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칼럼에 이어 계속해서 미국 가족계획(Planned Parenthood)의설립자인마거릿생어(Margaret Sanger, 1879-1966, 미국)를다루고자한다.

생어는 백인들에게 자유스러운 성 생활을 요구하며, 자신이 열등하다고 여기는 흑인과 호주 원주민에게는 성의 통제를 요구했다. 이것은그녀가 이끌었던 운동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진화론에 근거를 둔 우생학적 신뢰에 따라 성 선택을 적용하여 열등한 인종은 성 생활을 억제하므로 인구를 줄여야 하고, 반면에 고등한 인종은 성 생활을 자유롭게 하여 인구를 증가시켜야 한다는 사고의 발상이었다. 그러나 앞서 그녀의 삶에서 보여주듯이 그녀의 ‘자유로운 성 생활’이란 것은 엄밀히 무절제한 성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생어는 1917년 ‘출생 통제 리뷰(Birth Control Review)’를 설립했으며 여기서 다른 우생학자들과 함께 수백 회의 연설과 글을 통해 우생학 프로그램으로 산아제한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강조했다. 그로 인해 1920년대 미국에서 마치 종교와 같이 신문과 잡지에서 대중적인 우생학 열풍이 불었다. 심지어 교회에서 조차도 이들의 생각을 지지하고 홍보하였다. 그녀는 우생학 운동이 “진화의 보편적 법칙에 부합하는 작업”이라고 믿었으며, 심지어 능력이 부족한 자를 강제로 불임키는 프로그램이 각 주(state)에서 주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활동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버지니아, 캘리포니아, 캔자스 주를 필두로 미국의 절반 이상의 주에서 불임이 시작되었다.

생어는구체적으로 감옥에 있는 자들은 불임해야 하며 산아제한은 인종 개선의 필요한 요소로 간주했다.그녀는 순수하고 우월한 인종을 키워야 된다고 여겼는데, 이런 사고는 나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정당성과차이가 없었다. 실제로 나치는 우생학적 일환으로 350만명을 강제로 불임을 시행했다. 실제로 그녀는 산아제한뿐만 아니라 여러 영역에서 나치 독일과 같은 국가가 통치하는 사회주의를 지지했는데, 이는 국가 통제 하에서만 우생학적 프로그램이 실행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생어는 공식적인 의학이나 과학에 대한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다. 준간호사 훈련을 받았지만 수료하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의학적인 문제에 대해 우생학을 지지하는 광범위한 글을 썼다. 이러한 그녀의 의학적 무지함 때문에 위험하고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낙태를 시키기 위해 변비약을 추천하거나, 높은 수준의 퀴닌(해열, 진통, 말라리아 예방약)을 복용하라고 하는 것 등이었다. 또한 충고를 받기 위하여 심령술사나 예언가와 자주 상담하기도 했다.그녀의 이런 무지한 개념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많은 생명을 잃었는지 생각해보라!

생어는자신의 의학적 수준의 약점 때문에 자신의 연설과 글에서 당시 권위있는 학자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음을 자주 언급했다. 대표적으로 하버드대 사회학자인 이스트(E. M. East), 미시간 대학 총장인 리틀(Clarence C. Little), 존스 홉킨스 대학 정신과 의사인 마이어(Alfred Meyer) 등이다. 이들은 우생학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녀가 자신들의 이름을 사용하도록 쉽게 허락하였다.

생어는 1930년에 새로운 진료소를 개업하였고 조직이 불어나자 더 많은 진료소를 설립했다. 이 진료소는 우생학을 미국에 살고 있는 흑인들에게 적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즉 흑인 출산율을 낮추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의도는 흑인 사회에 두려움을 주었다. 생어는 인종차별주의 단체들과 사이가 좋았으며 백인 우월주의 단체인 KKK(Ku Klux Klan) 여성 지부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그녀는 흑인 지역을 범죄 발생 본부라고 여겼다.

생어와 우생학 지지자들은 단지 흑인만이 대상이 아니라 모든 유색인종의 인구를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들은 무려 세계 인구의 70%가 이러한 ‘바람직하지 않은’ 범주에 속한다고 추정했다. 생어를 포함한 미국 우생학자들이 만든 프로그램은 독일 나치가 2차 세계대전에 우생학을 적용하는 방법으로 긴요히 사용되었다. 많은 교회들은 생어가 진행하는 우생학, 낙태, 불임 등을 반대했다. 특별히 불임 프로그램에 대하여 윤리적, 도덕적 위험성으로 인해 특히 가톨릭 교회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다.그러나 그녀는 교회를 종교란 이름으로 무책임하고 무모한 행동을 정당화하는 자들로 치부해버렸다. 그러나 그 당시 미국 교회의 거센 반발을 보며, 그녀는자신이 바라는 우생학적 시도가 적어도 미국 민주주의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녀는더더욱 사회주의를 선호하게 되었다.

