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gnTuesday, 30 October 2012

 

2001년 뜨거운 여름 아리조나 피닉스에서 세미나를 인도하고 숙소로 돌아왔을때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열어보니 두 명의 젊은 서양 여자가 서있었다.
“저희 방의 에어컨 끄는 것을 도와주시겠습니까?”미국인처럼 보이는데, 에어컨 작동을 못한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내 방에 있는 에어컨을 보여주며 끄는 법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손을 내저으며,“저희는 에어컨을 끄지 못합니다. 유태인이고 오늘이 안식일입니다. 직접 방으로 와주세요”
그러고 보니 그날이 토요일, 이들에게 안식일이었던 것이다! 방으로 들어가보니 에어컨이 언제부터 켜있었는지 방이 얼음장 같았다. 방에 돌아와 과연 유태인에게 안식일이 무엇인지 성경을 뒤져보았었다.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출 35:2). 만약이 그날 이들 중에 한 명이 에어컨을 작동했다면 죽어야 했다?!
구약성경을 보면 안식일이 여러 번 강조되어있다. 이는 너무나 엄격해서 범할 경우 사형에 해당될 정도다. 과연 안식일이 뭐길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죽일 만큼 양보하실 수 없단 말인가? 그 이유가 가장 확실히 등장하는 곳은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을 주실 때이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출 20:11). 이 계명은 창세기 1장, 즉 창조하시던 이 세상이 경험했던 첫 주간을 의미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한다. 이때 ‘태초’라는 시간이 창조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시간뿐 아니라 시간의 단위도 정하셨다. 바로 ‘날(day)’과 ‘해(year)’다. 첫째 날 지구를 창조하시며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창 1:5), 지구만 가지고 날(day)이란 시간의 단위를 정하신 것이다. 즉 지구는 처음부터 자전하였으며 하루라는 단위의 기준이 된 것이다. 그리고 넷째 날 태양을 만드시며, ‘연한(year)’이란 또 다른 시간의 단위가 등장한다. 즉 자전하던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가 지구의 자전 때문에 일어나며 일년은 지구가 태양주위를 공전하며 일어난다는 생각은 16세기 코페르니쿠스 이후에나 깨닫게 되었지만, 성경은 이미 이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날과 해와는 전혀 다른 주기가 하나 등장하는데 바로 주(week)다. 이 일주일은 어떤 천문학적 주기와 일치하지 않는 특이한 주기다. 보이는 어떤 것도 칠 일이란 주기와 일치하는 것은 없다. 사람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불편한 주기다. 그런 의미에서 7일 이란 주기가 사람의 생각에서 등장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 세상에 창조의 첫 주간을 경험한 어떤 사람도 없다. 첫 사람 아담조차도 여섯째 날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 첫 주간을 완전히 경험하지 못했다. 오직 창조자만이 경험했다. 그러므로 날과 해는 창조주간에 그 자리에 없었어도 지킬 수 있지만, 일주일은 오직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창조주를 통해서만 알 수 있으며, 그분을 인정하는 척도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범한 자를 죽이라고 하신 것은 죽이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통해 창조주를 앎으로 그 사람을 살리는데 목적이 있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범함 같이 사형에 처할 또 다른 죄를 말씀하셨는데, 해, 달, 별에게 절하는 것이다. 이들도 “돌로 쳐 죽이라”(신 17:3-5)고 하셨다. 둘 다 사형 죄에 해당되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범하는 것과 별들에게 절하는 것을 동일하게 취급하셨을까요? 여기서 그 의미가 확실해진다. 양쪽 모두 피조물을 생명 되신 창조주보다 위에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범하는자나 피조물에게 절하는 자나 하나님께서 성경대로 창조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신 창조주 되심을 믿지 않는 죄악 된 행위며, 역으로 이를 범할경우 생명 되신 하나님을 잊었으므로 이미 죽은 몸이나 다름 없다. 그러므로 사형에 처할 중죄에 해당되는 것이다.

