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Do We Know Bible is True(I): Ch 21

Categories: 이충현의 번역글

  우리는 성경 무오성을 믿어야 하는가? 

“당신은 정말로 성경이 진리라도 믿지 않습니다. 맞죠?” 누군가가 성경을 오류가 없는 책이라고 믿는 사람과 만난 사람들의 놀란 반응은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필연적으로, 그들의 다음 질문은 창세기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잘못이 없다”라고 할 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왜 우리는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요?

들이 마쉬거나 혹은 내쉬거나 (Inspiring or Expiring?)

우리가 성경을 “영감받았다”고 하는 것이, 우리를 잘못 이끌수도 있으므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것으로 시작해 봅시다. 그 용어는 신약에 단 한번 나온 단어를 번역하려는 시도이며, 윌리엄 틴데일이 1526년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가장 좋은 번역은 아닙니다. 그 단어는 디모데후서 3:16에 나타나며 그리스어로는 theopneustos 입니다. 이 단어는 두 단어의 합성어 입니다. 하나는 하나님(theos)라는 단어와 다른 하나는 숨쉬다 혹은 바람(pneustos)을 가리키는 단어 입니다. 이 단어가 디모데후서 3:16에서 수동태로 쓰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모든 성경 “속으로 숨을 쉬신것”이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에 의해 “내쉼을 당한” 것입니다. 따라서 디모데후서 3:16은 성경이 어떻게 우리에게 왔는지에 관한 것이 아닌, 성경이 어디에로부터 우리에게 왔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숨을 내쉼으로” 된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를 알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 감동 받음으로 말한 것”이라고 한, 베드로후서 1:21으로 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 쓰인 그리스어는 “맺다, 낳다 (to bear)” 혹은 “나르다(to carry)”를 의미하는phero 입니다. 바람에 의해서 이동되는 돛단배를 사용했던 누가에게 그것은 친숙한 단어였습니다(사도행전 27:15, 17). 성경을 기록한 인간 저자들은 분명히 그들의 생각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그들이 생각함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이 숨쉬신 말들만 기록되도록, 그들을 운반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2:13에서 이 문제를 간단하게 정리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영감받은(inspiration)”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기독교 언어속에 깊히 박혀 있고, 우리는 계속해서 그것을 사용할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정말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내 쉬셨고, 성령님께서는 인간 저자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저자(Author)와 많은 (약 40명) 글쓴이들(writers)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두가지 사역 – 그의 말씀을 내 쉬심, 그리고 인간 저자들을 성령님에 의해 운반하심 – 으로, 우리는 영감받았다는 것(inspiration)의 정의를 내릴 수 있게 됩니다.

성령님은 인간을 김동시켜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성령님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스타일과 문화, 은사 그리고 성격을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연구와 조사의 결과를 사용하게 허용하셨습니다. 같은 때에, 성령님은 실수나 오류가 그들이 기록할 때 영향을 끼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생각의 표현이나, 단어의 선택에 있어서 주권적으로 행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 저자들은, 하나님이 그들로하여금 말하기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그들 나름의 성격과 스타일 그리고 언어의 표현방식으로, 정확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의 영감받음이란, 하나님의 결점이 없고, 실수할 수 없는 말씀을 인간에게 주시기 위하여, 기록자들의 적극적인 생각과 성령님의 거룩한 인도하심이 조화된 것입니다.여기서 두가지 실수를 피해야 합니다. 첫째, 어떤 사람들은 영감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보통 영감받은 생각이나, 발명에 대해 이야기 할때처럼, 저자들에게 있어서 일반적으로 강조된 지혜의 민감함 이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둘째, 어떤 사람들은 작가가 단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말들을 단지 기계적으로 받아 적은 것이라고 믿습니다. 양쪽 모두 성령님과 인간 저자에 의해 적극적으로 행해진 역할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무오함이란 어떤 정도인가?

