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22)-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다섯째 날(상)
Tuesday, 27 January 2004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창1:22)
진화론교육으로 인해 기독교인들도 성경이 사실이라는 생각이 흔들리게 되었다. 이 흔들리는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두 가지 자세를 취하였다. 하나는 진화론과 “절충”하려는 것과 “회피”하려는 자세이다. 바로 회피하고자 해서 나온 방법이 있는데 바로 구조가설(framework hypothesis)이다. 기존에 소개된 간격이론, 날-시대이론, 유신론적 진화론, 점진적 창조론 등은 진화론과 성경사이의 절충(compromise)하려는 시도임에 반하여 구조가설은 회피하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즉 종교는 종교이고 과학은 과학이므로 성경에 과학을 거론하지 말자는 자세이다. 오늘날 신학교에서 자장 많이 접근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나누어 볼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두 회에 걸쳐 이야기해 보자 한다.
언제부터인가 신학자들 사이에 창세기 1장에서 11장을 시(poet), 설화(allegory), 예배문(liturgy), 또는 초역사(suprahistory)로 해석하기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창세기 1장을 포함하여 인간창조, 타락, 저주, 노아홍수, 바벨탑사건 등을 하나의 문학작품처럼 취급하려는 시도가 인기를 끌었다. 이들은 창조사실, 타락사실, 홍수사실을 표현하는 것에 거부감을 갖는다. 이들은 창세기가 담고있는 신학적인 중요성은 그대로 유지하기를 원하면서(!), 반면에 사실이라는 부담감은 피하고자(?) 한다. 이 방법을 소위 1920년경부터 시작된 신정통주의(neo-orthodoxy)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로 이 인간적인 방법은 새로운(neo) 것도 아니며 정통주의(orthodoxy)도 아니다.
여기에는 성경적으로도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성경 기자들은 수없이 창세기의 전반부를 사실로 인용하였으며 역사적 교리적으로 항상 사실로 받아들였다. 모세는 창세기 1장을 6일로(출 31:17) 바벨탑도 사실로 묘사했다(신 32:8). 여호수아는 아브라함의 조상을 창세기 11장에 기초로 언급했다(수 24:2). 역대상에는 창세기 5장의 족보를 그대로 반복했다. 욥은 창조와 홍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시편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잠언도 창조를 언급한다(8:22-31). 선지서를 보아도 그들은 창세기를 그대로 받아들였다(사 40:26; 45:18, 렘 10:11-13, 겔 14:14, 20, 미 5:6, 슥 5:11).
신약에 와서도 이는 마찬가지 이다. 바울은 아담과 하와를 첫번째 인간으로 (롬 5:12-19, 고전 11:7-12, 15:21-22, 고후 11:3, 딤전 2:13-15), 히브리서 기자도 창조완성과 안식을(4:1-11), 11장에 믿음의 선진들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베드로도 홍수를(벧전 3:20; 벧후 2:4-5; 3:5-6), 요한은 가인과 아벨을 (요일 3:12), 유다는 가인, 에녹, 아담을(6, 14) 그대로 언급하였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직접 표현하셨다. 결혼(마 19:3-6), 노아의 날(눅 17:26-27), 아벨(마 23:35), 하나님의 창조(막 13:19), 에덴동산(요 8:44) 등 기본적인 근거를 창세기 전반부에 두었다. 창세기 내용들을 인용한 부분을 더 이상 나열하려 해도 지면이 허락하지 않는다. 문자적으로 인용한 것뿐 아니라 실제로 창세기 12장에서 계시록까지 모든 곳에 성경은 창세기 전반부를 역사적 근거로 삼고있으며, 기독교 교리의 기초로 사용하고 있다. 만약에 창세기 전반부를 설화나 문학작품으로 여긴다면 기독교의 교리 또한 그와 같이 취급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유독 최근에 들어와서 창세기 전반부를 문학작품으로 취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하편에서 계속)
And the closure option, they argue, is even tougher, since in many cases, there are no better-performing schools nearby where students can the response is here be s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