를 두 배로 늘려 여성의 XX 염색체를 구성하셨다고 가정했다. 이는 흥미로운 추측이라고 할 수 있다.

가끔씩 “남자와 여자의 갈비뼈 개수가 왜 똑같나요?”와 같은 질문이 들 때가 있다. 만약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 하와를 만들었다면 그의 후손인 남자의 갈비뼈가 여자의 것보다 한 개 적어야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에게서 갈빗대가 취해졌다고 할지라도 남자 후손의 갈비뼈가 한 개 적을 것이란 생각은 유전학적으로 옳지 않다. 왜냐하면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맹장 수술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의 아들은 여전히 맹장을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담의 갈빗대를 취했다고 할지라도 그 후손들의 갈빗대의 개수가 아담의 처음 창조 때와 같은 것은 유전학적으로 당연한 결과며, 성경적으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창세기 2장에서의 아담과 하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신약성경도 그대로 인용된다.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딤전 2:13)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고전 11:8)

평등한 남녀

창세기의 창조 과정을 보면 남녀가 본질적으로 평등함을 알 수 있다. 많은 설교에도 등장하듯이 여자는 남자의 발이나 머리가 아닌 허리에서 취한 것을 보아도 그렇다. 창조 과정을 보며 하나님의 이런 섬세한 배려와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22절에 ‘여자를 만드시고’는 영어로 construct, build, fashion 등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실 때 특별히 계획하시고 공을 들이시고 모양까지 염두에 두셨음을 의미한다.

남녀의 동일함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창세기 1장이 더욱 분명히 해준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이어서 하나님께서 내린 지상명령도 그들(they)이라는 복수를 사용하며 부부에게 동일하게 주신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아담은 흙을 재료로 만들어졌으며 하와는 전적으로 아담의 신체에서만 취해졌다. 하와가 첫 남자인 아담에게서 난 반면에, 모든 남자는 여자의 몸으로부터 나온다. 이는 남녀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며, 이런 서로의 밀접한 관계와 평등함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는 성경 속에 충분히 내재되어있다. 그리고 이는 성경을 그대로 볼 때에만 이해가 된다.

처음은 달랐다

첫 여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사람이 알고 있는 모든 상상력을 동원하여도 도저히 알 수 없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으며, 성경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전능하심에 감탄하게 된다. 과연 흙으로 첫 남자를 지었다는 것이나, 그 남자의 갈빗대로 첫 여자를 창조했다는 것을 어떻게 혼자 알 수 있을까? 이런 사실은 단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직접 알려 주셔야 한다. 바로 그분께서 계시하신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아직까지 남자와 여자의 기원에 대한 가설조차 내지 못한다. 남자가 먼저 등장했을까? 아니면 여자가? 그러면 진화의 긴 기간 동안 혼자 살면서 자녀를 어떻게 낳았을까? 이들이 남녀의 기원에 대하여 여전히 미궁 속에 있는 이유는 너무나 당연하다. 이들 마음에 자연법칙을 초월하신 창조자가 없으며, 그분께서 계시하신 성경이 그들 손에 있을지라도 그 내용을 참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통하여 성경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전혀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그 기록된 과정 하나하나 가운데 그 완벽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은 달랐다. 모든 자연법칙을 초월하신 분께서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 모두는 그 자연과 자연법칙이 다 이루어진 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창 2:1). 그러므로 그 초월자를 통하여 하와가 창조되는 창세기 2장의 과정을 그대로 믿음으로 남녀의 창조를 이해하며 설명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그 앞의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엿새 동안의 창조도 여과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역으로 창세기 1장의 믿음을 갖게 되면 아울러 창세기 2장의 남녀 창조 역시 그대로 믿게 된다.

남자와 여자는 진화 과정으로 발생할 수 없으며, 진화론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또한 하나님께서 진화 과정을 사용하지도 않으셨으며, 사용하실 필요도 없으시며, 성경에서 그런 과정을 찾아볼 수도 없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진화론과 성경을 함께 믿으려는 타협적인 노력을 할 필요도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