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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과 2장의 차이점

창세기 전반부에 관하여 자주 받는 질문 하나가 있다. 바로 창세기 1장과 2장의 내 용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다. 특별히 이 두 장 사이에 창조의 순서에 관 한 것이다. 이 질문은 창세기가 역사적 사실을 담은 기록이 아니라고 하는 타협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빠지지 않고 지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 부분에 대 하여 비교적 자세히 다루어 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1. 동물과 사람 창조의 순서
창세기 1장은 동물은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고 사람은 이들이 모두 창 조된 후에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반면에 2장은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 령이 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 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 라”(7, 8절)라고 한 다음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 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지으시고… 그것 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19절)고 기록 하고 있다. 여기서 2장에는 1장과 달리 인간을 동 물들 보다 앞서 지은 것 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단지 인간의 창조에 대한 언 급을 한 후 동물 창조를 언급했을 뿐이지 창조 순 서가 아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히브리 어 동사에 관하여 다룰 필요가 있다. 히브리어는 동사(특별이 행위를 묘사하는 동 사) 자체가 한국어나 영어와 같이 시간성에 시제를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끝 났느냐 아니냐의 완결성에 초점이 맞추어 있다. 그러므로 그 행위의 순서는 단어 자 체보다는 전체 문맥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과 같 이 명확한 순서가 명시된 창세기 1장에서 답을 찾아야 바른 해석이다. 이런 이유 때 문에 진화론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유대 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전혀 문제점을 갖지 않았다. 그 전체 문맥으로 볼 때 순서는 창세기 1장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히브리어 동사의 특징 때문에 유대 학자들은 창세기 2장 19절의 동사를 ‘지 으시고(formed)’가 아닌 ‘지으셨던(had formed)’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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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는 역사를 서술한 것이지 히브리 시가 아니다

“왜 당신은 창세기를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창세기는 일종의 히브리 시가 아닌가? 그것을 진짜 역사로 취급할 필요가 없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창세기 1장에 “보시기에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그대로 되니라” 등 반복 되는 구절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실제로 많은 신학교에서 이와 같이 가르치 고 있으며, 이런 문학적 접근이 대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 면 창세기는 히브리 시로 분류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의 내적 근거를 바탕으로 문학 적 접근을 시도하더라도 창세기가 시일 수 없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한 마디로 히브리 서술형의 산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창세기는 실제 역사의 기록일 뿐이다.

히브리 시와 산문의 차이점
창세기가 시로 분류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산문인지를 알기 위해서 먼저 히브 리 시와 다른 언어의 시의 차이점을 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 시는 영어 나 한국어의 시와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한국어나 영어의 시는 말의 “하드웨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즉 시가 되기 위해서 는 “소리”가 중요하다. 반면에 히브리 시는 “소프트웨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즉 소리가 아니라 “의미”가 중요한데, 소리가 아니라 사고의 대꾸(병행)가 드러난다.
예를 들어 한국의 시조로 유명한 고려 말 이방언의 ‘하여가 ’ 를 예를 들어보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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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률과 우연이 하나님과 어울릴까?

진화 순서뿐 아니라 진화 과정까지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창조과학자나 지적 설계 운동가들이 확률을 통해 진화의 불가능성을 설명하는 자세까지 비판하기도 한다. 아래가 그 예들이다.

“우연이라고 설명되는 현상이 설계를 배제한다고 생각하나? … 신이 우연한 사건을 이용하여 특정한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게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신이 그렇게 의도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이런 예가 많다. 하나님이 제비 뽑기를 통해 자신의 뜻을 알려 주는 경우가 꽤 있다. 제비를 뽑아서 한 사람이 당첨되는 것은 과학적으로 볼 때 외부의 통제나 방향성 없이 발생하는 우연한 사건이지만, 하나님은 그 사건을 사용해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신다…”1

“이처럼 무작위적(또는 우연)이라는 단어의 과학적 사용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아무런 모순 없이 어울린다.”2

“하나님은 제비 뽑기나 유전자 돌연변이와 같은 특정 현상들을 과학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나도록 설계해 두셨다. 하지만 일부 무작위적 현상이나 모든 무작위적 현상에 대해 하나님은 한 가지 특정한 결과가 나오도록 정해 놓으셨을 수도 있다.”

“확률적으로 대단히 희박해보이지만, 우주의 여러 특성은 생명이 존재하기에 정확히 조율되어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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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품과 타협이론

타협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 들은 ‘우주와 생물 진화를 인정 하고 진화 이론을 수용한다’ 고 하며하나님께서수십억년동안 생존경쟁, 적자생존, 자연선택 등의 과정을 통해 진화와 멸종 을 허용하셨다고 주장한다. 또 는 “지질 시대를 그대로 인정한다” 라고 말하며 창조와 멸종을 수없이 반복 하셨다고 한다. 이와 같이 타협 이론에서 가장 쉽게 드러난 문제점은 이들이 주장하는 바가 성경 기록과 모순되는 것인데, 특별히 성경 전체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바꾸거나 부인한다는 점 이다. 아래는 성경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일관되게 보여주는예들이다.

1.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다.
‘거룩’이란 의미는 불완전, 죄, 피조물과의 구별된 완전하고 깨끗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 한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 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출 15:11)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 나님같은반석도없으심이니이다”(삼상2:2)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창 2:3). 자신의 성품을그피조물에 그대로 드러내셨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그분은 흠이 없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지 않은자들을 심판하실수 있으시다.

2. 하나님께서는 거짓이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거짓말하지않으신다.그분은추측하 지 않으신다. 실험도 하지도 않으시며 그런 시도를 할 필요가 없다. 하위의 것부터 만드실 필요도 없고 그렇 게 하지도 않으셨다. 단지 옳은 일만 하신다. 우리를 속이지 않으신다. 과거에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하지도 않으신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 분은 후회도 없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유일하게 무한히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분 이시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없으시도다.”(민23:19).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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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아버지가 둘인가?

예수님의 족보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서로 다른 이유

창조과학 사역은 단지 창조에 대한 부분 뿐만 아니라 결국 성경의 무오성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과학 영역뿐 아니라 성경 전반에 걸친 질문을 받을 경우가 종종 있다. 여기서 다룰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의 예수님 족보가 다른 이유에 대한 질문은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두 족보는 겉보기에도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중복되지 않는다. 특별히 이 두 족보를 보면 얼듯 보기 에는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의 아버지가 두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먼저 족보 전체를 보자면 마태복음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하향식으로 내려가서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로 끝을 맺는다. 반면에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가르치심 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로 시작해서 상향식으로 올라가 “아담 그 위는 하나님”으로 마무리한다. 아브라함부터 두 족보를 비교하면 다윗까지는 서로가 맞아 떨어지지만 다윗 다음부터는 전혀 다른 족보가 이어진다. 마태복음은 다윗 다음으로 솔로몬이 등장하며 왕들이 이어지지만, 누가복음에는 나단이 등장하며 왕 이 아닌 사람들로 이어진다. 마태복음에서 왕들의 이름은 여고냐(=여호야긴, Jeconiah)를 끝으로 사라지게 된다(마 1:11). 이는 여고냐의 악한 행동 때문에 다윗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다시 없을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그대로 사용 한 것이다.“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는 그(여고냐)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렘 22:30). 그러므로 여고냐 다음 사람 부터는 왕은 등장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