 

생어는 우생학을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적용시키고 싶어했다. 실제로 인도, 싱가포르, 일본, 중국, 한국 그리고 많은 유럽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 두 자녀 또는 한 자녀 갖기 운동이나 중국에서 법적으로 두 자녀만 낳도록 하는 것들은 모두 생어로부터 얻은 아이디어였다. 결국 그녀의 산아제한 운동은 세계 최대가 되었고, 미국에서만 보더라도 1년 예산이 수백만달러에 달하는 국제 기구가 되었다. 대부분은 주 세금에서 나왔으며, 나머지는 제너럴 모터스와 같은 대기업의 기부금이었다.

우생학적 정책은 적용 방법에 따라 두가지 범주로 나눈다. ‘긍정 우생학(positive eugenics)’과 ‘부정 우생학(negative)’이다. 긍정 우생학은 유전적으로 유리한 사람들 사이의 번식을 촉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적인 사람끼리 또는 건강한 사람끼리 다음 세대를 낳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 ‘긍정’이란 단어는 편의상 붙인 것이지 옳은 방법이란 의미는 아니다).

 

한편 부정 우생학은 낙태, 불임, 살상 등을 통해 열등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제거시키는 것이다. 나치 독일이 유태인, 폴란드인, 집시들을 제거하는 방법들은 극단적인 부정 우생학이다. 그러나 두 우생학 모두 강제성을 담고 있다. 나치 독일에서는 건강한 여성의 낙태가 불법이었으며, 아리아 인을 보존하기 위한 인간 교배 실험장인 레벤스보른(Lebensborn)을 운영했을 때,강제로 무장친위대에 소속된 자들끼리만 자식을 낳도록 하였다.

생어는 처음에는 일을 빠르게 진행하기위해 인위적인 부정 우생학을 지지했었다.그러나나치의 홀로코스트 등의 참상을 격은 후에 우생학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고 교회와 기존 전통에 의한 반대에 부딪히자, 자발적인 가족계획을 하는 긍정 우생학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인종차별적인 부정적 뉘앙스 때문에 1921년 ‘미국 출생통제 연맹(American Birth Control League)’이란 처음 명칭을 1942년에 ‘가족계획(Planned Parenthood)’으로 바꾸었다. 출생통제란 공격적인 단어 대신 가족계획이란 부드러운 단어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이 단어는 우리가 지금도 사용하는 명칭이 되었다.

그러한 아쉬움 속에 생어의 마음에는 여전히 우생학에 기초한 사회주의적 변혁에 대한 열망이 남아있었다. 이름을 바꾼 후에 가족계획 재단과 그녀는 여성인권이라는 명목으로 낙태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생어는 여성 인권을 통하여 여성들 사이에서 성도덕을 느슨하게 하는 데 있어서, 특히 성 개방과 이혼율 증가에 기여했다. 그녀는 자신이 시작한 잡지 <여성 반란>(Woman Rebel)에서 ‘게으를 권리, 미혼모가 될 권리, 파괴할 권리… 사랑할 권리’를 주장했다.

오늘날에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여성의 권리를 찾는데 공헌자라고 치켜세우지만 그 내면에는 진화론적 기반을 둔 우생학이 있었다. 그러나 가족계획재단과 관련된 사람들은 그녀의 우생학에 대한 자세를 은폐하고 있다. 이는 자신들의 사업과 오늘날 성 평등이나 낙태 등의 극단적인 페미니즘 운동에 나쁜 영향이 염려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산아제한 운동을 그녀의 업적으로 높이고 있다. 타임라이프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생어를 선정했으며, 타임지에서는 100명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올려놓았는데 여기서 생어를 ‘우생학을 반대했던 인물’이라고 거꾸로 표현하며 여성운동의 여주인공으로 만드는 해프닝도 있었다.

생어는 생전에 스미스 칼리지의 명예 법학 박사학위를 받는 등 많은 영예도 안았다. 그녀는 놀랍게도 여전히 곳곳에서 가족계획 운동의 여주인공으로 찬사를 받는다. 오늘날 가족계획재단은 전세계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연간 수입의 75억 달러를 자랑한다. 이 중 대부분은 납세자에 의해 지불된다.

생어는 우생학의 가장 유명한 미국 대중화 전파자였으며, 당시에 많은 과학자를 포함한 학자들도 그녀가 하는 일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녀가 성공한 이유를 단지 진화론에서 비롯된 우생학으로만 단정하기는 무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사회적 변화시기도 무시못하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을 포함해서 여러 나라는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전환되는 시기였다. 즉 월급을 주지 않고도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농가의 대가족 사회에서 그런 노동력이 필요 없는 공업사회로 변하고 있었다. 이는 생어의 생각이 적은 자녀를 낳아야 한다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맞아 떨어진 이유도 있었다.

생어는 말년에 진통제와 알코올에 중독되었으며,결국 버림받고 외로움을 느끼는 씁쓸한 여성이며 이기적인 쾌락주의의 희생자로 사망했다. 이것이 자신이 찾고자 하는 여성의 ‘게을러질 권리’, 미혼모가 될 권리, 파괴할 권리와 사랑할 권리’를 주장한 여성의 마지막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