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다루었듯이 중세 교회가 타락했을 때,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났다. 하나는 교회 안에서 등장한 종교개혁(Reformation, 1517)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 밖에서 일어난 계몽주의 (Enlightenment)이다. 이번에는 교회 안에서 등장한 종교개혁에 대하여 다루어 본다. 종교 개혁에 대한 고찰은 중세 교회의 분위기와 진화론적 사고가 깊숙이 들어와 있는 현 교회의 상황을 비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다섯 가지 구호인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 (Sola Christus)”, “오직 은혜 (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맨 앞에 있는 “오직 성경”이다. 왜냐하면 나머지 네 가지 모두는 성경을 신뢰하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종교개혁자들은 카톨릭 성직자와 달리 전통보다는 성경을 강조하였고, 성경을 기준으로 카톨릭의 전통을 비판했다. 여기서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사람들 의 생각과 행동을 볼 것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성경 중심이었다.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 영국) 종교개혁은 1517년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그 성당 에 ‘95개조 반박문’(실제로는 ‘면죄부들의 효력의 포고에 대한 토론’이 원래 제목임)을 걸기 훨씬 이전부 터 성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 변화된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존 위 클리프이다. 그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도록 함으 로써 성경을 일반인들에게 읽히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기독교 역사가들은 이를 그의 가장 큰 공로로 인정한다. 그는 성경을 기초로 로마 카톨릭 교회와 참 교회를 구분하였고, 카톨릭 교회의 모든 전통과 교리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교황이 사도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기 때문에 사도들의 계승자가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권좌라고 하며 비판했다. 위클리프와 같은 성경적 사고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인 “롤라드(Lollardy)”에 의해 퍼져 나갔다.

특별히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 영국)은 위클리프의 영향으로 최초로 영어로 성경을 번 역했는데 킹제임스 번역(1611년 완성)의 70%는 그의 번역에 근거했다. 틴데일은 중세 카톨릭 교회의 성인 으로 추앙을 받던 토머스 모어를 비판한다는 이유로 화형 당했다. 이와 같이 종교개혁 이전에도 성경을 바르게 접했던 사람들은 종교개혁 이전에도 진리와 멀어진 카톨릭 교회와 용기 있게 맞섰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독일) 루터는 만 18세에 수도사가 되기 이전까지 성경을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당시 대중들은 성경을 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도사가 된 후 매년 2회 정도 성경을 읽을 정도로 성경을 가까이했다. 그는 중세 신학자들이 고대 철학에 오염되었음을 발견하고 이에 구분된 신학을 폈던 어거스틴을 가장 성서적이라고 여겼다. 1512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대학에서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를 연이어 가르치면서 칭의(justification)는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된다는 확신 을 갖게 되었다.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후 1521년에 교황청으로부터 파 문되었을 때 보름스(Worms) 국회에서 남긴 말을 보면 루터는 ‘성경’에 최종적 권위를 두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저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들도 자주 오류를 범했고 서로 모 순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일 저에게 성경의 증거나 이성적으로 납득할 만 한 근거를 통하여 반박하지 않는다면, 저를 지배하고 제가 증거로 제시한 성경 말씀으로 인하여 저는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증거가 성경적으로 확실 하다고 믿고 쓴 저의 책 중에 그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루터의 용기는 바로 성경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의 행동이 성경의 완성을 이룬 것은 아닐지라도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은혜로만 향하는 값진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울리히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 스위스) 츠빙글리는 루터에 가려져서 잊힌 종교개혁자라고도 불리는 사람이다. 그는 당대 스위스의 최고의 교육 수준을 갖춘 사람으로써 누구보다 성경을 강조 한 사람이다. 그가 한 말이다: “성경의 권위는 교회 위에 있다. 성만찬은 희생의 제사가 아니라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 신부와 수녀도 결혼할 수 있다.” 그는 루터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는데 루터는 “성경이 명백하게 금하지 않은 것을 교회가 금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듯이 기존 전통에 대하여 느슨했던 반 면에, 츠빙글리는 “성경이 정확하게 하라고 명하지 않은 것은 해서는 안된다”고 하며 훨씬 적극적으로 카톨릭의 전통적 상징들을 제거했다. 심지어 오르간을 제거하고 찬양대만 부르던 찬송을 모든 성도가 부르도록 하는 변화도 추구했다.

