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사람을 보며 ‘누구를 닮은 것 같다’ ‘누구처럼 행동한다’ ‘누구 이미지가 풍긴다’ 라는 식의 표현을 쉽게 한다. 그만큼 우리는 보이는 것만 가지고 판단하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 일 것이다. 반면에 성경은 이와 상반된 자세를 요구한다. 보이는 것(visible) 이전에 보이지 않는 분(invisible)이 첫 현실(reality)이 될 것을 요구한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의 시작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앞선 <성경과 세계관> 칼럼에서는 교회가 타락함으로 인해 교회 밖에서 발생한 계몽주의를 다루었고, 지난 3월에는 계몽주의의 연장선에서 등장한 ‘신은 존재하지만 나에게 영향은 주지 않는다’는 이신론(理神論, deism)에 대하여 다루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신론의 이분법적 신앙은 성경이 말하는 신앙이 아니며, 믿어야 할 논리성도 약하기 때문에 얼마 안되어 하나님을 떠난 무신론(無神論, atheism)으로 쉽게 넘어가고 만다(본인들이 인지하든지 못하든지, 성경의 하나님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이신론도 무신론이다).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

이신론에 이어 가장 먼저 등장한 대표적인 무신론적 철학은 자연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연주의는 단어 자체가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배제하고 보이는 자연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철학이다. 순서상으로 이해하자면 자연주의는 앞서 다룬 이신론에서 하나님을 제외시켜버린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을 배제시켰 으므로 이신론적 철학자의 대부분은 자연주의자로 돌아섰다. 아래는 기존에 이신론을 주장하다 나중에는 자연주의자로 변한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철학자들의 표현 이다. (Sire, James W., Universe the next door, IVP, 1988, p. 61-62)

  •  존로크(1632-1704)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이성을 통해 성경에 기록된 계시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

  •  라 메트리(1709-1751)

 “신의 존재란 가치 없는, 실제로 이론적 진리일 뿐이다”

  • 데카르트(1796-1650):

“우주는 물질로 구성된 거대한 기계이며 인간에 의해서 파악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자연주의자들은 눈에 보이는 자연과 자신의 이성을 하나님 보다 위에 두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스스로는 신을 부정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무신론적 자연주의 자가 되었다. 이들은 ‘보이는 것이 모든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우주는 하나의 기계이며, 인간은 이들 중에 복잡하고 작은 하나의 부속품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관점으로 우주는 어떤 목적도 없는 질서 잡힌 영원하고 거대한 기계이며 인간도 우주, 공간, 시간, 물질 가운데 결합된 하나의 연속체로 보았다.

하나님을 배제시킨 상태에서 자연을 보면 자연은 참으로 정교하다. 그러므로 자연 그 자체에 능력을 부여할 뿐 아니라, 이 정교한 규칙을 발견하고 해석하고 있는 자신(이성)이 자랑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놀라운 질서만이 남기 때문에 이 질서에 개입하는 어떤 초월자도 필요하지 않다. 실제로 자연주의적 이론을 전개해 나가기 위해서는 초월자가 개입되어서는 안되기에, 그 이론 속에 어떤 기적도 들어갈 틈이 없게 되었다. 물론 자연의 원리에 대하여 모르는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에는 인간은 그 원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자연주의적 사고를 증폭시키는 데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도 한 몫을 하였다. 미대륙의 발견(1492년), 지동설 발표(1534), 자석의 발견(1600), 행성 타원궤도의 수학적으로 완성(1605), 천체 망원경 발명(1609), 진공과 수은 기압계 발견(1643), 압력과가스 부피의 관계 정리(1662), 중력 법칙 발견(1687), 혜성의 발견(1705), 증기 기관발명 (1769) 등의 혁신적인 과학 기술이 일어났다. 과학과 함께 수학도 큰 진전이 있었는데, 로그의 발견(1614), 기하학의 발전(1600 중반), 미적분학 발견(1669), 원주율의 값을 소수점 아래 72자리까지 얻는(1717)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과학적 지식은 자연을 하나의 정밀한 기계로 여기기에 충분했다. 또한 중력의 법칙과 같은 과학 법칙들을 통해 어떠한 힘이 자연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연자체 안에 있는 그 법칙에 능력을 부여했다. 18세기부터 일기 시작한 산업혁명은 인간 스스로 얻어낸 결과로 여기며 이성에 대한 자부심을 더욱 부추겼다.

자연주의에 대한 성경적 관점

반면에 성경은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에서 온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전능하신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하며 이를 믿는 믿음을 요구한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what is seen)은 나타난 것(which are visible)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히브리서 11장은 위의 3절 말씀을 시작으로 32절까지 “믿음으로” 시작하며 아벨,에녹,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사무엘, 선지자들을 나열한다. 이는 여기서 열거된 모든 믿음의 선진이 기본적으로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 믿음을 갖추고 있었다는 의미이며, 믿음의 후손인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갖출 것을 원한다.

