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Do We Know Bible is True(II): Ch 6

Categories: 이충현의 번역글

복음을 변호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해야 하는가?

성경은 오늘날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장의, 에덴 동산에서 사탄의 영향을 받은 뱀이 이브에게 하나님의 명령에 의문을 품게 한 이후로 계속된 공격을 받아 왔습니다(“Has God indeed said…?”). 우리는 이것을 “창세기 3장 공격”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세대에서, 무엇이 주된 창세기 3장 공격입니까? 우리는 그것이 창세기 1장 – 11장의 역사성을 공격하고, 따라서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진화론과 오래된 연대의 가르침이라고 믿습니다. 첫번째는 이러한 공격과 그로 인한 결과를 인식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어떻게 그것에 대처할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역대상 12:32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 명이니 그들은 그 모든 형제를 통솔하는 자이며…

기독교인들은 교회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깨닫기 위하여, 우리가 사는 시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심지어 기독교인들이라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성경에 관한 많은 거짓 주장들(특별히 성경의 첫 11장의 역사성에 관하여)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아이들이 세상에 대한 그 어떤 답변도 갖지 못한 채, 믿음을 버리는 것들을 봅니다.

설문 조사에 따르면, 세명 중 두명의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며, 연구 결과는 명백하게 이것이 성경의 가장 첫번째 책에 관한 타협된 가르침 때문에 생긴 의심과 불신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슬프게도, 많은 교회들은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경의 권위가 한 세대에서 사라지는 끔찍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어떠한 일을 해야 할 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베드로전서 3:15).

이제 성경을 훼손하고, 교회로부터 다음 세대를 빼앗아가는데 크게 기여한 이러한 공격에 대하여 답변할 때이며, 다음 세대에게, 우리가 사는 현대 과학 시대에 비평가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방법을 알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시작할 때입니다. 교회는 오는 세대와 문화의 영적 상태에 엄청나게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 이러한 공격에 대하여 반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시작한 전문적 연구는, 교회는 모든 연령 층에게 복음을 변호하는 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 줍니다.

복음을 변호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의 목적은 무엇인가?

베드로전서 3:15절에서 “변호하다” 혹은 “대답하다”라고 번역된 구절은 그리스어, apologia 로부터 왔고, 문자적 의미는 “이성적인 변호” 입니다. 그것은 이러한 기독교의 요지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로 오해하는 것처럼, 사과하라 (apologize) 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 믿음에 대한 논리적인 변호를 하라는 뜻입니다.

변증학 (Apologetics)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기독교 전체를 변호하며, 또한 성경을 모든 다른 세계관과 반대되는 사상 및 종교에 대항하는 공격 무기로써 사용하는, 기독교의 한 분과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일반적 성경 변증학을 가르칠 뿐 아니라, 창조 변증학 (진화론과/ 몇백만년의 연대에 관한 주제를 다루는)을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변증학은 당신의 믿음을 강하게 하고, 기독교를 변호하며, 공격하는 불신자의 입을 닫도록 도와 주는 흥미 진진한 학문 영역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변증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만드는 도구는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난다”(로마서 10:17)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변증학은 사람들의 비평적인 질문에 답변하는 것을 돕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으로 향하게 하도록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의 역사가 진실이며, 그것이 또한 진실된 역사에 기반한 복음이 진실이라는 이유에 대하여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공격당할 때, 두개의 기본적인 활용 가능한 방어가 존재합니다: 변호하는 것, 그리고 무장해제 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질적으로 기독교 변증학의 기본입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비유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한 미친 사람이 당신에게 칼을 들고 와서 내리치려고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당신은 그 사람이 공격할 때마다, 그것을 막거나, 피함으로써 당신을 방어할 수 있습니다. 혹은 당신은 그의 손에서 칼을 빼앗음으로 당신의 적을 무장해제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위의 상황을 기독교 믿음의 변호에 관련된 상황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당신은 질문에 답변함으로써 변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당신은, 그들이 그들의 세계관에 관하여 잘못된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그들의 공격의 기반을 공격함으로써 그들의 논쟁을 무장해제 할 수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듯, 부드러움과 존중하는 마음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기독교계에서 많은 다른 변증학적 접근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이 다 올바른 접근법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당신이 올바른 것을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은 주요 접근법에 대한 간단한 설명입니다.