만일 “영감받았다”는 것이 정말로 “하나님이 숨쉬셨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디모데후서 3:16의 주장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이 숨결로 된 것으로, 오류가 없으며, 따라서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므로(히브리서6:18), 그가 만약 아주 작은 실수나 모순이라도 내쉬신다면 그는 하나님이시기를 중단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theopneustos 의 진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성경의 완벽한 무오함을 이해하는 데 그리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제한없는(plenary) 그리고 언어의(verbal)라는 두 단어가 성경적 무오함의 정도를 설명하는 데 가끔 사용됩니다: “Plenary”는 가득 찬 (full)을 의미하는 라틴어 plenus에서 왔고, 성경의 전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Verbal”은  단어(word)를 의미하는 라틴어 verbum 에서 왔고, 성경의 단어들조차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제한없는 언어의 영감은 모든 부분(교리, 역사, 지리, 날짜, 이름)과 모든 단어에 있어서,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따라서 오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무오성을 이야기할 때에, 우리는 성경의 최초 기록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 최초의 기록(“autographs”)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단지 각 책들의 많은 사본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각 사본마다 서로 다른 부분이 여기 저기 있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은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18세기의 한 신약 학자는 글자 천개당 하나보다 적은 글자가 이러한 차이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오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것이 의미하지 않는바가 무엇인지를 살펴 봅시다.

  • 무오성은 성경에 나온 모든 글들이 진실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의 기록 (여호수아 9)과 심지어 악마 그 자신의 말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정말로 일어났던 일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라는 것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습니다.
  • 무오성은 본문에 명백한 모순처럼 보이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견적 모순성은 해결될 수 있습니다. 때때로, 같은 사건처럼 보이는 것을 재언급할 때 다른 단어들이 사용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3:11은 세례요한이 메시아의 신발을 들다 라고 언급하는 반면, 요한복음 1:27은 그의 신발끈을 풀다라고 언급합니다. 요한은 어떠한 기간에 갈쳐 설교했고, 반복적으로 같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마치 설교자가 같은 것을 표현하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것 같이 말입니다.
  • 무오성은 성경의 현존하는 모든 필사본에 오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교리는 오직, 최초의 사본에만 적용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오성은, 몇몇 사람의 주장대로, 성경이 단지 “정당히 정확하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 어느 부분에서 그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확실성을 남겨 놓습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주장하는가?

존 골딩게이가 말한 대로, 이러한 무오성의 관점은, 예수님 자신 혹은 말씀 자체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일까요? 성경이 그 자신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는지 살펴 봅시다.

구약 저자들의 견해

구약의 저자들은 그들의 메세지가 하나님이 숨을 내쉬신 그리고 따라서 대단히 신뢰할만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마침내모세가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할 선지자(예수님) 을 보낼 것을 약속했습니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신명기 18:18). 예레미아는 그의 사역 초기에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예레미아 1:9).

선지자의 히브리어 단어는 “대변인”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선지자의 메세지는 하나님의 입장에 섰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주 그들 자신을 너무 하나님처럼 여긴 나머지, 마치 하나님 자신이 실재로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이사야서 5장은 이점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1절과 2절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을 3인칭으로서 이야기합니다(He). 그러나 3절과 6절에서 이사야는 1인칭으로서(I)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 왕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흠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 놀랄 일은 아닙니다( 사무엘하 22:31, 잠언 30:5).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과 동의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시편 2의 다윗의 말을, 단지 이스라엘의 왕의 의견이 아닌, 하나님의 음성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시편을 인용하며,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사도행전 4:25) 라고 소개했습니다.

비슷하게,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하나님 자신이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였습니다: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사도행전 28:25).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의 모든 말씀이 실재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확신하여서, 그들은그들이 인용한 구약 말씀이 하나님께로 직접 온 것처럼, “성경이 말씀하기를” 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두가지 예를 들자면, 로마서 9:17 에서,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와 갈라디아서 3:8에서 바울이,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라고 기록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장에서 인용된 많은 구약의 구절들은 사실 시편기자가 하나님께 이야기한 것이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어의 영감을 믿으셨다.

