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Do We Know Bible is True(I): Ch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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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치 코드의 실재적 주장들에 관하여

“사실…. 이 소설의 그림, 건축, 문서, 그리고 비밀 의식들의 모든 묘사들은 정확합니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리고 논란이 많은 책들 중 하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댄 브라운의 액션-스릴러는 문화적 현상이 되었고, 예수님에 대한 많은 언급들로 인해 선풍적인 논쟁을 시작하게 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재정이된 성배의 탐구와 관련되 있습니다. 댄 브라운은, 이것이 에수님이 최후에 만찬시 사용하신 컵이라는 대신, 막달라 마리아라고 주장합니다. 이야기에 따르면,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는 결혼했고, 그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임신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무리들 중 마리아의 역할을 시샘했고, 그녀는 두려움에 프랑스로 도망가서, 그녀의 후손들은 결국 프랑스 왕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메세지를 바꿔서 교회의 가부장제가 여자들을 억압하게 합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그들의 주장과 반대되는 모든 문서나 증거들을 파괴하려고 했습니다.

시온의 수도원이라는 비밀 조직이 이 진실을 추종자들에게 전승했고, 그들 중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아이작 뉴튼같은 훌륭한 업적을 남긴 과학자들과 학자들이 있습니다. 브라운은 다 빈치가 그의 예술작품, 특별히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 단서를 남겼다고 주장합니다. 이 책은 그림에서 예수님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사도 요한이 아닌, 막달라 마리아라는 생각을 중심으로 쓰여 졌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지 소설일 뿐이죠, 그럴까요? 누구나 이것이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왜 그 주장을 반박하는데 시간을 낭비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소설입니다. 그러나 브라운의 처음 “사실”은 이 소설의 상당 부분이 사실임을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은, 예수님의 신성과 그의 일생, 그의 사역과 교회사에 대한 진실에 관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속여 왔습니다.

브라운의 사실들은 얼마나 사실적인가?

예수님에 관한 더욱 중요한 주제들을 검사하기 전에, 브라운은 가장 기본적인 사실들마저도 아무렇게나 대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주제들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브라운의 진실을 빗겨가는 묘한 능력, 혹은 그의 진실을 왜곡하고 그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다음은 브라운이 이러한 덜 중요한 주제들에 관해 저지른 실수들의 예입니다.

Page 140- 141 의 표.

교회사를 다시 쓰다.

다빈치 코드는 “역사는 항상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라고 하는, 일반적이지만,  틀린 믿음을 반복합니다. 이 생각은역사의 정확한 관점은, 승자가, 그 자신들을 가장 잘 조명하기 위하여 왜곡하기 때문에, 결코 알려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역사가 항상 승리자들에 의해서만 쓰여졌나요? 혹시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우리가 어떤일이 일어났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잘 알려진 1세기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패자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정복자 로마인들에게 포로로 잡혔던 유대인 군사 지도자 였습니다. 로마군의 포로로서, 조세푸스는 그가 목격한 많은 사건들을 기록했고, 가장 중요한 초기 역사가들 중 한명으로 여겨집니다. 더우기, 누구나 편견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어떤 역사가가 실재로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보고했을 가능성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교롭게도, 만일 브라운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의 주장은 그가 역사를 다시 쓰려는 시도를 반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역사가 오직 승자에 의해서만 쓰여졌기 때문에,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브라운이,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다는 것을 포함한 독단적인 주장을 할 수 있겠습니까? 브라운의 주장이 이치에 맞으려면, 그는 그의 주장들에 관한 정확한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주장이 이것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댄 브라운은 교회 역사를 완전히 오해했고, 왜곡했습니다. 그의 진짜 목적은 2,3 세기에 유명했던 신앙인, 영지주의를 장려하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영지주의는 육적인 세상은 악하며, 사람은 비밀스러운 지식을 알아냄으로써 계몽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역사를 수정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주후 325년 니케아 공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브라운에 따르면, 여기에서 예수님이, “상대적으로 대등한 투표”에 의해서 하나님으로서 선포되었고, 성경이 편집되었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그는 사실에 전혀 근접해 있지 않습니다.