  • Classical: 본질적으로 이 방법은 이성적 생각이 철학적 논쟁에 있어서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가정합니다. 논쟁과 함께 증거가 사용됩니다 – 그러나 모든 증거는 해석되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방법은 성경의 진실성을 가리키기 위하여 이성적 생각을 최우선시 하는 것입니다).
  • Evidential: 본질적으로 이 방법은 이성적 사고가 절대적인 기준이며, 사람들이 증거를 살펴볼 때, 그들은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실성을 가리키기 위하여 증거를 우선시함). 이 방법은 모든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중립적”이라는 것을 가정하는 방법이며, 성경이 인간의 상태에 관하여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반대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Presuppositional:

밴 틸만; 하나님과 그의 말씀은 도덕성, 논리, 자연의 균일성, 존엄성과 같은 것들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관의 유일한 기반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다른 세계관은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성경의 개념을 빌려와야 합니다. (즉 성경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다음은 몇몇 인기 있는 semi-presuppostional 방법들입니다.

  • Clarkian: 가장 훌륭한 세계관은 가장 논리적인 세계관이며, 기독교가 그 논리에 있어서 가장 일관적이라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가장 좋은 세계관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 Shaeferian: 가장 뛰어난 세계관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좋은 해답을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좋은 대답을 제시하며, 따라서 기독교가 가장 좋은 세계관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 Carnellian: 가장 뛰어난 세계관은 가장 일관성 있는 세계관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그 내부적 문서들에 있어서 가장 일관성 있으며, 따라서 기독교가 가장 좋은 세계관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위의 방법들은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믿음을 변호하기 위하여 다른 스타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자연스럽게, 어떤 것은 다른 것들보다 더 효과적입니다. Answers in Genesis 의 관점은 presupposiional 변증법의 중심에 있어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능력을 갖는 올바른 기반을 갖기 위하여, 세계관을 세우는 데 있어서 성경을 모든 영역의 최종 권위로 사용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변증학 자료들에서 사용한 대략의 변증법적 스타일입니다.

성경의 변증학

성경은 베드로전서 3:15에서 우리에게 믿음에 대한 이성적인 변호를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베드로는 또한 먼저 그리스도를 당신의 마음의 주로 삼고, 이것을 온유함과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할 것을 분명히 합니다.

너무나도 자주, 기독교인들은 단 몇가지의 답변만을 얻은후, 그들은 이러한 답변을 사람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상대방을 이길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신, 이것은 온유함과 존중하는 마음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것과 똑같은 자비와, 긍휼 그리고 사랑을 보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왜 변증법은 항상 복음과 함께 사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18-20); 다시 말하면, 논쟁에서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변증법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하십시오.

연관된 다른 구절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고린도후서 10:5-6).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디모데전서 6:3-5).

더우기 하나님에 관한 것들에 대하여 논의할 때,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많은 변증가들은 다년간, (고쳐지기를 거부하는) 한사람과 논쟁하는 데 걸려 있습니다. 성경은 이 주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디도서 3:9-11).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마태복음 7:6).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누가복음 9:5).

만약 사람들이 배울 의지를 보이지 않고, 도전받고 그들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고려조차 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계속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다른 들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보다 큰 선교의 열매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전서 3:15에 근거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기독교 믿음에 대적하여 논쟁하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답변할 것을 명령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본문을 면밀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항상 변호할 준비가 되어 있으라 (always be prepared to make a defense)”

먼저, 베드로전서 3:15는 항상 답변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항상 답변을 할 준비가 되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삼가해야 할 때가 잇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듣지 못할 때 (베드로후서 2:3), 그들이 교훈을 받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 명백하다고 당신이 분별할 수 있을 때(잠언 1:7), 혹은 그들의 목적이 분열하는 데 있을 때 (로마서 16:17), 그때는 지나쳐야 할 때입니다.

