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주의란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하는 철학을 말한다. 보이는 것에 약한 우리에게 자연주의 철학은 침투력이 강하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여 지고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내가 어디서 왔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도 보이는 것으로만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주의의 최고 걸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진화론’일 것이다. 이것은 간단한 생물에서 가장 고등한 인간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이론이다.

진화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란은 찰스 다윈 (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 영국)이다. 1859년 <종의 기원>이라는 시대의 걸작을 쓴 장본인이다. 그는 생존경쟁과 자연선택에 무한히 긴 시간을 넣으므로 인간과 생물들의 기원을 설명하였다. 그동안 진화론의 과학적 문제점은 Creation Truth에서 수없이 지적해왔다. 그러므로 이번 글은 진화론 자체의 과학적 문제점보다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나오게 된 당시 상황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진화론이 찰스 다윈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화론이 찰스 다윈에 의해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유럽의 많은 자연주의적 사상가들에 의해 진화론적 기본 사고는 갖추어 있었다. 계몽주의-자연주의에 따른 일련의 사고의 변천은 결국 하나님 없이 근거를 찾으려고 시도했고,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변했다는 진화론적 사고가 오래 걸리지 않고 나왔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다윈의 리더 라이엘

많은 다윈의 전기를 보면 1832-36년 비글호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는 동안 진화론자로 변했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알려진 것과 다르다. 다윈은 배를 타기 이전에 이미 진화론적 사고로 가득 찬 상태였고, 단지 그 이론을 설득력 있게 전개해 나갈 방도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1833년 <지질학의 원리>를 쓴 라이엘(Charles Lyell, 1797-1875, 영국)이었다. 그는 지층 형성 등 지질학적 과정이 오랜 세월 동안 느린 속도로 일어난다는 ‘동일과정설’을 심어준 사람이며, 나중에 자신의 이론과 진화론을 합하여 ‘지질시대표’(1872년)를 작성한 사람이다. 그는 다윈의 영적 아버지이자 조언자, 리더였다. 다윈은 라이엘을 통해서 성경에 대한 신뢰를 버리는 부담을 떨치는데 도움을 받았다.

이미 존재했던 자연선택과 생존경쟁의 아이디어 다윈의 <종의 기원>의 가장 핵심은 ‘자연선택’이다. 그러나 자연선택의 아이디어는 다윈이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이미 많은 사란들이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1800년 초에 스코틀랜드 의사였던 웰(William C. Wells)을 비롯해서 매튜(Patrick Matthew), 프리차드(James C. Prichard), 로렌스(William Lawrence) 등에 의해 자연선택에 관한 논문이 나왔다. 특별히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Darwin, 1731-1802, 영국, 그림)은 의사였는데, 다윈이 태어나기 전부터 ‘진화론의 개척자’로 불릴 만큼 진화론적 아이디어의 글을 쓴 인기 작가였다. 그 외에도 유럽에 여러 사람들이 진화론적으로 기원을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다윈 진화의 또 다른 메커니즘은 ‘생존경쟁’이다. 당시 경쟁에 대한 아이디어는 맬서스(Thomas Malthus 1766- 1834, 영국)로부터 이미 세상에 퍼져 있었다. 맬서스는 1798년 <인구론>을 통해 “인구의 자연 증가는 기하급수 적인데, 식량의 생산은 산술급수적이므로, 인간의 빈곤은 자연법칙의 결과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다윈의 생존경쟁은 이 맬서스의 생각을 진화 과정에 접붙이기만 한 것이다. 그러나 맬서스의 인구론은 큰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많은 학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기도 하다. 인구와 식량의 관계를 너무 단순화시켰기에 실제 적용에는 무리가 많다. 식량이 부족한 것은 인구가 많아서라기 보다 ‘국가 안에서의 빈부차’ 또는 ‘국가 간의 빈부 차’와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한 산업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면 노동력의 증가로 생산력도 함께 증가할 수 있다. 인구론은 맬서스가 영토가 작은 영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등장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미국, 캐나다, 호주와 같은 나라는 오히려 이민을 받는 정책을 쓰기도 했다. 어쨌든 인구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생존경쟁은 진화와 무관하다. 생물들이 아무리 경쟁을 한다고 해도 새로운 유전자가 획득되거나 다른 종류로 바뀌지 않는다.

월리스의 공로

그러나 누구보다도 <종의 기원> 출판에 가장 중요한 공로자는 알프레드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 영국)이다. 그는 <종의 기원>(1859년)이 출판되기 훨씬 전부터 그 주제를 연구했던 사람이다.

