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작하며 지키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 2:15)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순서적으로 창조하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창세기 2장은 그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창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에는 아담의 창조 직전에 안개만 땅에 올라오는 모습, 하나님께서 흙으로 아담을 지으시며 생기를 넣는 장면과 에덴동산을 창설하시는 모습, 좋은 나무들 가운데 있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네 개의 강과 광물들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런 준비된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에덴동산으로 아담을 직접 이끌어 오셨다. 자신의 형상인 아담에게 손수 다듬으신 곳을 보여주시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참으로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가! 그리고 아담에게 경작하고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지킨다는 것은 총칼을 들고 밖에서 오는 적들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라’는 의미이다. 즉 가꾸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아담에게 자신이 완성한 에덴을 잘 유지하도록 맡기신 것이다.

창세기 1장에 사람을 지으시고 “땅을 정복하라”(28절)는 하나님의 명령도 마찬가지이다. 피조물을 파괴시키라는 의미가 아니라 관리의 의미인 것이다. 가끔씩 하나님의 이 명령에 대하여 불편한 반응을 보이거나 비판적인 자세를 갖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이는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일은 다른 동물에겐 결코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영광스러운 임무인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

이어서 아담에게(또한 곧 창조될 하와에게도) 중요 한 명령을 내리신다. 에덴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자유롭게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고 하신다. 이 성경 구절은 창조된 사람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잘 내포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대상이다. 이 사랑의 대상은 생명이 있는 존재여야만 한다. 엄밀히 생명이 없는 존재는 진정한 사랑의 대상일 수 없다. 사랑에는 서로 간에 오갈 수 있는 어떤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명이란 동물들이 갖고 있는 그런 움직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을 창조하실 때 넣으신 생기를 가진 생령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을 사랑할 자유도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자유도 있는 생명을 의미한다. 이런 존재여야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관계가 성립된다.

이런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시편에 잘 표현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시 37:23).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야 할 길을 정해 주셨는데, 사람이 그 길을 갈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셨기에 그 길을 갔을 뿐인데 왜 기뻐하실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유는 사람이 그 길을 가지 않을 자유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대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담은 원하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었다. 심지어 생명나무의 열매도 먹을 수 있었다. 수많은 열매 중에 오직 단 하나에게만 예외를 두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분이시다. 엄청난 자유 속에 단 하나의 예외를 두신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열매를 먹는 아담과 하와를 보며 기뻐하셨다. 과연 이 상황이 하나님께 불평할 만한 상황일까?

아울러, 순서로 보자면 유혹은 아담과 하와 안에서 먼저 나온 것이 아니다. 타락한 천사인 사탄, 즉 밖에서 먼저 시작된 것이다.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인 사탄은(요 8:44) 사람에게 접근하여 단 하나의 예외를 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택하였고, 이 두 사람은 단 하나뿐이던 그 예외를 선택해버린 것이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창 2:16-17)

이어서 아담에게(또한 곧 창조될 하와에게도) 중요 한 명령을 내리신다. 에덴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자유롭게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고 하신다. 이 성경 구절은 창조된 사람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잘 내포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대상이다. 이 사랑의 대상은 생명이 있는 존재여야만 한다. 엄밀히 생명이 없는 존재는 진정한 사랑의 대상일 수 없다. 사랑에는 서로 간에 오갈 수 있는 어떤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명이란 동물들이 갖고 있는 그런 움직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을 창조하실 때 넣으신 생기를 가진 생령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을 사랑할 자유도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자유도 있는 생명을 의미한다. 이런 존재여야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관계가 성립된다.

이런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시편에 잘 표현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시 37:23).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야 할 길을 정해 주셨는데, 사람이 그 길을 갈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셨기에 그 길을 갔을 뿐인데 왜 기뻐하실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유는 사람이 그 길을 가지 않을 자유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대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담은 원하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었다. 심지어 생명나무의 열매도 먹을 수 있었다. 수많은 열매 중에 오직 단 하나에게만 예외를 두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분이시다. 엄청난 자유 속에 단 하나의 예외를 두신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열매를 먹는 아담과 하와를 보며 기뻐하셨다. 과연 이 상황이 하나님께 불평할 만한 상황일까?

아울러, 순서로 보자면 유혹은 아담과 하와 안에서 먼저 나온 것이 아니다. 타락한 천사인 사탄, 즉 밖에서 먼저 시작된 것이다.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인 사탄은(요 8:44) 사람에게 접근하여 단 하나의 예외를 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택하였고, 이 두 사람은 단 하나뿐이던 그 예외를 선택해버린 것이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죽음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7)

하나님께서는 이 유일한 예외를 선택한 불순종의 결과에 대하여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경고하셨다. 불순종의 결과가 생명의 반대인 죽음인 것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은 기본적으로 ‘분리’를 내포하고 있다. 불순종은 거룩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과의 분리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므로 하나님과의 분리는 생명과 영원한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죽음이다.

이와 같이 죽음은 하나님과의 분리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영적인 죽음과 육체적 죽음 모두를 포함한다. 하나님의 “죽으리라”라는 이 경고는 히브리어를 문자적으로 그대로 적용하면 “죽어가면서 죽는다”를 의미이다. 이는 왜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였을 때 왜 육체적으로 바로 죽지 않았는지를 이해하게 한다. 아담은 범죄 하자마자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적으로 죽었으며, 930살까지 살았지만 결국에 육체적으로도 죽었다.

아담 이래로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다(시 51:5).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 됨으로 인해, 사람은 더이상 진정한 사랑의 관계 안에서 자식을 잉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는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자기의 모양과 형상”의 자녀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는(창 5:3) 성경 말씀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태어날 때부터 모든 사람은 이미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며, 결국 육체적으로도 죽는다. 만약 육적으로 살아있는 동안에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는 한, 결국 육체적으로도 죽으며 영과 육이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된 지옥으로 가게 된다.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로부터 심판하시기 직전까지 일어날 미래의 죄까지 담당하셨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믿은 자마다 죄에서 자유케되어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그래서 크리스천은 영적으로 살게 되었으며 앞으로 육적으로 죽을지라도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부활하 심과 같이 우리도 육신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진화론을 사실로 전제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까? 아담과 하와가 무생물에서 자연발생하여 자연선택, 생존경쟁, 멸종 등의 잔인한 역사를 겪으며 동물로부터 수십억 년에 걸쳐 진화되었다고 믿으면서, 과연 범죄 이전의 창세기 2장이 제대로 그려질까? 그리고 모든 열매를 허락하시며, 오직 예외를 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진화 역사는 성경 어디에도 들어갈 틈이 없다.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성경적으로도 결코 받아들여질수 없다.

창세기 2장도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성경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때 분명해지며, 결국 창조자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더욱 분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