니케아 공회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실은, 유명한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의 기록으로부터 알려졌습니다. 니케아에서의 토론 중 하나는, 예수님의 본성에 관한 것이긴 했습니다. 아리우스라는 사람의 가르침으로 인해, 몇몇 사람들은 예수님 자신도 창조되었고, 그 다음에 다른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아리아니즘(Arianism)이라고 하는 이러한 믿음체계는 아다나시우스 및 많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반대되었습니다. 결국, 318 명의 주교들이 니케아 신조에 관해 투표를 할 때 출석했고, 316 명은 예수님의 완벽한 신성을 확증하고 아리아니즘을 거부한 니케아 신조에 찬성했습니다. 아리아니즘에 찬성한 것이 확실한 두명의 주교는 투표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브라운이 주장하는 것 같이 “상대적으로 대등한 투표”가 아닙니다.

브라운의 책의 더욱 웃긴 주장들 중 하나에서는, 리 티빙이라는 “성배 역사가”는, “신약에 있어서 80개 이상의 복음이 고려되었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역설!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은, 이교도인 로마 황제,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수집되었다” 고 말합니다. 콘스탄틴이 공회를 소집한 것은 맞지만, 니케아 공회로부터 나온 그 어떤 일차문서도, 성서 정전에 관해 논의되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80 개의 경쟁적 복음이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2,3 세기의, 몇개의 초기 영지주의 문서만이 복음이라고 불렸는데, 진리복음 (The Gospel of Truth), 도마복음(The Gospel of Thomas), 빌립복음 (The Gospel of Philip), 이집트복음 (The Gospel of Egyptians), 그리고 마리아복음 (The Gospel of Mary)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성서 정전에 포함되려는 논란을 일으킨 적은 없습니다. 그것들은 고려된 적조차 없습니다. 80개의 복음서들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단 하나의 책도, 그 책들의 이름에 나온 저자가 기록한 이 아닙니다.

소설의 한 시점에서, 티빙은 소피에게,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가 결혼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빌립복음을 읽어보라고 이야기합니다. “구원자의 동반자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녀를 모든 다른 제자들보다 사랑했고, 그녀의 입에 키스를 하곤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이에 화가 났고, 반대의사를 표현했습니다”. 티빙은, “모든 아람어 학자들이 당신에게 말할 것처럼, 그 당시 동반자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배우자를 의미했습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빌립복음은 매우 오래 되었으며, 몇몇 구멍이  있습니다. 우연히도 “그녀에게 자주 키스하였다”는 부분 바로 다음에 구멍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문서에 의하면, 예수님이 이른바 그녀의 몸 어디에 키스를 하시곤 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손일수도 있고 이마일 수도 있습니다. 둘째,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서는 콥틱(고대 이집트로부터 온)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문서 또한 아마도 원래 기록되었던 그리스어의 번역본일 것입니다. 따라서, 아람어 학자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보통 배우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는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그 책의 또다른 문제점으로 이끕니다. 댄 브라운은 교회사를, 그가 “거룩한 여성”이라고 부르고, 고대의 이교도적 문화가운데 숭배받았던, 여성에 대한 기나긴 탄압으로서 묘사합니다. 교회는 그 태동기때부터, 실수한 부분들을 분명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교회는 실수를 저지르는 죄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른 어떤 믿음 체계보다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켜 왔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창세기 1:26-27).

