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2019, 1) 사회진화론을 다루는데 있어서 러시아에서의 공산주의를 주로 다루 었다. 이번에는 중국 공산주의에 대하여 살펴본다.


중국 근대사 속 진화론 찰스 다윈(Charlest Darwin, 1809–82, 영국)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었을 때 이를 전적으로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다. 진화론을 수호한다고 해서 ‘다윈의 불독’이라고 불리는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1825-95, 영국)와 ‘독일 진화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헥 켈(Ernst Haeckel 1834-191, 독일)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특히 1898년 헉슬리의 책인 <진화와 윤리, Evolution and Ethics>가 출시되자 중국어로 번역되어 대중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사회진화론의 아버지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 영국)의 책도 번역되어 중국을 휩쓸었다.

중국의 공산주의를 다루기 이전에 중국에 진화론이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는 지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중국에 다윈의 자연선택과 함께 진화론이 알려지는데는 옌푸(嚴復, 1853-1921)라고 하는 사상가로부터로 알려진 것으로 본다. 그는 진화론을 선도하였는데, 그로 인해 당시 청나라와 대항했던 혁명가들은 “다윈의 깃발을 높이 치켜 세우면서”라며 자신의 편들을 독려했다. 이런 정치 적 운동의 지도자들은 당시 서구에서 나온 과학적인 인종 차별주의 사상에 동화되어 자신들이 중국을 통치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여겼다. 중국은 적극적으로 진화론을 ‘과학’으로 소개하며 사회에 적용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혁명가들은 기존 정부를 뒤집어 엎기위해 테러를 가장 좋은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그 로인해 큰 피바다의 대학살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면에서 중국인에게 이런 잔인한 사상을 준 것이 다윈이라고 하는 해석은 과장이 아니다. 진화론적 사고로 경 쟁을 부추겨 오랫동안 침체되어있던 자신의 나라에 자극을 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결국 진화론은 단지 수 년만에 중국인들에게 수용되었고, 20세기 초 이미 이를 새로운 진리로 여기게 되어 생존경쟁이나 적자생존 등의 진화론적 용어가 일반화되어버렸다.
신해혁명을 주도했던 혁명가들은 국가란 한 인종이 생존하기 위해 필수적이 라고 말했다. 만약에 한 국가 안에서 두 인종이 있다면 국민과 국가의 단결은 이 룰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인종은 노예가 되거나 멸망되어야 한다고 여겼 다. 이들은 자신들과 기존의 청나라를 통치했던 만주족이 인종적으로 다르다며 만주족이 열등하다는 생각을 심어주며 착취를 정당화했다. 이는 중국 혁명가들이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었는데, 이는 나치가 유대인에게 행했던 것과 동 일한 방법이었다.
중국의 인종 차별주의는 처음에는 기독교 전파 이전에 다원 기원을 믿었다가, 17세기 기독교 선교사의 영향으로 단일 기원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서 다시 다원 기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중국인들은 이런 진화론적 다원 기원을 ‘과학적’이라고 여겼다. 랜킨(Rankin)은 “비록 생존경쟁 의 아이디어는 거의 모든 상황에서 사용될 수 있지만, 1911년의 혁명가들은 일부 러 인종적 측면을 적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진화론을 받아들이 며 자연선택의 이론을 인종경쟁으로 묶어서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적자생존을 법칙으로 믿고 있었기에 외국인들에게 지배당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국민이라고 비난했다. 예를 들자면, 저우 룽(鄒容, 1885–1905, 중국의 민족주의자 & 인종 차 별주의자)은 “중국이 스스로 개혁하지 못했다면 진화의 역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빠져나올 수 없는 노예로서, 곧 원숭이가 되어… 마지막으로는 멸종했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영향력있던 소설가 루쉰(魯迅, 1881-1936)은 신해혁명에 대해 “인류의 진보적 진화가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되었고 자연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 것은 당시 진화론적 상황을 대변한다. 실제로 쑨원(孫文 , 1866-1925, 중국국민당의 창립자)을 비롯하여 많은 중국 혁명가들은 그들의 글 속에서 중국이 인종 멸종이 될 것같다는 강렬한 인종적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표현은 생존경쟁과 싸워서 살아남으려는 혁명가들을 단결하게했다. 1898년 개혁가 중에 한명인 랑 치차오의(梁啓超, 1873-1929) 역시 진화론적 사고를 그대로 표현했다: “국가가 스스로를 강화시키고 가장 우월하게 만들 수 있 다면, 부적합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을 멸절시키는 것을 부도덕 하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고? 그것은 진화 법칙이기 때문이다”.


중국 근대사 요약
1912년 – 쑨원을 리더로 한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청나라의 군주제가 아닌 공화국으로 중화민국이 설립.
1920년 – 중국 공산당 창당 1925년 쑨원의 사망 후 국민당에 의해 국민정부 수립 1928년 – 장세스를 주석으로 권력을 장악한 국민당 주도의 중앙정부 설립
1937~45년 – 중일전쟁
1947년 – 국민당 만으로 중화민국 설립
1948년 – 중국 공산당에 밀려 국민당 정부 타이완으로 천도
1949년 –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중국의 공산화 중-일 전쟁(1937-45)에서 중국이 패하고 나서 중국을 변화시키기 위한 방침으로 정치가들은 진화론적 철학을 정치적으로 더욱 이용하였다. 혁신자들은 진화론을 이용하여 폭력적인 혁명을 정당화시켰는데, 이는 결국 공산화로 이어 지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0세기 초 이미 진화론을 “중국이 지구상에서 살아 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장 적합한 사고”라는 대중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었다.

