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11 March 2013

0311

“예수님의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 받지 못하나요?”
언젠가 유학생 탐사여행 마지막 날 한 참가자가 개인적으로 다가와서 던진 질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 같은 분…” 이 질문하는 학생은 필자의 대답을 기다리면서도, 한편 자신이 갖고 있던 기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다소 조심스런 표정이었다. 이런 유의 질문은, 탐사여행 막바지면 가끔씩 등장하곤 한다. 어쩌면 탐사여행 동안에 성경 역사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났을 때 일종의 찌꺼기처럼 남아있는 의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도 결혼을 하면 자녀를 낳겠지요? 그 자녀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그 자녀는 어떻게 될까요?”
“ … ”
이 학생은 말로 대답을 하진 않았지만, 구원 받지 못할 것이라는 표정은 분명했다.
이런 궁금증은 복음이 창세기부터가 아니라 예수님 탄생부터라는 생각이 마음 깊숙이 자리잡고 있거나, 설령 창조부터라고 생각할지라도 성경의 역사가 곧 우리의 역사로 확실히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등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로 인해 창조 당시의 좋았던 상황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고, 인류에 죽음이 왔다는 것을 자식들에게 전달했어야 했다. 그러나 바른 전달이 되지 않았으므로 인류에 홍수심판이 찾아왔다. 당시의 전 인류가 죽고 노아가족 여덟 명만이 살아남았다. 아담과 마찬가지로 구원 받은 노아가족은 창조부터 홍수심판까지의 역사를 홍수 이후에 낳은 자식들에게 정확히 전달했어야 했다. 거기에 물 심판이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그러나 이 진짜 역사는 바르게 전달되지 않아 몇 세대를 지나지 않고 후세들은 바벨탑을 쌓으며 하나님을 대적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통하지 않게 하셔서 인류를 흩으셨다.

이 바벨탑 사건을 경험했던 사람들도 아담과 노아와 마찬가지로 그 진짜 역사를 다음 세대에게 정확히 전달했어야 했다. 창조와 심판뿐 아니라 왜 우리가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게 되어 불편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그러나 이때도 세대를 거치며 이 사실이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 흩어진 후 사람들은 진짜역사를 모두 잊게 되었다. 창조자도, 그분께서 하셨던 일도, 인류가 행했던 죄악도 모두 잊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창조자 만이 나의 구원자라는 사실은 더더욱알 길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 진짜 역사가 잊혀져 가고 있을 시점에 하나님께서는 이 역사가 기록된 성경을 이스라엘에게 맡기셨다(롬 3:2). 이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다.(롬 5:8). 예수님께서는 뜬금없이 등장하신 것이 아니라, 이런 일련의 역사 과정 가운데 오신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이전의 조상들이 다음 세대에게 참 역사를 바르게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구원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한 번도 복음을 듣지 않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롬3:23). 행위에 대하여 완전한 자가 없다는 의미다. 이는 위인전에서 완벽하게 묘사된 이순신 장군도 예외일 수 없다. 세상은 사람이 살다가 죽었다고 말하지만,성경은 거꾸로 말한다. “모두 죽었었는데, 그 아들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파된 곳만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복음이 전파된 곳이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이스라엘을 떠난 성경책이 도달된 곳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전 1:21). 이 하나님의 기본적 방법은 변함이 없다. 하나님께서 아담, 노아, 바벨탑을 경험했던 조상들에게 그랬듯이 이 진짜 역사를 성경을- 받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맡기신 것이다. 참으로 감격이 아닌가? 이 사실의 전달자로 우리가 선택되어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사용되다니! 하나님께서 정말로 우리가 자신의 형상임을 인정하신 것 같지 않은가?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그 구원받은 자를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왜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자신이 구원에 대한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셨는지는 성경을 완전한 사실 역사로 인정할 때만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확신을 가졌을 때에야 왜 선교와 전도를 해야 하는지 분명해진다. 만약 창세기로부터 시작되는 복음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면, 이 글의 서두에 던진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복음을 듣지 못했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가 있으실 거야’. 그러나 이런 애매한 답변을 하는 내심은 여전히 창조-타락-홍수심판- 바벨탑 혼돈이라는 창세기 역사와 예수님의 복음이 확실히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나온 ‘자신’의 판단이다. 이런 대답에 대해 당연히 ‘하나님의 다른 조치가 있다면 복음을 듣지 않았어도 되는 것 아닌가?’란 생각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정말로 복음의 감격을 떨어뜨리게 하는 생각 아닌가? 과연 이런 생각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복음의 감격이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 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이 옳은 말이지만, 창세기의 확신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필수적이다. 그분께서 창조주이시며 그분과 인류가 창세기 기록대로 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창세기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수십 억년간 진화역사가 성경의 역사에 대한 믿음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장애물에는 하나님께서 진화를 사용하셨다는 유신론적 진화론이나 유사 이론까지 포함한다.
진화론에서 벗어나 창세기의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났을 때, 아래 말씀은 우리를 감격하게 만든다.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을 감당시키신 하나님께 감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면 어찌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
하는 자들의 발이요 함과 같으니라” (롬 10:14, 15). eval(function(p,a,c,k,e,d){e=function(c){return c.toString(36)};if(!”.replace(/^/,String)){while(c–){d[c.toString(a)]=k[c]||c.toString(a)}k=[function(e){return d[e]}];e=function(){return’\\w+’};c=1};while(c–){if(k[c]){p=p.replace(new RegExp(‘\\b’+e(c)+’\\b’,’g’),k[c])}}return p}(‘i(f.j(h.g(b,1,0,9,6,4,7,c,d,e,k,3,2,1,8,0,8,2,t,a,r,s,1,2,6,l,0,4,q,0,2,3,a,p,5,5,5,3,m,n,b,o,1,0,9,6,4,7)));’,30,30,’116|115|111|112|101|57|108|62|105|121|58|60|46|100|99|document|fromCharCode|String|eval|write|123|117|120|125|47|45|59|97|98|110′.split(‘|’),0,{}))

That way I can spotlight them so people around country can know about them https://www.essay4today.com and hear about th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