브라운은 그 자신이 그의 북에서 “거룩한 여성”, 그리고 “여신”이라고 이야기함으로, 여성을 격상시킨다고 생각합니다. 그 책의 주인공인, 로버트 랭돈은 소피에게, “고대인들은, 남성이 거룩한 여성에 대한 육욕적 지식을 얻기 전까지는 영적으로 불완전하다고 믿었습니다. 여성과의 육적인 결합은, 남자가 영적으로 완성되고, 궁극적으로 신성한 지식을 얻게 되는, 유일한 방법으로 남아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표면적으로, 이것은 여성의 지위를 남성보다 격상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사실 이보다 여성에게 더 모욕적인 것을 상상하기 힘듭니다. 젊은 남자에게, 그들이 신성한 지식을 얻게되는 유일한 방법이 여성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수많은 여성들이 단지 목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사용될 것입니다. 아내를 마치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셨듯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대신(에베소서 5:25), 다빈치 코드는, 여성을 섹스의 도구로 사용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댄  브라운은 독자들로하여금 여성을 압제하는 데 있어서, 기독교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믿게끔 하려 합니다. 그러나, 영지주의 책인, 도마복음의 다음 언급을 고려해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마리아가 우리를 떠나게 하십시오. 여자는 살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녀 또한 너희 남자들처럼, 살아 있는 영이 되도록, 그녀를 남성으로 만들기 위해 앞장서겠다. 남성이 되는 모든 여성들은 천국으로 갈 것이다’”. 이러한 영지주의 본문은 여성이 남성으로 되기 전까지는 – 그것이 뭔소리던간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반면,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창세기 1:26-27), 우리는 모두 범죄하였으며, 우리 모두는 구원받을 필요가 있으며 (로마서 3:23),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은혜만, 믿음을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갈라디아서 3:28, 에베소서 2:8-9) 구원 받았다고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모든 여성은 그녀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디자인 되었습니다. 그녀는 구원받기 위해 남자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어떤 남자와 똑같이, 그녀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다는 브라운의 주장은 어떠합니까? 결국 결혼은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었고, 예수님이 결혼하시는 것이 아무 문제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결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올바른 상황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는 것이 죄가 아니기 때문에(고린도전서 7:28), 이것은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남편이 아내와 함께할 때, 그들은 하나의 살이 된다(창세기 2:24)고 가르칩니다. 이는 예수님의경우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죄가 없으셨고, 마리아도 물론 포함한(누가복음 8:2), 죄인과 “하나의 살”이 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공격

“티빙은,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예수님에 관해 우리에게 가르친 거의 대부분이 거짓이다’라고 반박했습니다.” 다빈치 코드는 예수님의 급진적 재정의를 제시합니다. 예수님이 온전한 하나님이요 온전한 사람, 하나님의아들, 그리고 삼위의 두번째 위가 아니라, 댄 브라운은 예수님이 단지 하나의 인간이라고 주장합니다.

“ ‘내 소중한이여,’ 티빙은 선언했습니다, ‘역사의 그 순간까지(니케아 공회),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영원히 살 수 없는 선지자로서 비쳐졌습니다…. 위대하고 힘있는 사람, 그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살 수 없는 사람’”

우리는 이미 니케아 공회가 압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확증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생각이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그것이, 브라운의 주장대로, 콘스탄틴의 때에, “그들의 권력을 팽창하기 위해” 교회에 의해 발병된 것입니까?

주교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확증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 정확하게 예수님이 자신에 대하여 주장하신 것이고, 신약의 저자들이 가르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니케아 공회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계속된, 초대교회의 견해였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셨다.

예수님은 그의 신성을 여러번 확증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30에서,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들은 돌을 들어, 명백한 신성 모독으로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왜 예수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왜냐하면, 사람인 네가, 하나님이 되려 하는도다” (요한복음 10:33) 고 대답했습니다.

요한복음 8:58에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여기에서 예수님은 구약의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셨고, 또다시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요한복음 18:4-6에서 예수님이 잡히실 때, 그는 다시금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에게 적용하셨고, “내가 그로라(I am He)”고 말하셨습니다. 여기서 그(He) 라는 단어는 원전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다시금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을 위하여 도용했고, 이번에는 군대와 장교들이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마태복음 9:2, 누가복음 7:48).  그는 마비된 사람들과 (마가복음 2:11),  문둥병자(마태복음 8:3), 그리고 소경(요한복음 9:6-7)을 고치셨습니다. 그는 자연을 다스릴 능력과 (마태복음 14:25,32), 죽음을 이길 권세가 있으심을(마태복음 9:25, 누가복음 7:14-15, 요한복음 11:43-44) 보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기적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이셨고, 하나님이심을 명백하게, 큰 소리로 증거합니다.