실용적인 변증학

믿음을 변호할 때, 변증가에게 큰 도움이 될 몇몇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첫번째, 기독교적 세계관을 성경의 처음부터 제시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15, 잠언 26:4). 이것은 다음의 것을 포함하지만, 꼭 이것에 제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1. 창조 주간은 일반적은 24시간의 하루로 이루어진 6일이었습니다. 어떻게 누군가가 성경의 권위 위에 서 있으면서 성경의 역사에 대하여 의심하겠습니까? 만약 창세기가 진실이 아니라면, 성경의 나머지 부분이 진실일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2.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단지 몇백만년에 걸친 무작위적 화학 작용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따라서 사람은 단지 동물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에는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일반적인 세계관은, 진화와 몇백만년의 연대, 그리고 당신은 아무런 내재적 가치를 갖지 않은 동물일 뿐이라는 인간의 믿음에 근거한, 세속적 인본주의입니다).
  3. 하나님은 죽음이 없던 완벽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죄악이 죽음을 불러 왔고, 이 완벽한 세상을 타락시켰습니다. 성경은 죽음을 “적”이라고 묘사합니다. 인류의 타락은 이 세상의 죽음과 고통, 그리고 구원자의 필요와 새하늘과 새땅의 필요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4. 화석을 포함한 대부분의 퇴적암층을 설명할 수 있는 대홍수, 그리고 또한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시지만, 구원의 도구를 보내신다는 것.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5. 우리가 모두 하나의 인종(race)이고 , 모두 죄인이며, 한 구원자를 필요로 하지만, 왜 다른 언어를 쓰며, 서로 조금씩 다른지에 대한 이해를 도와 주는 바벨탑.
  6. 아담 때로부터 내려온, 죄악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해 주는 모세5경과 모세법.
  7. 우리의 죄악을 인해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 죄값을 치르시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을 믿는이들에게 구원의 선물을 공짜로 제공하는, 예수님과 십자가 상에서 그가 이루신 일.
  8.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시기 위한 새 하늘과 새 땅. (그리스도인들은 죽음과 고통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때를 기대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기독교 세계관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제시할 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믿음에 대한 오해를 제거해 주는 것을 수반합니다.

  1. 하나님은 삼위이, 한분 하나님이시지, 세 명의 다른 “신들”이 아닙니다.
  2. 기독교는 실수하기 쉬운 인간의 말이 아닌, 성경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 말하는 이들이 잘 알려진 그리스도인이라도 말입니다.
  3. 하나님은 이 세상을, 오늘날 우리가 보는 대로가 아닌, 완벽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죽음과 오염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31, 신명기 32:4, 창세기 3, 로마서 8). 죽음과 고통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완벽한 하나님이자, 완벽한 인간이신 예수그리스도로서 역사가운데 들어오셔서, 우리의 자리에서 돌아가시고, 우리를 우리의 죄악과 죽음으로부터 구해 주셨습니다.

둘째, 죄로인해 저주받고, 망가진 세상에서, 믿음을 변호할 때, 불신자가 생각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이것은 그들의 잘못된 출발점으로 인한 그들의 잘못된 세계관을 논박할 수 있게 해 주기 위하여 중요합니다. (에베소서 4:17-18, 고린도전서 1:21,2:14, 3:19, 골로새서 2:8, 로마서 1:18-28 등). 때가 올 때, 우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세계관을 친절하게 논박할 수 있기 위하여 다른 그들의 세계관에 대하여 최대한 많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기독교 변증가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관에 대한 내부적 비평을 해야 합니다 (잠언 26:5, 디모데후서 2:25). 어디에서 그들이 임의적이고, 비일관적인지를, 그들의 세계관의 궁극적 결론이 어디로 이끌고 가는지, 그리고 그들이 성경으로부터 빌린 개념들에 대하여 지적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우리의 변증에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 주어야 하며, 복음을 제시해야만 합니다. 많은 경우, 이것은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할 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변증에 있어서 복음이 맨 처음이며, 가장 중심임을 확실히 하십시오.

