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뉴스레터]

종교적 다윈주의 곧 자유주의 신학을 검토해본 결과 기독교의 탈을 쓰고 있는 다른 종교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류와 사회가 점점 더 진보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2차 세계대전과 나치즘, 파시즘, 공산주의의 야비한 독재 등을 통해 경험했을 때, 성경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타락한 이성의 자존심이 이미 계시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문서라고 치부한 성경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막았을 것이다. 그들은 키에르케고르에게서 해답을 찾으려고 했다. 이는 “신학적 철학적 분산”을 가져왔다. 신앙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 주관적 관계, 체험의 문제로 돌려놓았다. 객관적 진리는 중요하지 않으며, 개별자인 ‘나’가 영원한 ‘너’와 나누는 교제와 의사소통에서 의미가 발생한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이처럼 진리라서 믿는 것이 아니고, 관계 속에서 진리가 되는 것을 따른다. 그래서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영감’이 하나님이 그 말씀을 주실 때 일어나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말씀이 인간 영혼에 영향을 미칠 때 일어나는 것으로 믿는다. 이런 믿음은 성경의 원천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 즉 ‘계시’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고 신자의 체험에 의해 상황적으로 정의되도록 만든다. 기독교 신앙을 철저히 개인화 (분산) 시킨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영적 파괴다. 나는 실제 이 문제에 대해 직감적으로 고민을 안고 있었음을 알았다. 개인의 체험과 주관적 해석(깨달음)에 의존된 신앙 체계는 때로 정통 기독교 신앙보다 더 풍성한 영적 생활로 비친다. 그러나 언제 그것의 문제에 봉착하는가 하면, 복음을 믿지 않는 자에게 전하려 할 때다. 살아계신 하나님, 내게 힘이 된 말씀, 나를 소생시킨 성령의 역사, 내 발의 등이요 빛이신 말씀, 내 삶을 놀라운 기적과 섭리로 이끄시는 하나님, 나는 예수님이 없이는 도저히 소망이 없는 존재 등을 다 고백할 수 있어도, 어디까지나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었기에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겐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수 있고 경험되지 않을 수 있고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전도의 말문을 막아버리곤 했다.

아~ 이것이 “신학적 철학적 분산”이구나!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진리라는 근거를 상실시킨 영적 파괴가 분명했다. 창조과학 공부하면서 가장 많이 터치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특히 창세기 1~11장까지의 역사가 온 인류의 공통 역사로서 명백한 사실이고, 계시이며, 우리 존재의 본질과 역사의 방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전해야겠다는 강력한 도전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파괴된, 손상된 지성이 회복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면 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사는 일에 인생의 목적을 맞추게 된다. 2) ‘우연’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역사만 있을 뿐이므로,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하게 된다. 3) 하나님 형상의 회복과 영원한 소망보다 값진 것이 없음을 알기에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 4) 인간의 지성으로 하나님을 제한하는 무모함을 분토와 같이 여기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온전하게 알아가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영적 부요를 온전하고 풍성하게 이루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창조된 우주는 그 모든 경이와 더불어 영원에 관한 진정한 이야기,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 이야기의 배경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를 알며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을 얻으라고 부르신다. 교회는 이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근신하고 깨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할 때 세상을 이기는 믿음으로 지성을 장악하는 영적 전쟁에서 넉넉히 이길 수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 노휘성/ 과학교사, 지난 2월 25일 제4기 인턴십 과정 (ITCM) 1을 마치고 두 번째 과정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