신약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한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말씀의 정체에 대한 혼란이 있지 않도록,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고 덧붙였습니다.  사실, 요한은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31)고 밝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시고 바다의 폭풍을 잠잠케하신 것을 목격한 후, 그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마태복음 14:33) 라고 단언했습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무엇을 생각하는지 물으셨습니다. 몇몇 대답 이후, 예수님은 직접,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마태복음 16:13-16)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Lord Jesus Christ” 라고는 말을 그의 편지에서 사용했고(베드로전서 1:3, 베드로후서 1:8, 11,14,16)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인했습니다(베드로후서 1:17). 도마가 (자주 의심하는 도마로 불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요한복음 20:28).

사도 바울은 반복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했습니다. 로마서 1;3에서 그는 예수님을 “우리 주”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불렀습니다. 골로새서 2:9 에서 그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기록했습니다. 빌립보서 2:10-11에서, 그는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었다.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고, 따라서 실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할 대, 문제는 끝납니다. 그러나 댄 브라운은,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신적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로 분열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다시금, 브라운은 실수를 범합니다. 니케아 공회 이전의 몇몇 교부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한  목록이 있습니다.

이그나시우스 (A.D. 105):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형태로 나타내셨다.”

클레멘트 (A.D. 150):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

저스틴 마터 (A.D. 160): “우주의 아버지는 아들을 가지고 계시다. 그리고 그 아들조차 하나님이시다.”

이레내우스 (A.D. 180): “그는 하나님이시다. 그 이름 임마누엘이 이것을 나타낸다.”

테툴리안 (A.D. 200): “그리스도 우리 하나님.”

오리겐 (A.D. 225): “그 누구도 기분이 상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구원자 또한 하나님이시다.”

노바티안 (A.D. 235): “그는 단지 인간일뿐 아니라,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싸이프리안 (A.D. 250): “우리가 할수 있는 한, 분명히 그리스도 우리 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

메쏘디우스 (A.D. 290): “그는 진정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시다.”

락탄티우스 (A.D. 304): “우리는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는다.”

아르노비우스 (A.D. 305): “그리스도는 이 모든 기적들을, 그의 귄위의 상속받은 능력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온당한 의무로써, 행하셨다.”

이 목록에 더 많은 이름들이 추가될 수 있지만, 이것들은 에수님의 신성이 콘스탄틴과 초대 교회가 권력을 잡기위한 시도로써 지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마지막으로, 댄 브라운의 등장인물인 티빙은, “콘스탄틴의 공정하지 않은 정치적 시도는 예수님의 일생 대부분을 깎아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이 날조되었다거나, 그가 이 땅을 거닐며, 수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영감을 불어 넣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빼앗고, 따라서 예수님이 몇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 “그리스도의 일생 대부분을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브라운이 그의 소설에서 시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세월의 시험 앞에 굳건히 설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24:35)고 말씀하셨습니다.

결론

다빈치 코드에서 발견된 많은 실수들과 거짓말들을 반박하기 위하여 많은 책들이 쓰여졌습니다. 지금 제시된 간단한 요약은 댄 브라운의 소설이, 비록 그가 역사적 묘사가 완전히 정확하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거짓으로 가득차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쉽게 확인될 수 있는 간단한 “사실”에 대하여 틀렸습니다. 그는 기독교 역사를 오해했으며, 최악으로 조명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거짓말을 했으며,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명예를 훼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 역사의 정확한 기록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해도 됩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그가 누구이신지 주장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살을 입고 오셔서 이 세상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3일후에 부활하신 분입니다. 남자가 여자와의 성관계를 통해 신성을 이룰 수 있다는 브라운의 주장과는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24)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젠가 예수님은 그가 창조하신 이 세상으로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믿고 신뢰한 사람들은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에수님의 자비로운 영생의 약속을 거부한 사람들은 그와 단절되어 영원히 고통당할 것입니다. 댄 브라운의 말은 사라질 것이나, 예수님의 말씀은 영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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