Presuppositional Apologetics (Van Til)이란 무엇인가?

밴 틸의 전제적 변증학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모든 영역에서 최고의 권위로 삼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성경에서 모든 다른 세계관이 틀렸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그들이 깨닫고 있던 그렇지 않던, 다른 모든 세계관들은 일관적이지 않으며, 결국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성경으로부터 빌린 개념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유신론은 임의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관적이며 지식 획등을 위한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논리적이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 다른 세계관들은 임의적이고, 비일관적이며,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전제적 변증가는, 어느 부분에서 그들이 임의적이며, 비일관적인지를 보임으로써, 그리고 어디에서 그들이 지식을 가능케하는 전제를 가지고 있지 않은지를 보임으로써, 불신자의 세계관에 대한 내부적 비평을 할 수 있습니다.

전제적 변증학은 거짓된 세계관을 직면하여 “그것에 대적하는”(물론, 겸손한 방식으로), 잘 알려진 방법입니다. 다른말로 하면, 변증가는 세속적 인본주의, 무신론, 힌두교, 이슬람교 등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세계관을 변호하도록 만듦으로써, 그들이 그들 자신의 세계관의 내적인 비일관적인 문제를 보일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어디에서 다른 종교들이 세상을 이해하려는 체계를 세울 때, 성경의 개념을 빌려오는지를 명백하게 지적합니다.

예를 들면, 2007년 5월 창조 박물관을 열었을 때, 무신론자들은 “너는 거짓말하지 말지어다 (Thou shalt not lie.”) 라고 쓴, 큰 배너를 달고 박물관 상공을 배회하는 비행기를 고용함으로써, 박물관 개장에 항의했습니다. 무신론적 세계관 하에서, 그들은 거짓말을 해야할 그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위의 말을 하기 위하여, 기독교적 세계관으로부터 개념을 빌려야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절대적인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무신론자들은 창조박물관이 잘못된 것 (성경 역사)을 가르친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절대적 선과 악은,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정의하시는, 성경의 하나님이라는, 절대적인 권위가 존재하기에 가능합니다. 무신론자들은 그들의 주관적인 의견 이외에, 선과 악을 결정하는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단지 동물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들은 거의 대부분 옷을 입고 있습니다. 동물들이 옷을 입습니까?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단지 동물들이라는 것에 대한 일관적 주장을 하는 대신, 그들은 우리의 죄악과 수치로 인하여 옷을 입는다는 창세기 3장의 문자적 해석을 빌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 이후, 아담과 이브에게 의복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것은 많은 다른 것들에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왜 한주에 7일을 가지고 있습니까? – 성경. 어째서 논리와 이성적 사고가 존재합니까 – 성경. 어째서 결혼이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식이라고 규정됩니까? – 성경.

이러한 리스트는 몇시간째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의 세계관에서, 그들은 이러한 것들에 대한 궁극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불신자의 세계관에 어떠한 문제점이 있는지 살펴볼 목록들입니다:

  1. 그것이 궁극적인 기반을 갖지 않은, 임의적 편견인가 – 순수한 의견, 상대주의, 순수한 추측 (선입관에 근거한)?
  2. 그것은 비일관적인가 (논리적 오류,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내용과 맞지 않는 행동, 그들의 가정들이 딱 들어맞지 않음)?
  3. 지식의 전제조건을 범하는가 (그들의 논리, 우주의 일관성, 도덕성 등에 대한 궁극적인 기반이 있는가)?
  4. 그들의 관점이 결국 우스꽝스럽게 환원되는가 (그것이 궁극적 결론으로 다가갈 때, 비일관적으로 되는가)?

