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Do We Know Bible is True(II): Ch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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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연합그리고 지구의 나이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20-22)

누구나 지역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면, 그는 곧, 교회는 구원받은 죄인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받은 죄인들은 예수님이 돌아오셔서, 언젠가 그들도 그의 완벽한 형상으로 지음받게 될 때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요한 1서 3:2).

그날이 올 때까지, 믿는 사람들도 나머지 창조물들과 함께 신음합니다. 이러한 신음은, 기독교인들이 교회 내의 논쟁을 목격할 때 명확하게 보여집니다. 어떤 논쟁은 매우 필요합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신도들은 자문위원회, 신조, 혹은 신앙선서 등이 명백한 성경적 진리를 훼손하려는 사람들의 이단적인 관점을 다루기 위하여 일어났던 것을 목격해 왔습니다.

이러한 복음주의적 고백적 발언들은 인간적 오류투성이인 세상에서 교회와 성경적 교리들을 보호하는 데 도움을 줘 왔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저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굳게 서서, 그들 시대의 거짓 가르침에 대적한, 훌륭한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불행하게도, 어떤 때에는, 교회가, 카페트의 색깔, 의자의 사용, 예배시간, 음악의 스타일과 같은 것들로 싸우는 것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목사님들은 그들의 교회 내부의 연합에 관한 주제들에 대하여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의 몸으로써 일하는 지체중 하나인 것처럼 연기하고, 그가 인도하는 교회에 대하여 무관심한 목사님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더우기, 연합은, 성경이 직, 간접적으로 이 주제에 대하여 자주 말씀하시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만지는 주제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고 가르칩니다 (요한복음 13:34). 빌립보서를 마치며, 바울은 예수님을 위하여 두 사람이 잘 지낼 것을 권고합니다 (빌립보서 4:2). 그의 서신서는 연합에 관한 많은 호소를 담고 있습니다. 교회안의 연합은, 복음의 지상명령 중 하나입니다 (야고보서 5:9).

연합 그리고 진리

만약 기독교의 연합이 능력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중심해 있다면, 분명히 모든 교회의 구성원들은 다른 의견의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연합에 대한 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은 모든 믿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한, 구원에 기초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유다서 3).

유다가 이야기하고 있는 믿음은 전달되었거나, 전수된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연합되어 있는 믿음은, 이미 확립되었고 전수되어 온,  명제로 이루어진 객관적 진리입니다. 연합은 기독교인들이 그들 스스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닌,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성경에서 발견되는 명제로 이루어진 객관적 진리안으로 들어옴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연합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진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진리를 위하지 않고서는, 복음의 구원의 메세지를 포함한, 그 무엇도 정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진리의 기초적인 요소를 강하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에베소 교인들에게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온 오직 하나의 진리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할 수 있다고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에베소서 4:4-6).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은 몇몇 구분을 지을 수 있고, 그래야만 합니다. 성경은 기독교적 안목에 대한 자유가 존재하는 특정 의견의 불일치에 대한 자비로움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경우,  어떠한 교리가 기독교 신앙을 훼손하지 않을 때, 기독교인들은 복음을 위하여, 서로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을 요구받습니다.  그러나 심지어 이러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안내가 되십니다 (로마서 14:1-19).

기독교의 연합은 또한 구원에 필수적인 교리와, 복음을 근본적으로 지탱하는 교리들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의 권위에 관한 교리는 구원하는 주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직 성경을 통하여서만 복음의 메세지를 이해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의구심은, 복음의 진실성 바로 옆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적 권위는 기독교 연합에 있어서 사실 매우 중요하여야 합니다 (시편 11:3).

알 몰러 박사가 신학적 분류의 필요에 관하여 기록한 것이 이 주제에 관한 것입니다. 응급실의 의사가 문제의 경중에 따라 어떤 환자를 먼저 치료해야 하는지 평가하는 것처럼, 기독교인들도 진정한 복음과의 관련성에 있어서 어떠한 교리의 진정성에 관한 선별에 참여해야 합니다. 몰러 박사는 이러한 것들을 1등급, 그리고 2등급 교리로 등급을 매기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거룩한 성경의 진실성과 권위가 첫번째 등급의 교리로서 위치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써 확언하는 것 없이, 우리는 진리와 실수를 구분지을 그 어떠한 적절한 권위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어떠한가?