요한복음 10:34에서 예수님은 시편 82:6으로부터 인용하시고, 그의 가르침의 근거로 이 구절: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을 사용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이 시편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고 주장하신 것입니다. 비슷하게, 마태복음 22:31-32에서, 그는 출애굽기 3:6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43-44에서 우리 주님은 시편 110:1을 인용하시며, 다윗 왕이 이 글들을 “영 가운데”, 다시 말하면, 그는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바울은 언어의 영감을 믿었다.

바울은 구약에서 한 특수한 단어가 복수가 아닌 단수라는 사실을 그의 주장의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갈라디아인들에게 편지를 쓰며, 바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에서,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라디아서 3:16). 바울은 창세기 12:7, 13:15, 그리고 24:7을 인용했습니다. 각각의 구절에서, 번역가들은 “자손들(descendants)”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히브리 단어는 단수입니다. 그 같은 단어가 창세기 22:18에서는  “씨(seed)”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주장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게 아닌,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바울이 창세기의 히브리어 단어가 단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그가 언어의 영감을 믿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이 구약의 구절들에서 단수 혹은 복수형을 사용하셨는지가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유대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의 잇점 중의 하나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로마서 3:2)라고 기록한 것이 놀랄 일이 아닙니다. 성경의 많은 비평가들 조차 성경은 명백하게 언어의 영감에 관한 교리를 가르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스스로 증명함 (Self-authentication)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따라서 오류가 없는 것은 성경 자신이 이렇게 주장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순환논리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집니다. 그것은 마치, “그 죄수는 무죄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무죄라고 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에 관한 문제에서, 성경 자신의 주장에 호소하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는 매일 스스로 증명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우리가 “나는 생각하기를..” 혹은 “내가 믿기를..” 혹은 “나는 어떤 꿈을 꾸었는데..”라고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그 다른 누구도 확인할 수 없는 발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자신에 대한 증언은 언제나 충분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5:31-32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증언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복음 8:13) 라고 주장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요한복음 8:13)라고 이야기하며, 예수님이 틀리셨다고 지적하려고 했습니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주님께서는, 그 자신의 경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 신뢰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요한복음 8:14). 스스로 증언하는 것은 죄의 방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신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따라서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요한복음 8:46에서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에 의해 확증된 사실), 그의 말씀은 신뢰할 수 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우리는 성경 자신이 자신에게 대하여 말하는 것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의 많은 이야기들은,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절대로 알 수 없었을 것들입니다. 많은 과학 이론들은 이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제안합니다. 이들 중 어떤 것들은 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어떤 것들은 서로 모순됩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화길히 알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과학자들도 이 일이 일어났을 때, 그곳에서 관찰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계셨던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알리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성경의 위대한 교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우리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서, 그의 죄인에 대한 사랑에 대하여, 혹은 그의 백성을 선택하는 계획에 대하여, 확실할 수 있겠습니까? 4세기의 신학자, 포이티어스의 힐러리는, “하나님 한분만이 그 자신에 대한 정당한 증인이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사실보다 더 발전시킬 수 없습니다.

누가 이러한 것을 믿는가?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믿음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1세기의 로마의 대주교는, “성령님의 진정한 발언인, 성경을 면밀히 살펴 보십시오. 그 안에 위조되었거나 부당한 글이 전혀 없다는 것을 관찰하십시오.” 라고 기록했습니다. 1세기 후, 이레내우스는, “성경은, 하나님과 그의 영의 말씀에 에 의해 기록되었으므로, 진실로 완벽합니다” 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이것은 초기 교회 지도자들의견해였으며, 피드먼트 골짜기의 고대 보 사람들로부터 16세기 유럽의 개혁주의자들, 그리고 현대 까지 복음주의자들의 일관된 견해입니다. 그들 모두가 “실수 할 수 없는(infallibility)” 혹은 “무오성(inerrancy)” 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같은 견해를 표현하며, 그들이 그것을 믿는다는 데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새로운 견해를 취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자유주의자들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키르소프 레이크 교수는, “전통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사람들은 우리(자유주의자)이다” 라고 인정했습니다.