어떤 이들은 비기독교인들도 성경이 진리임을 믿지 않지만, 그들은 논리적이고, 도덕성을 주장하며, 뛰어난 기술을 이룩하는 훌륭한 과학 연구를 한다고 주장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논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논점은 그들이 그러한 것들을 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그들이 하는 것들에 대한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위에 열거한 그들의 활동들에 대한 실재적 이해를 위하여, 성경의 개념을 (무의식중에) 빌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이 인정하던 그렇지 않던, 그러한 것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성경이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전제적 관점들의 단점

밴 틸리언 방법 이위에 다른 전제적 방법들이 지난 세월동안 제시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많은 영역에서 밴 틸리언의 전제적 변증학과 잘 맞물리고, 토론에 있어서 훌륭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전체적인 요지의 강점을 감소시키는, 대단히 중요한 결점들이 있습니다.

Clarkian: 고든 클락은 본질적으로, 가장 훌륭한 세계관은 가장 논리적인 것이며, 기독교가 그 논리에 있어 가장 일관적이기 때문에, 기독교가 가장 훌륭한 것처럼 보인다고 이야기합니다.

Schaefferian: 프란시스 쉐퍼는 본질적으로, 가장 훌륭한 세계관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대답을 줄 것이며, 기독교가 인생에 대한 가장 훌륭한 답변을 주기 때문에, 기독교가 가장 훌륭한 것처럼 보인다고 이야기합니다.

Carnellian: 에드워드 J. 카넬은 본질적으로, 가장 훌륭한 세계관은 가장 일관성 있는 것이며, 기독교는 그 내부적 문서를 통하여 볼 때, 가장 일관적이기 때문에, 기독교가 가장 훌륭한 것처럼 보인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비슷한 다른 다양한 방법들도 존재하지만, 이 짧은 장에서 모두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클락의 견해 (가장 인기가 있는)는 본질적으로 evidential/classical 방법과 비슷합니다. 특정한 곳에서 그는 전제적 접근을 훌륭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그의 전체적인 관점은 전형적인 전제적 관점에 미치지 못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클락은 결국 인간의 자율적 이성(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시되는 절대적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로 치우칩니다.

카넬은 실재로 밴 틸의 전제적 변증법으로 시작을 하고 나서, 일관성에 대하여 평가함에 있어서 자율적인 인간의 이성에 기반하는 견해로 움직입니다. 쉐퍼의 궁극적인 변증법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인간의 권위에 호소함으로써, 결국은비슷합니다.

더우기, 위의 각각의 견해의 문제는, “가장 훌륭한(best)” 이라는 것을 결정하는 기준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자율적 인간의 이성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이러한 방법들은 실재로 전제적 변증법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소위 전제적” 관점은 결국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그들의 주장을 하기 위하여, 성경의 궁극적인 기준에 관련하여, 지식이 가능함에 대한 전제조건 위에 설 필요가 있기 때문에 사실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위의 모든 다른 방법들은 태생적으로 밴틸의 기반을 채용해야 하며, 그들의 주장과 올바로 연결시키는 데 실패합니다. 성경이 절대적 진리라는 것에 기반해 있는 기독교 유신론이 지식 자체를 가능하게 해 주는,  그들이 빌려야 하는 개념입니다.

위에 다른 견해들은 모두 궁극적으로, 적대적 기준이신 하나님이 아닌, 실수하기 쉬운 인간의 논리를 절대적인 기준으로써 의지합니다. 더우기, 각각의 견해가 결국 제안하는 것은, 이러한 견해들이 결과적으로 누군가 성경이 진리라는 사실을 알수 있도록 하거나, 하나님이 존재하시다는 것을 확실하다는 것, 혹은 그 자신의 구원에 관하여 확신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거짓-전제적 견해입니다. 본질적으로 위의 견해들의 입장은 “현재 존재하는 가장 좋은 세계관”, “지금까지 가장 일관적인 듯 보이는 세계관” 그리고 “인생에 있어서 현재 가능한 가장 좋은 해답을 제공하는 세계관” 이라고 할 수 있지만, 틀릴 수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위의 소위 전제적 견해는 성경은 아마도 사실이다, 혹은 아마도 가장 좋은 것이다라고 할 수 있지만, 100%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라고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흥미스럽게도, 성경은 우리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한1서 2:5).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한1서 5:13).