기독교인이 창세기 1장-11장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것은, 복음의 일관성을 이해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주제로서 영향을 끼칩니다. 창세기의 기초적인 중요성 때문에, 복음에 관한 모든 교리는 창세기의 역사적 기반의 조명하에서만 이해됩니다. 이것을 창세기를 첫번째 등급의 중요성을 갖게 합니다.

창세기의 첫번째 11 장의 역사를 오해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복음의 메세지의 실효성을 폄훼하거나, 그것을 의심하도록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역사의 매우 많은 부분이 우선적으로 복음의 필요성에 대하여 답변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가장 첫 세장을 읽을 때, 아래의 모든 복음과 연관된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 우리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 우리는 죽음이 죄의 형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실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 우리는 예수님이 육신적으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 우리는 이 세상이 최초의 창조된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신도들은, 창세기가 최초의 창조가 “매우 좋았다”고 묘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것을 경고하며, 첫번째 남 녀가 불순종하여, 반역한 인간의 상태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여인의 후손이 사단의 후손을 쳐부술 것이라는 약속을 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복음의 메세지 그 자체와 대단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로마서 5, 고린도전서 15), 창세기 첫 장들의 이러한 가장 기초적인 역사부터 신뢰할 수 없다면, 우리는 복음 그 자체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결국, 창세기와 복음의 기록 모두 같은 책- 성경 – 의 같은 역사의 부분인 것입니다.

창세기와 지구의 나이에 관한 주제는 또한 성경적 권위의 중심부를 강타하는 주제입니다. 성경은 창세기에서, 죽음과 질병, 피흘림과, 육식, 그리고 가시와 엉겅퀴는 아담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라는 것을 명백하게 드러냅니다 (창세기 1:29-30, 3:14-19).

아담과 이브의 창조 이전에 몇백만년의 세월이 있었다는 것을 허용한다면, 위에서 언급한 죄의 결과들이 죄가 그것들을 초래하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였다는 것이 됩니다. 만약, 하나님의 매우 좋은 창조가 이미 아담의 범죄 이전에 죄의 결과들을 포함하고 있었다면, 이것은 매우 좋은 창조와 그것을 말씀하신 하나님의 본성, 그리고 구원자의 필요에 대한 것을 의심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구의 나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복음 자체와 연결된, 성경의 권위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

그들의 연합이 가장 중요하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적을 것입니다. 만약 신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추구한다면,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계시하신 대로, 그가 누구이신지를 정의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구속주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장; 골로새서 1:15-20; 히브리서 1:3-13).

성경은, 예수님이 스스로 존재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인간의 몸을 입고, 그리고 창세기 1:1 부터 계시록 마지막 구절의 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셨다고 밝힙니다. 창조주 하나님, 전체 성경의 하나님 안에서 연합됨 없이, 하나님 안에서 연합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같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그가 길이요, 진리이자 생명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 14:6).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알고, 그것을 즐거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메세지의 중심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그것을 설교하는 많은 복음주의적 기독교 리더들이 한 방에서 서로 반갑게 인사하는 것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리를 드러내시는 분이자 창조주이신 것,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에 관해서 받아들이고 설교하는 것에 이르면, 그 연합은 부서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출중하게, 최고로 진실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라면, 진리를 향한 탐구는 인간의 철학을 뛰어넘은 그의 출중함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연합은 먼저 예수그리스도 자신 위에, 그리고 그의 말씀 위에 기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을 도와 주시는 것이지, 이 세상에 관한 인간의 이해가 우리에게 예수님이 그의 말씀에서 무엇을 의미하셨는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에 대한 탐구를 인간의 생각으로 시작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최고의 권위를 예수님으로부터 사람에게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에 헌신된 사람이 용인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을 요구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예수님을 성경 기록 전체(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진리의 계시자로서 인식함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연합과 의견의 일치

예수님 자신께서도 진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날, 그러나, “기독교 연합”의 가장 일반적인 정의들 중 하나는 하나님의 실수할 수 없으신 말씀의 진리 대신, 실수하기 쉬운 인간의 의견의 일치에 관한 것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그는 집단 내 의견의 일치를 진리로서 받아들이라는, 다양한 수준의 압박을 느낄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날의 학문적 집단에서는,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이러한 의견일치 중심의 관점을 받아들이라는 엄청난 압박이 가해집니다.

