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좁은 길

11-13_길진리생명신학대학교에 3학년으로 입학하여, 1학기였지만 자유주의 신학이 무엇인지 그 정체에 대해서 분명히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3년 전 훈련받을 때, 선교사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것들이 적나라하게 눈 앞에서 이루어졌다. 사실보다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보다 위에 자신의 해석을 두었다. 해석없이는 계시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일부 신학자들은 성령을 말하지만 성령의 조명하심과 일하심은 부정한다. 그들과 대화하는 것은 끝이 없는 일이어서 지칠 때가 많았다.

믿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도 항상 마지막에 걸리는 것이 바로 창조인 것 같다. 창조를 성경 그대로 믿는 것은 진화론 시대에서 가장 믿음을 필요로 하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전에는 왠만한 사람들이라면 성경을 그대로 믿는 줄 알았다. 내 주위에 사람들이 언제나 그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믿고 있었는데, 그 이론들은 언제나 우종학 교수와 다른 타협이론들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말그대로 타협의 거센 바람이 우리 교회를 강타하고 있는 것 같았고, 성경에 제대로 뿌리를 박지 않고, 반석 위에 짓지 않은 교회는 금새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책의 내용이 명료하고, 강하게 느껴졌다. 이재만 선교사님의 마음은 깊이 나의 마음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말하는 과학, 즉 진화론과의 타협이 왜 틀렸는지 세 가지 본질적인 배경으로 설명해주었다.

첫 번째는 계몽주의 시대에 이성의 역할이 중요해진 내용이다. 나는 ‘교각살우(矯角殺牛)’라는 단어로 표현해보고자 한다. 종교개혁 이전부터 위클리프 등 많은 신학자들은 당시 성경 해석에 유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교회에서 일반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도록 노력했다. 종교개혁 이후부터는 성경이 성령님의 조명하심에 따라 각자에게도 깨달음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교회의 세속에 물든 전통 말고, 정말 성령님이 원하시는 성경대로의 삶을 살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곧 본질과는 다르게 성경을 스스로 해석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존재보다 자신의 이성을 앞세운 데카르트의 철학부터 스피노자로 이어지며 빠르게 확산되었고, 자연세계를 보는 새로운 안목이 생기기 시작했다. 곧바로 이성은 성경 위에 놓였다. 결국 당시 교회의 잘못들, 즉 소의 뿔을 고치려다 소를 죽이는 모양이 되고 말았다. 신학자들은 성경의 내용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기 시작했고, 하나의 텍스트로 성경을 다루게 되었다.

두 번째는 동일과정설이 큰 축을 형성했다. 이전까지는 왜 하나님께서 한 순간에 만드시지 않았을까를 고민했다면, 이제는 ‘우리의 경험으로 추론했을 때, 오랜 시간동안 창조한 것이 문제가 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간 것 같다. 라이엘의 ‘현재는 과거를 알 수 있는 열쇠’라는 말은 과학적 경험지식으로 추론한 내용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되었는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성과 경험의 추론은 더는 격변적이고, 초자연적인 성경의 내용을 신뢰하지 않게 만들었다. 하나의 큰 패러다임으로 증인이 필요없는 경험적 학문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생물들은 어떻게 다양해졌을까’라는 생각을 찰스 다윈은 오랜 지구 패러다임에 맞춰 발표를 했다. 그래서 현대 진화론을 맞춰가는 과학자들은 좀처럼 완성되지 않는 진화론을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서 완성을 시켜 놓고, 찾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최근에 우종학 교수가 학교에 강의하기 위해 왔다. 종교개혁과 과학이라는 주제였다. 그의 말을 통해서 느낀 것은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의 어떠함이나 창조의 어떠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논리로 단단해지는 것이었다. 내가 만일 이재만 선교사님보다 그를 먼저 만났다면 그의 말에서 모순을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강의를 듣고 나를 살리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여러 질문들을 적었지만, 시간이 없다고 해서 빠르게 두 가지를 질문만 할 수 있었다. 그는 ‘아담 이전의 죽음’에 대한 질문에 무조건 죽음이 죄 이전에 있었다고 답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논리를 완성시키기 위해 복음은 무어라고 말하는지 듣지 않는 것 같았다. 선교사님께서 말씀하시듯 복음과 처음부터 끝까지 상반되어 있다. 그의 따른 열매는 다 말할 수 없이 처참하게 무너져가는 교회들과 사역자들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진짜를 찾고 있는가, 진짜를 만들고 있는가? 구약 말씀에서도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치시고, 싸매시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구약은 언제나 떠나간 우리에게 돌아오라는 메시지인 것 같다. 온 만물과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 없이는 진짜 자유와 만족을 누릴 수 없고, 진정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말로 다 포용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으며, 눈에 보이는 불쌍한 감정과 눈물에 진정한 사랑이 가리워지기도 한다. 진정한 사랑은 거짓된 길, 자신이 만든 길로 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타이르고 때로는 혼내고, 치기도 하면서 돌아올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지금의 교회와 교인들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은 몇 명의 증인들로도 되지 않는 자는 쫓아내라고 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말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맞고, 편안한 방식을 취한다. 지금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할 때이다.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정확하게 지적하고,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찾도록 도와야 한다.

성경을 그대로 알 수 없게 만들어가는 세상에서 성경을 바로 볼 수 있도록 전하고 싸우는 일이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선교사님께서 한국에 오셨을 때, 나에게 해주신 많은 말씀 속에서 “말씀에 대한 순결”이 깊이 남아있다. 더욱 말씀을 바로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며,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나의 생각으로 갈 수 없는 그 길은 언제나 좁은 길이다.

 

강지훈 / ITCM 5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