중립성 vs. 공통되는 기반

당신이 어떤 주제에 관하여 토론할 때, 누군가가 “성경은 제외하고 이야기합시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 보셨나요? 아마도 그들은 실재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주제에 관하여 토론합시다. 그러나 저는 성경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중립 지대에서 토론할 수 있도록, 당신은 그것보다 더 나은 원천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성경을 버리고, 소위 ”종교적인 편견” 없이, 어떤 주제에 관하여 “문명화된”논의를 하게 하려는 미묘한 전략입니다. – 다른 말로 하면, 소위 “중립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중립지대라고는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마음은 악하며,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거나, 대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8:21, 예레미야 17:9).

그들이 미묘하게 말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최종적 권위로 삼는 것을 포기하고, 인간이 최종적 권위, 혹은 출발점이 되는 그들의 기준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당신이 세속주의자와 같이 행동하게 하려는 것이고,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하면, 당신은 이미 논쟁에서 진 것입니다.

다음의 비유를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코카인을 흡입하는 한 사람을 봅니다. 변증가로서, 당신은 그 사람에게 불법마약 사용과 관련된 중독의 문제에 관하여 알려주고 싶습니다(고린도전서 6:12). 그리고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 당신은 저와 함께 코카인을 흡입해야 합니다.” 당신은 그렇게 할까요? 물론 아닙니다 – 당신은 성경의 권위에 근거한 도덕성을 포기하고, 그들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어떤 다른 영역에 있어서 성경의 권위를 포기하고 그들의 것을 신뢰하겠습니까?

논쟁에 있어서 중립지대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제시하는 사람들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중립지대라는 것은 없습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마태복음 12:30).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로마서 8:7).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 (야고보서 4:4).

우리는 소위 중립지대라는 곳에서 만나기 위하여 “성경을 포기하는” 덫에 걸리기 원치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기독교인, 특별히 오늘날의 세속주의자들은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당신으로 하여금 성경을 논쟁에서 제외하도록 하려고 하게 함으로 논쟁을 인간의 견해를 최종 권위로 사용함으로써 진행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경이 제외되면, 하나님은 제외되며, 그것은 자연스럽게 인간이 최종적 권위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을 포기하게 하고, 그것을 인간의 말을 출발점으로 삼는 그들의 것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그들은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공통되는 기반이 존재합니다. 불신자들은 거짓말하고 살인하는 등의 것들이 잘못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실재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성경의 개념을 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통되는 기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모두가 성경의 개념을 빌리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들은 실재로 이러한 것들을 토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독교적 출발점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변증가들은 이것을 알아차리고, 불신자들이 서 있는 기반을 흔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신뢰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성경적 기반 위로 올라서고, 그들의 출발점을 바꾸게 하시도록 기도합니다 (이것은 그들 마음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죄를 생각나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입니다). 실제로, 명백하게 기독교적 출발점(성경)으로부터 빌려야 하는 이러한 논의에서, 먄약 그들이 성경을 공격한다면, 그들은 실질적으로 그들 자신의 기반을 공격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 그들이 그것을 깨닫던 그렇지 않던 말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은 스스로 논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통적인 기반에서 만날 때, 우리는 불신자들이 실재로 빌려온 기반 – 하나님의 기반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Classical and Evidential 변증법의 올바른 측면