인간의 모든 말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 하에 면밀히 조사되고, 보여져야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들을 존경해야 하지만, 신자들은 그들이 오직 “성직자들”만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 개혁 이전의 시기와 비슷한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교수들의 생각이 최종권위를 갖는 말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연합이 의견의 일치를 통하여 온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장 고등학문적 수준으로부터 나온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매번 인간의 의견일치를 이깁니다.

이러한 중요한 주제에 관해 답변하는 통찰력의 중심 포인트는 요한복음에서 발견됩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11-19).

11절에서, 예수님은 삼위일체와 같은 제자들간의 연합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구하신 연합은 의견일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완벽하게 존재하는 연합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절대성입니다.

17절- 19절에서, 그는 제자들이 진리- 그의 진리- 가운데 지켜지도록 기도하십니다. 신자들의 연합은, 어떤 의견의 일치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됨은 지켜져야하는 것이지, 새로 세워져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과 구분되고,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의 진리안에 주장되어 있는 연합입니다.

창세기의 해석에 관한 분열이 하나님의 말씀 주위로 연합하려는 신실한 소망의 결과입니까, 아니면, 죄된 실수하기 쉬운 인간의 말 주위로 연합하려는 소망의 결과입니까(그들이 저명한 과학자나 신학자이건 간에)? 지나간 세월에, 영국의 리처드 백스터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실재로, 그 어떤 진리도 다른 진리와 비일관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두개의 어둠과 의심쩍은 점들이 함께 비교될 때, 어느 것을 거부할지를 아는 것은 힘듭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것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상태와 모순되는 것들, 사람, 혹은 어떤 원칙들도 붙들어서는 안됩니다.”

논리는 우리에게 어떤 것이 같은 시각에, 같은 감으로 함께 진리이며 거짓일 수 없다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진리는 항상 그 자신과 일관됩니다. 연합을 위하여, 이 논리는 특별히 하나님과 사람의 상태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순전하시며 완벽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러나,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했습니다” (예레미아 17:9).

하나님과 사람의 상태 모두와 일관된 유일한 진리는 창세기에 있는 역사적 기술의 문자적인 해석입니다. 이것은 몇가지 이유로 인해 명백합니다. 창세기는 매우 좋은 창조가, 죽음과, 질병, 고통, 멸종, 그리고 다른 자연적인 악으로 인하여 오염된 것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성경과 일관적으로 연결됩니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라 칭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가 좋았다고 설명하십니다. 따라서, 악과 죽음은 인간의 시작에서 한 부분을 차지할 수 없으며, 이러한 것들을 인간의 시작에 첨가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하는 진실과 모순됩니다.

죽음과, 가시, 육식, 저주받은 땅, 신음하는 물질 세계, 그리고 영원한 심판은 죄의 결과이며, 예수님께서 그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러 오실 때, 창조세계로부터 제거될 것입니다(로마서 8:19-25; 요한계시록 22:3). 이러한 것들은 타락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하는 것만이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죽으셨고, 인간의 죄악의 결과를 이기시며 부활하셨다는 진리와 일관적입니다. 나중에, 성경은 사람은 본질적으로 악하며, 죽을 수밖에 없으며, 죄로인한 심판과 직면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에게서 보이는 진실과 연관되며, 논리상 그 어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수할 수 없고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진리가운데 있는 이 세상을 이해하는 유일한 일관적인 출발점입니다. 창세기의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적 정확성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진리로부터 멀어지고, 우리에게 전해 주신 그리스도의 객관적 명제적 진리 가운데 연함함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지구의 나이에 관한 주제에 관하여 연합을 유지함

진리는 성경적 연합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반에 걸쳐 메아리쳐지고 강조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4:11-13을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성경의 진리의 기반 위에 이미 존재하는 기독교인들의 연합을 사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하는 것이 교회 리더들의 의무입니다. 이 기반은 기독교인들이 자라나는 것과 교회의 리더쉽에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교회는 종종, 오늘날 이러한 종류의 연합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는 분열을 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연합하기 위한 분열입니까? 아니면, 그것이 사람의 말 위에 연합하기 위한 분열입니까?

