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를 믿는 것은 지적 자살?

Categories: 김무현

Thursday, 2 December 2004

창조에 관해서 어떠한 믿음을 갖느냐는 것은 개인의 신앙에도 매우 중요할 뿐 아니라 과학과 시대정신의 패러다임(paradigm)을 잡아 나아가는 데에도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이 창조에 관한 연재를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지적설계로 이루어진 (하지만 죄로인해 타락한 모습도 아울러 보여주는) 피조세계와, 과학이란 이름으로 위장된 진화론의 모순과, 그로 야기된 문제점들을 보시고 굳건한 창조신앙을 확립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읽는 모든 책에는 저자의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저자가 알려지지 않은 경우에도 우리는 누군가가 그 책을 지었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가전제품과 생활필수품에는 제조 회사가 표시되어 있으며, 모든 건축물에는 설계자와 시공자가 있습니다. 만든 사람이 없이 저절로 생긴 것은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반드시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시대의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은 유사과학 진화론은 이러한 대전제를 부정하고 모든 피조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우연히 저절로 만들어 졌다고 주장 합니다.

진화론은 한마디로 말하면 “우주알 (cosmic egg)의 단한번의 거대한 폭발에 의해서 모든 우주와 물질과 생명이 저절로 만들어 졌다“ 고 말하는 이론입니다. 마치 “먼지와 물과 바람으로부터 수많은 시간이 걸려서 난초가 만들어졌다.”고 하는것과 같지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비라 하고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예레미야 2:27) 라고 한다며 그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첨단으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의 과학이 예레미아 선지자 때와 똑같은 모순에 빠져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과학적 가설과 추론에 불과한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로 믿고 있으며 모든 정규 교육과정에서도 진화론이 부정될수 없는 진리인 것처럼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규 교육과정을 통하여 진화론에 세뇌되어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혼란스러워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유신론적 진화론”이란 허울좋은 타협안을 만들어 놓고 자위하기도 합니다. 기원에 관한한 창조와 진화 두가지 가능성 밖에 없습니다. 창조가 참이면 진화는 거짓이요, 진화가 참이면 창조가 거짓입니다. 서로 상반되는 두 대전제가 동시에 진리일수 없다는 것입니다.

18세기의 신학자 윌리엄 팔리(William Paley)는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시계공논증이라는 것을 통해서 자연의 지적설계를 설명하였습니다. 즉 길을 가다가 만약 시계를 하나 발견하면 그 사람은 시계를 바라보며 이 시계를 만든 시계공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듯이, 시계보다도 훨씬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설계된 생명들을 바라볼 때는 반드시 창조자가 있을 것이라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후 진화론이 과학의 패러다임으로 자리잡혀 가고 있을 즈음에 다윈의 불독(Darwin’s bulldog)으로 널리 알려진 신다윈주의의 지도자인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눈먼 시계공(The blind watchmaker)“ 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모든 생명은 누적된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의 결과로서, 설계논증은 낡고 비과학적인 것임으로 이것을 다시 거론하는 것은 과거의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시간낭비에 불과하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마치 바벨탑을 쌓으며 “자, 성과 대를 쌓아 대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창세기 11:4) 으쓱대면서 하나님 자리에 앉아 보려 했던 인류의 교만함을 다시 연상케 합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인본주의를 대표하는 리차드 도킨스의 도도하고 교만한 기대와는 반대로 오히려 진화론의 문제점들이 하나하나 드러나며 그 기둥들이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한편, 첨단화된 분자생물학을 통하여 DNA의 구조와 엄청나게 복잡한 유전자코드(genetic code)가 해석되면서 마이클 베히(Michael Behe)의 “다윈의 블랙박스(Darwin’s blackbox)“ 나 필립 존슨(Phillip Johnson)의 ”다윈주의 부수기(Defeating Darwinism)“, 윌리엄 뎀스키(William Dembski)의 ”설계추론(The design inference)“ 등 전능자의 지적 설계가 과학적으로 더 타당한 것임을 보여주는 책들이 연속적으로 출판되며 지적설계운동이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추세에 비추어 최근에 오하이오 주의 교육지침에서는 진화론과 함께 진화론의 문제점들도 함께 다루어야 한다고 권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의학자이며 컴퓨터공학자인 마크 이스트맨(Mark Eastman)과 찰스 미슬러(Chuck Missler)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창조(The creation beyond time and space)” 라는 저서를 통해 “다윈 이후 수세기 동안 창조를 믿는다는 것은 지적자살을 기도하는 것(committing intellectual suicide)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져 왔으나 성경비평이 가장 극심했던 20세기에 걸쳐, 그 전의 인류역사 모두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창조를 뒷받침해주는 자료들이 발견되고 축적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라고 지적한바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전제합니다. 과학자들에 대해서 당신은 어떠한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편견이 없고, 객관적이고, 항상 진리만을 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당신이 그렇게 믿고 있다면 당신도 이미 과학주의(과학의 우상)에 물들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과학자들도 우리와 같은 한계성을 지닌 사람들이며, 그들의 의견은 시대에 따라 변하며, 배경신념하에 연구하므로 객관적이지 못할수 있으며, 특히 실험실에서 증명할 수도 없고 자연계에서 관찰할 수도 없는 기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토마스 쿤(Thomas Kuhn)은 “과학세계에서는 절대적인 진리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패러다임이 지배한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지적대로 과학자는 그시대 패러다임의 절대적 권위와 영향력 하에서 연구에 임하게 됩니다. 아인슈타인도 “과학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잡다한 감각자료를 기반으로 선택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반드시 주관적 요소가 개입되게 되어있다.”고 했습니다.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도 “관찰자는 언제나 거기(어떤 주관적 견해)에 있어 결론을 만들므로 그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프랜시스 쉐퍼도 “과학자는 일정한 사고방식의 틀을 갖고 그 안에서 실험을 고안하고, 관찰결과를 배열하고 결론을 맺게된다.” “심지어 현대과학은 사회학적 과학의 성향을 갖고 있는데, 즉 객관성을 거의 확신하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얻고싶어하는 사회학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자신들이 요구하는 어떤 결론으로 쉽게 도달하게 된다.”고 지적하며 그 예 중의 하나가 진화론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이 연재를 통하여 진화론은 과학적 사실인가? 이 피조세계에 전능자의 창조와 설계의 흔적이 있는가? 또한 진화론으로 교육받은 우리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성경에 적힌 사실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창조과학에서 성경에 근거해서 주장하는 것들은 과연 과학적사고체계 로도 설득력이 있는가? 기독교인으로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계속 생각해 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창조과학 사역을 “창조를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이려는 무모한 시도”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진화가 과학적으로 증명될수 없듯이 초월적 창조도 과학적으로 증명될수 없습니다. 다만 로마서 1장 20절 말씀처럼 피조세계에 남겨놓으신 전능자의 설계와 창조의 흔적을 추적하며, 다른 한편으로 진화론의 모순과 불가능성을 드러내고 알리는 사역인 것입니다.

Author: 김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