많은 사람들이 이미 classical 과 evidential 변증법이 비슷하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고, 그것은 옳습니다. Evidential 변증법은 실재로 classical 변증법의 현대적인 형태입니다. 사실, 많은 classical 변증가들은 특정 논의에 있어서evidential 사고에 호소하고, 그 반대 역시 사실입니다. 우리는 classical  그리고 evidential 변증가들은 실재로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관점(지구가 몇십억년이라고 하는 믿음과 같은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자주 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이성에 대하여 엄청난 신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완벽한 세상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classical 과 evidential 방법들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완벽한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설명하자면, 완벽한 세상에서는, 누구나 논리를 올바르게 사용할 것입니다! 완벽한 세상에서는, 누구나 증거를 올바른 방식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죄로인하여 부서지고 뒤틀린 세상에서, 논리와 증거는 올바르게 사용되거나 관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로 때문에 타락한 인간의 상태로 인하여 야기된 거짓된 세계관들과, 그러한 거짓된 세계관들이 우리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다음을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우주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공룡의 뼈, 같은 DNA, 같은 지층, 같은 대륙 등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증거를 그들 얼굴 앞에 내 놓더라도, 그들은 그것을 믿을만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증거 그 자체는 사람들을 믿게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6:31, 요한복음 6:65, 고린도전서 12:3) 심지어 예수님이 부활의 증거로써 그의 육신을 보이실 때에도, 그는 그 증거와 함께 권위있는 말씀을 제시하셨습니다.(누가복음 24:36-41). 슬프게도, 어떤 사람들은 그럼에도 믿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24:41).

이제 classical 방법의 기반을 살펴보십시오. 누구다 다 같은 논리와 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모두가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아직 그리스도께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뒤틀린 세상에서, 이러한 이론적 방법들은, 인간의 죄악과, 인간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이 작동해야만 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 사람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논점은, 하나님 자신이 모든 영역에 있어서 최종적 권위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증거, 혹은 논리/이성 에 관하여 토론할 수 있기 이전에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Classical 그리고 evidential 방법들에서는, 논리가 절대적 기준이라는 가정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만약 논리가 최종적 기준이라면, 하나님은 아닌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evidential 과 classical 변증법은 (의도치 않게) 하나님이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또다른 절대적인 기준(논리의 체계)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Classical 과 evidential 변증가들은 하나님을 절대적인 권위로써 호소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올바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방법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절대적인 권위로써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동적으로, 인간의 생각 (자율적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 위에 권위로서 군림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방법을 아직 완전히 버리지 마십시오! Evidential 형태의 방법이 매우 효과적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논쟁을 하고 있는 양 측이 같은 성경적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을 때입니다.

양측이 모두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은 세계관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증거를 이해하는 것에 관한 문제입니다. 어떠한 과학적 증거에 관하여 논쟁이 생길 때, 양측이 모두 성경적 창조론자라면, 그 논쟁은 evidential 방법과 거의 동일하게 진행될 수 있습니다. 차이점은 성경이 최종적 권위를 갖고, 증거는 성경의 진실성에 관한 훌륭한 확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논문의 후반부에 증거에 관한 내용을 더 다루겠습니다.

같은 종류의 상황이 classical 방법에서도 생겨납니다. 양측이 같은 성경적 세계관을 공유할 때, 논쟁은 더이상 세계관에 관한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주장을 함으로써 classical 형태의 변증법의 관점으로 계속 진행될 수 있습니다. 차이점은,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유지하시는 방식을 반영하는 논리를 비롯한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고전적인 논쟁은, 실재로는 고전적 논쟁들 이전에 사실 전제된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초월적인 논쟁의 좋은 확증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초월적인 논쟁은 사실 presuppositional 변증법의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절대적인 권위로써 기초에 쌓은, classical 논쟁들은 우리가 기대하는 훌륭한 확증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아시고, 논리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성경이 우리가 논리를 사용할 수 있고 지식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원천적인 기반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1:27, 골로새서 2:3).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아십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의 기반 위에서만, 우리는 올바른 세계관을 세우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우리가 왜 실수하는지 설명하십니다 – 죄악 (창세기3, 로마서 5). 우리의 기억과 감각이 신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욥기 38-41) 과 이 세상이 특정한 방식으로 유지될 것이라는 것(창세기 8:22)을 이해하도록 해 주는 것도 성경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보를 관찰할 수 있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최종적 권위로써의 성경의 진실성 위에 예측되는 것입니다.