슬프게도, 창세기에 관하여 보여지는 분열은 실제로 많은 기독교인 학자들의,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리에 반대되는, 인간의 말에 관한 연합 때문입니다(로마서 16:17). 이것은 또한 교회에 있어서 문제이며 –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유혹받고, 결국 자신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결정해 버린, 창세기 3장 이래 문제가 되어 왔습니다.

에베소서 4:14 는 매우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의 충만함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연합은 단지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안에만 있는 것이 아닌, 그 진리에 헌신되었고, 사람들에 의해 다르게 유혹받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8에서, 그들 가운데 강력한 연합을 지키기를 원하는 바울은 새로 설립된 교회에 비슷한 경고를 합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몇백만년의 연대와 진화론 모두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가르침들이 하나님의 말씀 전반과 일관적으로 맞아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몇백만년이라는 인간의 생각이 창세기 1장으로 침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비난받습니다. 이러한 오래된 지구를 믿는 믿음이 바로 “사람의 전통을 따른,  철학과 “헛된 속임수”입니다. 교회는 이것에 대하여 경각심을 가지고 조심해야 하며, 인간의 철학과 타협하는 시도를 봉쇄해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가 진리를 지키고 연합을 유지하도록 격려하려고 편지를 썼습니다.

학문적 동의를 다루기

오늘날 사람들은, 만약 그들이 과학적 그리고/혹은 신학적으로 이미 확립된 동의에 수긍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지성인이 아니라고하는 사고를 믿도록 설득되어져 왔습니다. 성경의 진리로부터 시작하고, 현상과학의 논리적 법칙들을 사용하여 성경적 역사의 진실성을 확증해온 많은 과학자들과 전문가들은 이러한 개념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학문계에서, 전문가들을 권위자로 여기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떤 문제에 관하여, 학자의 말 주위의 연합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명백한 가르침에 기반하는 대신, “X” 교수 혹은 “Y” 박사를 따를 필요가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어떤 리더가 가진 위치와, 그가 가진 학위의 갯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 동의하느냐에 관계 없이, 우리의 연합은 사람이나, 그의 철학에 있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비록 그의 이름이 게바와 아볼로와 함께 언급되었지만,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람을 따르지 말라고 경고한 이유입니다 (고린도전서 3:21-23).

불행히도, 오늘날 회중들이 직면하는 두려운 문제는, 지구의 나이의 문제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학문을 추구하는 자유를 거부한다는 주장과 자주 연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함께, 기독교 대학을 포함하여, 일반 사람이 먼저 특정 영역의 전문가인 특정 학자의 철학적 접근을 익숙하게 알지 않고는 창세기를 이해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암시하는 많은 학자들이 있습니다.

창세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견해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들을 포함한, 존경받는 선생들과 전문가들이 쓴 고대 근동의 신화와 다양한 역사적, 철학적, 심지어 신학적 추구 등이 기독교 서점에서는 전시되고 판매되고 있습니다. 그들 중 다수는 실재로 창세기를 다른 이들과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고 있으며, 교회 안에서 커다란 혼란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너무나 자주, 그리고 너무나 쉽게 간가되는 성경의 교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명확함(perspicuity)의 교리 입니다. 명확함이라는 것은 선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리는 가장 뛰어난 학자들에게도 어려운 구절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성경 말씀은 일반적으로 명료하며, 아이들을 포함한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는 아버지들이 성경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라는 성경의 명령(신명기 6:1-9; 에베소서 6:4),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일반인을 위하여 구약과 신약을 다룬 방식에 의해서 암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서에서 11번,  “..라고 기록된 것을 읽지 않았느냐?” 라고 말씀하셨고, 30번 “기록되었으되..” 라고 말씀하신 뒤, 성경을 그 의미가 명백한 것처럼 인용하셨습니다.