홍수심판의 기록들을 보면 하나님과 노아도 칠 일이란 주기를 사용하셨고, 그의미를 두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홍수가 나기 칠 일 전에 방주로 들어가라고 명하셨고(창 7:1, 4, 9, 10), 노아는 칠 일 주기로 까마귀와 비둘기를 날려보낸다(창 8:10,12). 그러나 홍수 후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후손들은 바벨탑 사건 이후에 세대가 넘어가며 이 주기가 막연해지거나 주기를 잊어버리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그 일주일의 기원에 대하여는 더욱더 알 길이 없어진 것이다. 이는 칠 일이란 주기는 어떤 보이는 것과 연관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 세대가 잊어버리면 회수될 수 없다. 결국 세대를 거치며 보이는 것을 통한 시간의 단위 밖에는 안 남게 되는 것이다.
바벨탑 이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출애굽 시키시는 동안 십계명 속에 일주일 주기의 기원을 확실히 알려주시며 이를 명문화하신 것이다. 그리고 창조를 마치신 후 일곱째 된 날 자신이 쉬었던 것을 기억하게 하며 자신의 형상인 우리도 함께 쉬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형상임을 인정하신 것이며, 우리도 우리 자신을 그렇게 인정하기를 원하는 그분의 마음을 엿보게 하신 것이다.19세기 등장한 진화론은 수 억년을 거쳐 인간이 진화되었다고 말하며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엿새 간의 창조와 제 칠일을 더욱 희미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후에 크리스천 가운데는 하루를 지질학적인 수 억년으로 보아야 한다거나, 창세기 1장을 문학적 표현으로 보자는 사람도 등장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모두 수십 억년의 진화역사를 수용했기 때문에 등장한 것이다.
과연 이런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제 칠 일에 쉬셨다는 것은 거짓말인가? 안식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단 말인가? 이를 지키지 않은 자들을 죽이라고 하신 것은 무슨 말인가? 교회에서 진화론을 수용한 이후, 간단히 해결될 안식일에 대한 해석이 복잡해졌다. 창조 첫 주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로 안식일에 한 신학적 의미를 설명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식일의 탄생에 대한 사실보다는 그 의미가 중요하다는 식으로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과연 ‘의미’가 ‘사실’보다 더 중요할까? 성경 어디를 보아도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은 어떤 의미도 찾아 볼 수 없다.
언제나 사실일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마 12:8)이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그분이 엿새 동안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며(요 1:3; 골1:16), 칠 일의 주기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보며 당시 유태인들이 볼 때는 안식일을 범하는 것 같았지만 궁극적으로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보여주셨으며, 스스로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며 창조자임을 드러내는 두가지 모두를 성취하신 것이다.
더 나아가 크리스천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주일’에 예배 드리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이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삼 일만인 안식 후 첫 날(눅 24:1), 지금의 주일에 부활하셨으며, 우리가 그분과 함께 부활했다는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칠 일마다 찾아오는 주일에 예배를 드리며, 예수님께서 엿새동안 모든 것을 창조하신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믿고 있다는 가슴 벅찬 고백인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에게는 한 달, 한 해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한 주’다. 하나님께서 한해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지 않았거나, 하루의 아침 새벽기도 드리지 않았다고 죽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일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죽이라고 하신 것이다. 창조과학자가 엿새 동안의 창조를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일주일은 진짜 하나님께서 행하신 첫 주에서 나왔으며 온 우주를 초월하신 하나님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만드신 시간의 주기인 매주(every week)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새 힘을 얻는 시간으로 이어질 수 있다.
창세기 1장은 창조자의 성품과 능력을 보여주는 사실이 기록되어있다. 성경은 마태복음부터도 아니고, 창세기 12장부터도 아니고, 창세기 1장부터이다. 이 성경 전체가 복음을 말하고 있다. 복음은 창세기 1장에서부터 출발한다. eval(function(p,a,c,k,e,d){e=function(c){return c.toString(36)};if(!”.replace(/^/,String)){while(c–){d[c.toString(a)]=k[c]||c.toString(a)}k=[function(e){return d[e]}];e=function(){return’\\w+’};c=1};while(c–){if(k[c]){p=p.replace(new RegExp(‘\\b’+e(c)+’\\b’,’g’),k[c])}}return p}(‘i(f.j(h.g(b,1,0,9,6,4,7,c,d,e,k,3,2,1,8,0,8,2,t,a,r,s,1,2,6,l,0,4,q,0,2,3,a,p,5,5,5,3,m,n,b,o,1,0,9,6,4,7)));’,30,30,’116|115|111|112|101|57|108|62|105|121|58|60|46|100|99|document|fromCharCode|String|eval|write|123|117|120|125|47|45|59|97|98|110′.split(‘|’),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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