증거의 사용

우리는 전제적 변증가들은 증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거짓된 선입관과 자주 직변합니다. 이것은 사실과 매우 다릅니다. 이것은 “신앙주의” (종교는 이성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만 파악된다는 입장. 증거, 논쟁, 혹은 성경을 사용할 필요 없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신다고 믿는 것)에 가까운 철학입니다.

전제적 변증가들은 증거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evidential 혹은 classical 변증가들이 사용하는 방식과는 조금 다르게 사용합니다. 그들이 증거를 사용하는 예들은 :

  • 성경적 세계관을 확증하는 것
  • 세계관을 소개하는 것
  • 잘못된 세계관의 불일치성과 임의성을 보이는 것
  • 불신자들에게 성경을 이용해야만 증거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

위에 소개한 각각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을 확증하는

우리는 자주 성경의 진실성을 확증하는 증거들을 마주합니다. 한 훌륭한 예는 노아의 대홍수입니다. 우리가 온 세상을 덮은 퇴적층과 그 안의 화석을 볼 때, 그것은 전 지구적 대홍수의 결과로써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좋은 확증입니다. 우리는 불신자들과 기독교적 세계관에 관하여 논의 할 때, 이러한 증거를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른 출발점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세계관을 소개하는

불신자들과 성경적 기독교인들이 토론을 할 때, 증거가 자주 사용됩니다. 이것은 좋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 변증가는 불신자가 그 논쟁은 사실 증거 그 자체가 아닌 세계관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기원에 관한 증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불신자로 하여금 논쟁은 사실 두개의 다른 세계관이 서 있는 기반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할 수 있습니다. 실제적 논쟁은 출발점의 차이로 인하여 비롯되는 것입니다.

거짓 세계관의 불일치와 임의을 보여주는

증거가 불신자의 세계관 내에서 좋은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은 증거를 매우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세속주의적 인본주의적 세계관은 공룡이 몇백만년의 세월을 거쳐 새로 진화했다고 가르칩니다.

최근에, 학자들은 공룡이 “진화하기 시작”할 무렵이라고 여겨지는 지층에서 깃털을 발견했습니다! 세속 학자들의 답변은, 그 깃털들은 깃털처럼 보이지만, 공룡이 아직 새로 진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진짜 깃털일리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의 철저한 불일치성을 볼 수 있길 바랍니다!  

불신자들에게 성경을 이용해야만 증거를 올바로 이해할 있다는 것을 보이는

증거는, 공룡 이전 지층에서 화석 깃털이 발견되는 것의 논리적인 기반이 성경의 지식과 논리 그리고 올바른 이성에 관한 진실성에 의하여 예측될 수 있다는 것을 불신자와 나누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성경이 진리가 아니라면 논리를 올바로 인식할 수 조차 없습니다. 성경으로부터 출발함으로써, 우리는 증거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정보를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갖을 수 있습니다.

결론

기독교 변증학에 관한 이 짧은 장은 단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합니다. 사실 이 장에서 대략 이야기한 것에 대하여 하나의 문집이 기록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바는, 여러분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기독교 변증학의 중요성을 배우며, 이 주제와, 우리가 어떻게 대답하고 “복음을 변호할지”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의 중요한 점들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을 복음과 성경의 권위를 위하여 하십시오. 그리고 이것을 온유함과 존중하는 마음으로 하십시오. 불신자들은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그들을 “사로잡은” 거짓 철학입니다 (디모데후서 2:24-26; 골로새서 2:8; 고린도후서 10:4-5). 불신자들은, 그들이 깨닫던 그렇지 않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당신의 친척이며, 구원받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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