명확함은 오늘날 공격받는 교리 중 하나입니다. 이 공격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로부터 나뉘게 하는 잠재성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논문을 쓴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성경과 독자적으로 인간적 지혜에 대한 학문적 추구를 하면서, 명백한 성경의 기초적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한, 파괴적인 현상입니다.

가장 큰 염려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보다, 이러한 사람들의 말을 더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하며, 경고한 것입니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11:3).

성경의 명확한에 대한 같은 공격이 종교 개혁때 마틴 루터가 싸웠던 이슈 중의 하나였습니다. 계속되는 수사법과 성경이 일반인은 가까이 할 수 없다고 하는 관습이, 결과적으로 성경 자체에 대한 무시를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한 속임수로, 사탄은 사람들이 거룩한 책을 읽지 못하게 했으며, 거룩한 성경이 경멸을 받도록 했습니다.”

성경은 성경의 명확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1. 모든 기독교인들은 구분 없이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7:11; 디모데후서 3:15).
  2. 명확성은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 명료성 내에서 성경의 깊이를 가르쳐 줄 목사님이나 선생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4:11-13).
  3. 성경 자신은 그가 명확성을 가지고 있다고 확언하십니다 (베드로후서 1:19).
  4. 성경의 많은 명령들은, 그것이 모든 신도들에 의해서 이해되고 복종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5. 명확성은 모든것이 동일하게 명료하거나 이해하기 쉽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논점의 좋은 예는 삼위 일체의 교리입니다. 성경으로부터, 하나님은 한분이시며, 성부하나님도 하나님이고, 성자하나님도 하나님이고, 성령하나님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삼위 일체의 교리가 다른 교리들처럼 쉽거나 명백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성경에서 명백하게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역사적 기록은 명백한 역사적 기록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의 어리석음을 뛰어넘는 기록입니다. 그리고 이 기록의 문자적인 진실로 시작하여, 모든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이 세상의 현상 과학을 이용하여 이 기록의 역사성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좋은 학문의 표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명료성의 가정으로 출발하여, 그의 명백한 진리를 가지고, 전지하시다고 주장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명확성을 부인하고, 대신에 죄인인 인간의 실수하기 쉽고 거만한 생각을 포용하며 홍보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에 관하여 당을 짓는 행위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몇백만년이라는 연대와 진화를 수용하는 것이 교회 안의 분열이라는 문제를 가중시켰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금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를 돌아보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 안에만 존재하는 연합을 유지하는 데로 돌아오도록 헌신할 때입니다. 지금은 골로새서 2:8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신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와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인간의 철학에 관하여 눈을 떠야할 때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 대신 소위 위대한 사람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현상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1600년대 청교도 목사님들에 대하여 공부하며, 런던의 위대한 20세기의 목사님이신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는, 기독교 연합에 관하여 존 오웬이 쓴 많은 글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교회의 분열과 관련하여, 로이드 존스는 오웬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그가 계속해서 지적하듯이, 분열에 관한 질문 전체에 대한 문제는, 사람들이 그들이 속한 입장을 변호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닫았습니다;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고, 배우려 하지 않으며, 바뀌려 하지 않습니다.”

로이드 존스가 이해했던 것은, 오웬이 그의 시대에,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 안에 있는 진리에 따르는 대신, 그들 자신의 믿음을 강하게 붙잡으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이라고 불립니다.

오늘날 교회의 많은 분열의 뿌리는 교만에 있습니다. 성경적 진리에 관하여서조차 사람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의 연합을 구하고 기뻐하길 원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연합하려는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분열은 인간의 실수하기 쉬운 말에 의하여 성경을 재해석하도록 설득된 사람들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합으로의 부르심

우리의 끝맺는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의 메아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열이 있지 않고 연합이 있어서, 예수님이 기도하셨듯이, 우리가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기도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들이 예수님께서 창세기에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에 따르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분열되기 원한다면, 슬프게도 그들은 나뉠 것입니다 (로마서 16:17).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형제로 대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하는 반면, 우리는, 이 세상을 어리석게 보이게 하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붙잡고, 가르치며, 다른 이들에게 권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예수님, 창조의 예수님 그리고, 가장 첫 구절에서 마지막 구절까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예수님 안에서 진정으로 연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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