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1년 여에 걸쳐 사회진화론(Social Evolution)에 대하여 연재하였다. 사회진화론이란 진화론이 등장한 이후에 진화 역사를 사실로 놓고 개인과 사회에 적용시키려는 시도를 말한다. 지난 글들을 통해서 거짓 역사인 진화론이 단지 과학책을 넘어 개인과 사회에 어떠한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는지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기본적인 삶의 기준이 성경이었고 유럽보다 진화론을 나중에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진화론 교육 전후에 대한 변화를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미국은 1960년에서야 학교에서 진화론을 강조하였고, 이에 따라 1963년에 공립학교 기도 금지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시점으로 성적타락, 이혼율의 급증, 낙태의 발생과 증가, 학원 총기사건 증가 등의 사회 변화의 격동기를 다루었다.

진화론의 보급 이후 가장 먼저 바뀐 것이 성문화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다윈과 그의 이론을 따르는 자들은 성선택을 가장 중요한 진화 과정 가운데 하나로 꼽았으며, 이는 성개방으로 이어졌다. 그 동안 억제되었던 혼전 성관계가 급증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른 미혼자녀의 증가와 낙태의 발생과 증가로 이어졌다. 아울러 결혼이라는 거룩한 하나님의 작품이 훼손되어 결국 이혼율 증가를 보이기 시작했다. 최근 미국은 결혼보다 동거 숫자가 훨씬 많은 것이 현실이다.


1859년 출판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 이어서 진화 역사를 보여주는 지질시대표가 만들어지자(1872년) 사람들에게 진화론적 사고는 점점 견고하게 자리잡아갔다. 그 결과 유럽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1, 2 차 세계대전과 이데올로기의 몸살을 앓았 던 모습을 다루었다. 경쟁과 살상은 삶의 당연한 과정으로 여겨졌다. 당연한 과정을 넘어 이를 사회와 국가 간에 직접적으로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는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나치 독일은 철저하게 진화론으로 무장된 단체가 되었다. 나 치당의 리더인 히틀러는 그의 책에서 다윈이 언급한 생존경쟁 (survival competition)을 투쟁(fight)이라는 더 급진적인 단어로 바꾸었다. 진화론적 사고를 선동으로 증폭시킨 것이다.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 일본의 제국주의는 모두 진화론을 실제 역사로 받아들임으로 발생한 극단적인 사고들이다. 그리고 20세기 중엽 유럽과 아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를 지옥과 같은 세상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6천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는 엄청난 결과를 남겨놓았다.

20세기 들어 또 하나의 문제로 몸살을 앓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을 것이다.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공산주의 사고를 정립한 칼 마르크스는 <종의 기원> 초판이 나온 다음 해인 1960년에 이 책을 읽은 후 기존에 가졌던 신앙을 완전히 버리고 공산주의 이론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이 이상적인 생각을 받아들임으로 수십 년의 어려운 삶을 겪었으며, 지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러시아의 레닌이나 스탈린은 모두 신앙을 가졌던 자들이지만 진화론을 받아들이며 신앙을 버리고 공산주의를 수용했다. 그리고 이들 의 독재 하에 수천만의 러시아인들이 사망했다. 아시아의 공산주의 역시 동일한 어려움을 겪었다.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의 집권 당시 수천만의 국민이 사 망했는데 이는 인류 역사상 한 독재자 정권 하에 가장 많은 사망자로 기록된다. 또한 캄보디아 폴 포트 정권은 당시 인구의 2/7인 200만을 죽이는 ‘킬링필드’를 남겼다. 베트남과 북한도 이와 비슷한 숙청이 이루어졌다.

단지 공산주의 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자본주의 안에서도 진보적이라고 하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무자비한 자본주의가 등장했다. 기본적으로 기업의 성장은 자신의 성실성과 발전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고가 상대 기업을 죽임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분위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카네기는 크리스천이었으나 종의 기원을 읽고, 사회진화론의 아버지라고 하는 스펜서의 책을 접한 후 자유 방임으로 돌아섰다. 록펠러는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진화론을 그대로 믿는 소위 유신론적 진화론자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미국에서만 20세기 초에 수백 만의 근로자들이 일터에서 사망했다.

위의 내용은 지난 한 해 동안 연재했던 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진화론은 단지 과학책에만 그릇된 사고를 준 것뿐 아니라, 이 그릇된 내 용은 사회와 국가에 직접적인 악영향으로 적용되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sin) 를 본성(nature)이라고 정당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고의 전환을 진보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여겼다. 여기서 ‘정당화’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진화론이 등장하기 이전에 각 나라와 사회에 성적문란, 낙태, 이혼, 폭력, 경쟁, 전쟁 등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죄가 들어온 이래로 늘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화론이 ‘과학’, ‘법칙’, ‘역사’, ‘사실’ 등의 수식어를 부여함으로 정당화된 것이다.

또한 이런 자세는 곧 바로 성경 자체를 공격하는 도구가 되었다. 성경과 상반된 역사를 제시함으로 성경의 무오성을 받아들이지 않게 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기존의 성경적 사고가 보편화된 서구 사회에 성경에 대한 권위가 떨어지게 되었고 여러 신학자들은 성경과 진화론을 섞어서 믿으려는 신학을 만들었으며, 진화 역사를 사실로 놓고 성경 역사를 바꾸려는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런 신학은 교회 안에서 성경을 부정함으로 사회에 제대로 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다음 세대가 교회를 떠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 것이다. 이제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하나님의 형상인지, 어떻게 죄가 들어왔는지, 무엇이 죄인지, 결혼, 생명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시는지, 천국과 지옥이 있는지… 배울 수 없게 된 것이다. 겉잡을 수 없게 되었다. 진리에서 멀어져버렸다.

20세기 중반부터 각 국가와 사회는 각성의 분위기로 바뀌었다. 스스로도 20 세기 초의 끔찍함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각성’은 인위적이고 행위적인 노 력일 뿐이다. 이런 인위적인 노력을 한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교과서에서 생존 경쟁에 의해 사람으로 진화되었다고 배우고 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진화라고 하는 실체(reality)를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는 잠시 덮고 있을 뿐이지 근본적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언젠가 다시 일어날 것은 자명하다.

기독교는 각성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에게 바르게 살라고 하는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바르게 살 수 없다고 말한 다. 우리의 각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실 때 바르게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둠을 몰아내라는 명령을 하지 않는다.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오심으로 어둠이 물러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세상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보다 교회 안에서 진화론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것이 더욱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기 이전 에 진화과정에 들어있는 경쟁, 살생, 성선택 등을 이용하신 분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끔찍한 과정을 인정한 분의 형상이 되는 것이며, 이런 죄악 된 삶을 당연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하고 있다(갈 1:8, 9). 그런 면에서 최근 한국 교회 안에서 난무하고 있는 진화론과 성경을 함께 믿자고 하는 타협이론은 분명히 다른 복음이다. 사회진화론을 다루며 독자들이 이와 같은 영적인 부분을 분별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