그는 1848-62년 아마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서 동물, 곤충, 원주민 등을 통하여 진화론과 자연선택을 구상하던 중, 1855년에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기 위해 영국에 잠시 귀국하여 라이엘과 다윈을 처음 만나 자신의 생각을 나누었다. 1858년에는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 추가된 내용을 편지로 린네 학회(Linnaean Society)에 보냈다. 여기에는 이전보다 자연선택에 대하여 더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있었다. 라이엘과 다윈은 그 발표를 접하며 누구보다 관심을 가졌다.



그때까지 다윈은 진화와 자연선택에 대한 여러 증거들을 수집하였으나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고 출판을 망설이고 있던 상태였다. 이때 월리스의 논문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서둘러 대중적 수준으로 정리해서 다음 해인 1859년에 <종의 기원>을 출판하게 되었다. 당시 인도네시아에서 생존경쟁을 포함한 진화의 증거를 수집하고 있던 월리스는 영국에서의 이러한 진행 상황을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엄밀히 연구 공로를 따지자면 월리스에게 더 주었어야 했다. 실제로 여러 면에서 부족하다고 주저하던 다윈에게 출판이 이루어진 된 것은 다윈의 영적 리더였던 라이엘의 재촉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책 <종의 기원>

다윈의 <종의 기원>의 내용을 살펴보면 확실한 것을 하나도 발견할 수 없다. 그의 책에서 가장 많이 찾을 수 있는 말투는 “내 생각에… (I think…)”이다. 20세기 최고의 진화론자라고 하는 마이어(Ernst Mayr, 1904-2005, 독일)도 다윈이 그의 책 <종의 기원>에서 실제로 ‘종의 기원’을 논핚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종의 기원> 책 15단원을 모두 요약해보자:

1장: 영국 내의 동식물의 변화, 특히 비둘기에 대한 인공 선택 과정- 종 변화 언급 없음
2장: 자연에서 관찰되는 유사한 품종- 단지 모양을 통한 분류일 뿐
3장: 생존경쟁- 경쟁으로 인핚 종 변화의 예가 없음
4장: 자연선택- 종 변화 언급 없음
5장: 변이의 법칙, 성 선택, 획득 형질 제안- 종 변화 언급 없음
6, 7장: 진화와 자연선택론의 난관에 대해 논함
8장: 본능의 기원에 대한 완전한 무지를 솔직하게 인정함. 그러나 자연선택이 동물의 본능적 행동에 어떻게 다양한 변화를 일으켰을 지 상상하려고 노력함.
9장: 종간 잡종과 그의 불임성- 종 변화 언급 없음
10, 11장: 전이 화석 부재를 인정함. 발견되기를 희망함으로 마무리함
12, 13장: 격리된 지역에서 발견되는 품종- 종의 변화 언급 없음
14장: 비교 형태학, 발생학, 흔적 기관 등- 종의 변화 언급 없음, 지금은 진화의 증거가 아닌 것으로 결론 난 것들이다

이와 같이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핵심이 되는 ‘종의 기원’에 대하여는 단 하나의 언급이 없다. 진화론은 다윈의 순수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윈은 자신의 책에서 진화론의 선배와 동료의 글을 참고했다는 말도, 적임자들의 덕분이란 감사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무스 다윈에 대한 언급도 없다. 그러나 다윈은 이 사상을 항상 ‘나의 이론(my theory)’이라고 불렀다. 역사학자인 바르즌(Jacques Barzun)은 “다윈은 사상가가 아니었고 생각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는 머뭇거리고, 덧붙이고, 물러섰고, (진화의) 흔적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는 사건의 영역과 이론의 영역 사이의 경계를 넘자마자 나쁜 의미로 ‘형이상학적’이 되었다.”라고 하며 다윈의 희미한 능력과 사실을 버리자마자 철학으로 넘어간 모습을 지적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이런 상황 속에서 출현했다. 한편 책 내용의 불확실함이나 다윈의 부족한 능력을 떠나서, 이 책은 근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이 되었다. 진화론은 자연주의의 연장선에서 등장했으며, 자연주의 사상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그리고 과학, 윤리, 신학, 정치, 사회, 문화 등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 막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진화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대고 있다. 진화론은 타락한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 타락한 생각은 결코 성경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므로 진화론이 등장한 다음 가장 큰 변화는 성경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많은 교회는 그 진위의 파악 없이 진화론을 받아들였고, 다음 세대는 교회를 떠나버렸다. 이는 성경에서 분명히 지적한 바이다. 육체에서 나온 진화론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