존 칼빈(장 칼뱅, John Calvin, 1509-1564, 프랑스) 칼빈은 종교개혁의 위대한 성경 교사로써 당대 유일한 국제적인 종교개혁자로 평가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간결하게 표현하며 지성인들과 소통 하였다. 복음을 통해 회심한 후에 카톨릭 성상과 성 인 숭배를 거절했으며 성경을 통해 종교개혁적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다. <기독교 강요> 등 그의 수많은 신학 서적 은 모두 성경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통해서 쓰여진 것이다. 그는 “교황주의자 들은 의가 믿음과 행위의 합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 말이 옳다면 바울의 수많은 증거들은 거짓이어야 한다”고 하며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성경 전체와 일치하지 않음을 지적했으며, “참된 신자는 하나님께서 친절하시고 자비하신 아버지라는 든든한 확신을 갖고, 자신에게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신 약속을 의지하고 어떤 의심 없이 구원을 기대하는 사람이다.”고 하며 크리스천을 성경 속 의 하나님의 성품과 그에 대한 믿음을 소유한 자로 정의했다. 개혁주의 신학에 서 칼빈의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러나 과연 그의 신학에서 성경에 대한 신 뢰를 제거한다면 어떤 신학이 남겠는가? 오늘날 신학자들과 신학생들은 칼빈의 신학을 받아들이기 앞서 그의 성경에 대한 자세를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이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는 본질적인 공통점
이와 같이 종교개혁을 주도한 사람들은 모두 성경을 그대로 신뢰했다. 종교개 혁자들은 각성을 한 것이 아니다. 성경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했다. 어떤 면에서 각성은 인위적인 노력이지 진리가 아니다. 최근 필자가 프로그램 인도 차 한국교 회를 방문할 때면 “다음 세대를 교회!”와 같거나 이와 유사하게 각성하자는 식의 표어를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유럽이나 미국 교회도 다음 세 대가 교회를 떠날 때 비슷한 각성적인 표어를 내걸었다. 그러나 이들 교회도 모두 다음 세대를 교회에 남겨놓지 못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각성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바로 “성경을 그대로 믿는 예수 그리스도교”이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모들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보다 자신의 행위가 앞서 버렸 다. 자신들이 바른 모습을 보이면 다음 세대가 교회로 돌아올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각성의 행위는 결국에 자신들도 바르게 살지 못하게 되었으며 다음 세대를 교회로 돌아오게 하지도 못했다. 이런 인위적 노력은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바르게 살려고 해서 바르게 되는 것도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을 때 에야 바른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며 그분이 원하는 삶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유럽과 미국의 다음 세대는 ‘성경’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를 떠난 것이다. 진화론적 교육으로 인한 성 경에 대한 불신이 일차적인 이유였다. 그때 교회는 학교에서 진 화론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근본적 문제라는 점을 파악하지 못했다. 자녀들이 진화를 믿으면 믿음의 근거인 성경을 믿지 못 한다는 점을 몰랐다. 오히려 성경과 진화론을 섞은 반성경적 타 협 이론들을 가르쳤다. 이런 이중적인 상태로 자녀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했다. 하지만 성경을 부정하며 어떻게 예수님을 믿겠는가? 그런 모순된 자세는 교회를 떠나는 다음 세대를 바라만 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성경이 사실임을 부정하면서 바르게 살라고 했다. 그 결과 동성애, 폭력, 성적 타락, 낙태, 이혼 등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남겨놓았다. 교회를 떠난 다음 세대는 예수님의 진리뿐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 들을 기회도 없어진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당시에 새로운 진리나 독특한 사상을 창출한 것이 아니었다. 본질인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것이다. 신앙의 유일한 권위를 성경에 두어야 한다는 외침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종교개혁(1517년)이 일어났던 시대는 아직 진화론(종의 기원 출판: 1859년)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루터의 95개 조항에도 ‘성경은 무오하다’라는 조항이 없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는 성직자만이 성경을 소유하고 일반인들이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분위기였을 뿐이지, 성경을 읽기만 한다면 그 내용을 수용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 종교개혁은 성공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어떤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 때와 가장 크게 다른 것은 성경을 읽어도 믿 을 수 없는 세대라는 점이다. 바로 교과서, 매스컴, 인터넷 등을 통해 세뇌되어 있는 진화론적 사고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 차이점을 분명히 파악해야 한다. 사탄이 중세교회에는 성경을 접하지 못하는 전략을 썼지만, 종교개혁과 함께 성경을 쉽게 접 하자 이제는 성경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쓰고 있다 는 점을 파악해야 한다.

최근 각 교회와 교단들은 종교개혁 500주년 행사를 거창하게 치렀고 그 의미도 다루었다. 그러나 이런 행사를 한다고 한 들, 각 교회가 종교개혁 첫 구호인 “오직 성경으로”가 마음에 닿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진화론과 성경을 타협한 이론들을 받아들이면서 “오직 성경으로”를 동의한다고 착각한다면 과연 그 다음인 믿음, 은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 영광으로 이어질 수 있겠는가?

교회 타락도 마찬가지이다. 중세 때 성경을 직접 읽지 않았기 때문에 죄악으로 가득 찬 인위적 행위를 내세웠을 때 카톨릭 교회가 타락한 것과 같이, 지금 진화론으로 인한 성경에 대한 신뢰 없이 자신들의 거짓된 행위를 우선했기에 교회가 타락하는 것과 차이점이 없다.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창조과학자들이 사역을 하는 것은 어떤 독특하고 새로운 이론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도 안된다! 진화론에서 벗어나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 진화론 시대에 “오직 성경으로”의 진정한 의미를 찾자는 간절한 외침이다.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고후 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