그것이 중요한가?

성경을 신뢰할 수 있는지 아닌지에 관한 논쟁이 단지 신학적인 사소한 불평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궁극적인 권위에 관한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 문제입니다.

무오성은 복음의 진실성에 관한 우리의 확신을 지배합니다.

만약 성경이 신뢰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신뢰할 수 있는 복음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만약 성경의 어디에라도 오류가 있다고 의심한다면, 어떻게 우리는 어떤 주제에 관한 진실성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을까요? 비행기의 기장은 가장 작은 부분이 잘못되었다는 의심이 있더라도 이륙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의 잘못이 전체 기계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경에 담겨 있는 역사가 잘못된 것이라면, 어떻게 우리는 교리와 도덕적인 가르침이 올바른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 메세지의 중심은 역사입니다. 성육신은 그리스도께서 처녀의 몸에서 나심으로 보여졌습니다. 대속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심으로 얻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친구가 될 수 있는 특권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얻어졌습니다. 만약 이러한 기록된 사건들이 진실이 아니라면, 그 배후의 신학적 메세지가 사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무오성은 예수님의 가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지배합니다.

우리는 믿을 만한 성경 없이 믿을 만한 구속자를 가질 수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제안하듯, 복음서의 이야기들이 역사적으로 사시이 아니고,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이 그저 때때로 그분의 말씀이라면, 어떻게 우리는 예수님에 관하여 어떤 부분을 신뢰할 수 있을 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혹은 그가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알기 위하여, 비평적인 학자들의 모순되는 주장들에 의지해야 하겠습니까? 만약 복음의 이야기들이 단지 2,3 세기 교회의 소망을 담은 것이거나, 혹은 복음서 저자들의 개인적 견해라면, 우리의 믿음은 더이상 예수님 위에 있는 것이 아닌, 인간의 견해 위에 놓이게 됩니다. 그 누가 그들의 구원에 관하여 신뢰할 수 없는 구원자를 신뢰하려고 하겠습니까?

무오성은 과학의 결론에 관한 우리의 답변을 지배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믿으면, 우리는 곧장 성경의 잘못을 증명하는 듯 보이는 과학 이론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과학의 결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정확성을 좌우하도록 허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무오성을 의심할 때, 우리는, 간편하게 역사를 시로, 그리고 사실을 신화로 변경시키는 것과 같이,  성경을 해석하는 새로운 원칙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은 어떤 구절을 볼 때, 그것이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를 물어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야, 그들은 그 구절로부터 무엇을 얻을지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성경의 무오성을 믿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과학의 이름으로 제시된 급조된 이론들을 성경에 비추어 검증할 것입니다.

무오성은 말씀을 설교함에 있어서 우리의 자세를 지배합니다.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는 것은 교단 및 교인들에게 말씀에 대한 확신을 잃도록 만듭니다. 교인들의 수가 감소하게 하는 것은, 교육 수준의 증가 및 과학도 아니고, 1,2차 세계대전도 아닙니다. 그 대신, 그것은 신학적 자유주의의 차가운 죽음 때문입니다. 만약 성경의 역사가 의심스럽고, 그 말씀이 논란의 여지를 남겨 놓는다면, 사람들이 그 말씀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권위를 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를 알기 원합니다.

무오성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지배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성경이, 어느 정도는,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계시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실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그의 영감을 잘못 다루셨고,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몇세기 동안, 근대적 학자들이 그 복잡한 문제를 풀기 전까지, 속도록 허용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어떤 물건을 만든 사람이, 그 설명서를 뒤죽박죽 만들어서 혼란스럽게 한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없는 교회는, 이빨없는 악어와 같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원하는 만큼 입을 크게 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상관하겠습니까?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그의 영감으로, 실수 없고, 실수 할 수 없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권위와 용기를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삶에 관하여 그가 주신 설명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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