또한 만물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가 핑계를 댈 수 없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God’s invisible qualities)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 니라”(롬 1:20).

우리가 피조물에 담겨있는 놀라운 법칙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 이런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특별한 존재이기때문이다(창 1:27, 28). 그러나 하나님을 제외하고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결과만 보면자신의 놀라운 능력에 도취되는 것이다. 실제로 행성들의 운동, 화학결합, 동식물의신진대사 과정 등은 결코 자연 스스로 갖출 수 없음이 분명하다. 이는 보이는 것을초월하신 전능자의 설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 보이지 않는 설계자를 제외하고, 결국 피조물 자체에게 영광을 돌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하나님께로 멀어지면,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더 나아가 자신이 다스려야 할 피조물에게 영광을 돌리는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보이는 것 중에 하나라 생각하고, 우주의 작은 부속품으로 떨어진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의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2, 2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보이는 것에 영광 돌리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경고하셨다.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신 4:19).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심지어 성전 안에서도 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

“너는 또 이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더라”(겔 9:16).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형벌인 사형을 명하셨다.

“내가 명하지 아니한 일월성신에게 절한다 하자 …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돌로 쳐 죽이되”(신 17:3-5). 엄밀히 말하자면 성경은 보이는 것에 대하여 자연(nature: 스스로 된 것)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에 대하여는 피조물(creature) 또는 창조물(creation)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만든 ‘자연’이란 단어속에 이미 우리 안에 하나님을 제외하려는 내재된 사고가 표출된 것이다. 만약에 스스로 존재한 것을 자연이라고 말한다면, 자연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출 3:14)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하나님의 존재론적 위치를 정확히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은 통상적으로 ‘자연’이란 단어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의미는 ‘피조물’임을 알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자신과 관계가 끊어진 인간이 보이는 것에 약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심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에 미혹되는 것에 대한 경고는성경에서 쉽게 발견된다.

“너희는 재판할 때 외모를 보지 말라”(신 1:17)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삼상 16:7)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 하리라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신 7:17)

유럽에 18, 19세기에 가장 보편적이던 자연주의 철학은 하나님보다 이성을 더 중시하는 계몽주의적 사고 안에서는 필연적으로 결과였다. 그리고 이 철학은 교회 밖이라고 하기보다는 어떤 면에서 교회 안에 발생했다. 앞에 소개했던 세 철학자도 교회안에 있던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가 하나님을 버렸을 때 일어난 것이다.

사탄이 하와에게 “너희가 그것(선악과)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진다”(창 3:5)고 말을 건넸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나무” (창 3:6)로 여기므로 첫 유혹에 넘어갔듯이, 하나님 말씀을 굳건히 의지하지않은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보이는 것에 대한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의 ‘유신론 – 이신론 – 자연주의’로 이어지는 철학적 사고의 전환으로 많은 교회들도 자연주의를 쉽게 받아들였다.

이는 앞에서 다루었듯이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과 동일한 실수를 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에도 일어난다. 교회 안에서 발생한 진화론과 함께 하나님을믿어보려는 유신론적 진화론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이런 철학적 단계는 우리 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처음에 신앙을 가졌다 할지라도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면, 대부분 유신론à이신론à자연주의(무신론)의 기본적단계를 거치게 된다. 글을 읽는 독신들도 이 단계 가운데 자신이 어디에 해당되는지점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자녀들이 ‘하나님은 계시지만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다면 그들은 이신론의 단계에 있는 것이며, 이때 부모는 빨리 유신론으로 이끌어주지 않으면 쉽게 무신론으로 넘어가고 결국은 교회를 떠나게 된다.

한편,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보이도록 이 땅에 오신 적이 있다. 바로 아들 하나님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이유는 육신으로 오셔야 우리를 위해 죽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그러므로 우리의 지혜와 지식은 우리 자신이나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예수님 안에서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

이분을 통해서만 보이는 것을 초월하신 전능하신 창조자와, 하나님이 죽기까지 구원할 정도로 귀한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와, 우리가 다스릴 대상인 피조물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요 14:8)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 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예수님 자신께서 육신으로 오신 아들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대답하신 것이다. 우리는 결코 보이는 것에 자유로울 수 없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그 하나님을 볼수 있는 것이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하나님을 떠났기에 등장한 계몽주의는 자연주의로 끝났을까? 그럴 리 없다.

곧 이어서 자연주의의 최고의 걸작품을 탄생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