공산당 공동설립자 중 한 사람인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을 비롯한 높은 위치에 있는 혁명적인 중국 공산당 지도 자들은 진화론에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마오쩌둥은 어린시 절 많은 서양 저자들의 책들을 탐독했는데, 다윈, 헉슬리, 허버트 스펜서와 같은 19세기 진화론자들의 책이 포함되었는데, 다윈과 헉슬리를 가장 좋아하는 두 명의 작가로 뽑았다. 종교적으로 신실한 어머니와 종교에 회의적인 아버지 밑에 자란 마오쩌둥은 진화론적 책들과 서양 책들을 읽어나가면서 종교에 회의를 느꼈다. 무엇보다도 진화론을 “향기로운 꽃”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도 그가 얼마나 진화론적 사고를 동경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957년 후반까지도 다윈의 특유한 용어인 ‘적자생존’을 사용하며, 중국인들에게 진화를 법칙으로 심어줌으로써 혁명과 폭력 사용을 정당화하여 무너진 상황을 일 으키려 했다. 실제로 그는 진화론을 사회주의의 기초로 삼았으며, 공개적으로 전세계를 폭력과 전쟁,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을 통해 공산주의로 바꾸자고 주장 했다. 그리고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마오쩌둥은 공산주의 정책을 통해 최대 8천 만명의 중국인들을 죽이는데 사용했다. 이는 1970년 중반의 중국 인구로 보더라도 1/10이 넘는 엄청난 숫자이다. 그는 혁명동지들을 쓰레기처럼 버렸고 국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했다. 국민들을 무기력한 노예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를 ‘새로운 사회’라고 했다. 그의 사생활은 거의 베일에 가려져있지만, 간호사와 첩들과 관계를 가지며 방탕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개인 주치의에 의해 폭로되었다. 실제로 그의 자녀 일부는 죽거나 정신분열증으로 고통을 겪었다.

중국인 과학자 케네스 쑤(Kenneth Hsu, 1928-, 중국)의 초등학교 때의 회상은 중국 학교 진화론 교육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선생님에게 ‘승리는 열심히 노력해서가 아니라 끊임없는 경쟁을 통해 적합한 사람이 되어야 얻어진다’로 배웠다고 증언을 했다. 이런 교육을 통해 학생들은 개인, 사회적 계층, 국가, 또는 인종 간의 경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우월한 사람이 열등한 사람을 없애버리는 것에 당연시 여기는 잔인한 이데올로기의 지지자들로 변 했다. 진화의 메커니즘을 받아들이 는 사상은 1900년 초 모든 학생들 간 행물에서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안에는 생존경쟁, 국가 생존에 대한 제국적인 위협, 중국 시민들에 대한 무지함과 야만주의 주제로 가득했다. 쑤는 또한 마오쩌둥이 ‘지속적인 자연선택의 압력없이는 인간들이 퇴화된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했다. 중국 혁명가들은 민족주의와 진화론를 혼합시킨 투쟁으로 중화사상(中華思想: 중국이 자국의 문화와 국토를 자랑 스러워하며 타 민족을 배척하는 사상)을 부추겼다. 마오쩌둥은 평시에 7천만 명이 훨씬 넘는 사망자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20세기 다른 어떤 지도자들이 행했던 것 보다도 많은 숫자이다. 마오쩌 둥의 “문화대혁명” 대학살으로만 2천 9백만명의 사망자 수가 나왔다. 이때 많은 살생이 홍위병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그로인해 6억명의 중국인들의 삶이 피폐 해졌다. 중국이 33년동안 티베트를 집권하며 죽인 사람들의 숫자는 1천 2백만 명이 넘으며, 1950년 중국이 장악하기 전까지 히말라야 산맥에는 7,000개가 넘 는 수도원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6개 밖에 남지 않았다.

물론 위의 잔악한 결과가 진화론에서만 비롯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들 사고 안에 자리잡은 진화론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 다. 앞선 칼럼에서 다룬 것처럼 공산주의의 당위성을 위해 역사는 난폭한 계급 투쟁(거의 인종적 투쟁)이며, 개인은 자신의 집단에 엄중하게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과, 적들을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는 것, 역사의 세력은 옳고 투쟁한 사람들에게 승리를 반드시 보장한다는 것을 중국 인민들에게 각인시켜야 했기 때 문이다.
진화론의 영향은 단지 공산주의자에게만 있던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를 지지 했던 초기 지도자들도 진화론적 점진주의를 강조하여 “진화 법칙”에 따른 목표 가 달성될 경우 중국의 방향성과 안전성이 제공될 것으로 믿었다. 이런 모든 것들이 한때 진화론으로 인해 역사를 보는 안목의 근본적 변화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파악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설문에 따르면, 오늘날 중국인들 중에 진화론 을 믿는 사람들은 74%인데, 다른 나라들보 다 아주 높은 퍼센트이다. 이는 중국인들이 여전히 진화론적 사고에 갇혀있다는 안타 까운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