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세계관(6) 이신론무신론으로 가는 징검다리

Categories: 이재만 회장

지난 호에서는 교회가 타락함으로 인해 교회 밖에서 등장한 계몽주의, 즉 교회와 성경을 벗어나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철학의 등장에 대하여 다루었다. 계몽주의는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배제해버렸기 때문에 얼마 안되어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자연주의(naturalism)로 이어졌다. 자연주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배제한 분명한 무신론이다.

무신론으로 넘어간 자연주의를 다루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이신론(理神論, deism)이다. 이신론이란 창조자인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는 사고이다. 즉 하나님을 마치 시계처럼 우주를 만든 존재로 인정하면서도, 만드신 다음에는 우주나 우리의 삶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존재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더 이상 역사의 주관자도 아니며 기적도 행하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 따로 사람 따로의 이분법적 신앙이다.

‘자연주의’는 설명이 필요 없는 무신론이다(이 글에서 무신론은 ‘성경’의 하나님을 버린 자세를, 유신론은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유신론’에서 ‘하나님은 없다는 무신론’으로 바로 넘어가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이는 자신이 믿고 있던 존재를 바로 버린다는 것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한동안 자신이 믿고 있던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옳은지 고민도 하고 그 신앙을 버리게 되는 핑계가 필요한 데, 그 과정이 바로 ‘나에게 관여하지 않는 신’을 믿는 이신론이다. 이와 같이 이신론은 유신론에서 무신론으로 넘어가는 과정인 일종의 징검다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상관하지 않는 이신론적 하나님은 필요하지도 않고 엄밀히 하나님도 아니기 때문에 논리성도 없고 오랜 기간 지속되지도 않는다. 결국 얼마 안 되어 무신론적 자세로 쉽게 이동한다. 이신론적 자세는 시대적 분위기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믿다가 신앙을 버리게 되는 각 사람이 겪게 되는 개인적 과정이기도 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신론은 자신이 스스로 만든 신을 믿는 것이 기 때문에 이미 무신론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신론적 위치에 있을 경우 사회나 대부분의 개인은 이 자세를 신앙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신론적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할 뿐 아니라, 부모를 따라 출석하 는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자녀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 만약 이신론적 위치에 있을 때 유신론으로 빨리 돌아가지 않는다면 예외 없이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 오늘날 진화론적 교육으로 인해 성경에 대한 신뢰를 버린 자녀들이 신앙적 고민이나 교회를 떠나는 핑계가 있을 터인데, 이는 이신론적 신앙의 위치라 할 수 있 다. 이는 시대를 막론하고 크리스천 부모나 교회 리더가 반드시 감지하고 조치를 취해야 할 부분이다

앞서 계몽주의 철학자로 다루었던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 프랑스의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몽테스키외 남작(Charles Montesquieu, 1689-1755), 볼테(Voltaire, 1694-1778), 라메트리(Julien La Mettrie, 1709-1751) 등은 이신론적 자세를 갖고 있었다. 이들의 이신론은 하나님을 수용하는 분량이나 하나님의 정의에 따라 스펙트럼이 아주 넓었다. 예를 들어 같은 이신론 안에서도 존 로크는 성경에 대하여는 신뢰하는 자세를 보였던 반면, 볼테르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기독교에 대하여 아주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자신의 이성을 하나님보다 위에 두었기 때문에 자신뿐 아니라 그 시대에 사는 많은 사람을 성경에서 떠나게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성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여겼다. 이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훌륭한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이성의 근원이신 하나 님을 제외한 결과이다. 결국 후에 등장한 스코틀랜드의 흄(David Hume, 17111776), 프랑스의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독일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독일) 등의 철학자들은 하나님을 떠난 무신론자가 되었다.

성경은 이신론을 신앙이라 말하지 않는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은 인류 역사와 각 개인의 삶에 절대적으로 관여하시기를 원하시며 실제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그냥 방관만 하지 않으셨다. 사람에게 바로 복을 주시며(blessed) “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리라 ”고 말씀하셨으며(said), 채소와 과일은 그들의 먹거리가 될 것이라고 알려주셨다(창 1:28, 29). 아울러 첫 사람 아담에게 동물들을 직접 데려와서 보이셨으며 (brought them to the man to see),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두시며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령하셨다(commanded). 단지 하나님만이 아니라 첫 사람은 그분의 복을 받고 순종했다. 모든 것을 서로 주고 받는 참으로 완벽한 관계였다.

첫 부부가 범죄한 후에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다가가심은 변함이 없으셨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셨다(called). 이때 아담은 “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대답했으며, 두 부부에게 책망을 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저주하셨다(창 3:14-19). 이는 분명 사람이 행함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이 고 적극적인 반응과 조치이다. 또한 그 조치 가운데 앞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계획도 암시하 셨다(창 3:15, 19). 단지 첫 범죄 직후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보여주시고 행하셨다. 이것이 성경 66권 전체가 말하는 바이다.

문제는 타락한 이후로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행하셨는데 우리가 이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족들아…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고 말하라. 우리가 서로 재판 자리에 가까이 나아가자(가까이 와서 변론하자, 개역성경)”(사 41:1)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와서 대화하기를 원하시며 자신을 변 론하시기를 원하신다. 이어서 자신이 어떤 분이라는 것도 대답하신다.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사 41:4). 즉 자신 이 처음부터 있던 창조자이며 끝까지 일을 이루실 분이며 만대(generation, 세대) 를 이끄는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에 관여하시는 분인 것이다. 결코 창조한 후에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다. 이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로 인해 기뻐하시고 화내시며 안타 까워하시며, 우리와 언약하시며, 우리의 어려움에서 건지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며, 그분의 언약에 들어감으로 기뻐하는 삶을 산다. 또한 하나님과 우리의 모든 관계의 회복은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 도 안에 있다고 말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 39)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과 우리의 삶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분법적인 신앙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신론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철학자들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은것이다. 성경을 읽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이성을 성경보다 위에 놓는 우를 범한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그분께서 계시하신 성경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믿고 싶은 것이다. 그 결과가 하나님 따로 나 따로 식의 이분법적인 이신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는 거듭난 성도들의 고백을 찾을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표현 했다. 성도들의 간구, 성령님의 도우심, 자신의 담대함, 내 안에 계신 예수님… 여기에 성도와 분리된 하나님이란 찾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하나 됨으로 인한 기뻐함이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 르게 할 줄 아는 고로…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 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 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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