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세계관(3) 중세 교회

Categories: 1,이재만 회장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교회가 세워지고 전도가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교회는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 나라에도 세워졌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지는 곳 마다 성경에 기록된 창조자 하나님,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 죄로 인한 죽음과 고통, 창조자이시며 구원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전파하는 교회는 처음에는 어디서나 핍박을 받게 되어있다. 기존 나라에서 자신들이 갖고 있던 보편적 생각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모두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대가를 받는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대속과 내재를 통해서만 구원과 삶이 보장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 10:22, 26)와 같이 예수님 자신을 전하는 자들에게 고난을 넘어서 꿋꿋이 성경을 신뢰하고 복음을 전하면 이 진리는 주님의 섭리 하에 그 땅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게 된다

30년경 교회는 당대 세계의 최강대국인 로마에서도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교회의 숭고한 노력으로 115년경에는 로마의 거의 모든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으며, 결국 313년에는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며 크리스천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더 나아가 380년에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승인되기에 이르렀다. 수십년 사이에 교회를 가면 안되던 상황에서 오히려 교회에 가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으로 변하였다. 불법 종교였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유일한 종교가 되어버렸다. 크리스천의 고난은 끝나고 시간이 지나며 부와 명예를 얻는 사람이 되었다. 겉보기에는 교회가 가장 바라던 대로 된 것이다

중세시대(Middle Ages, 5-15세기)는 시기적으로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476년)된 시기와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이 멸망 (1453년)된 사이를 일컫는다(중세라는 시대적 구분은 동양에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 이 시기가 공교롭게도 로마에서 기독교가 국교가 된 380년 과 종교개혁이 일어난 1517년과 비슷하기 때문에 중세시대라고 하면 쉽게 중세 교회를 연상하게 된다. 로마에서의 중세 교회는 부와 명예를 갖게 되며 긴장감을 잃기 시작했다. 또한 처음 받은 복음이 변질되어 성경과 동떨어진 교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미 잘 알려졌듯이 면죄부 판매, 마리아 숭배, 사제가 성만찬 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 고해성사, 자신의 몸 을 혹사함으로 속죄를 받는 등이다. 모두 성경에 기록되지 않는 교회에서 스스로 만든 내용들이다

교회의 타락은 시대를 불문하고 성경을 떠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값 없이 받은 은혜’를 ‘값을 지불해야 받는 은혜’로 바꿀 때 시작한다. 이는 크리스천 개인의 타락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 은혜를 받을 수 있거나 은혜에 더 가까이 간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부터 타락은 시작된다. 더 바르게 살거나, 더 높은 위치에 있거나, 더 많은 학식을 갖추어야 더 주님께 가까울 수 있다는 식 으로 자신의 어떤 노력과 위치가 첨가될 때에 타락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이 노력의 첨가는 거룩함이 아닌 죄로 가득찬 자신의 인위적인 노력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이 인위적인 시도가 타락의 발단이요 가장 큰 타락이다.

엄밀히 기독교는 ‘바르게 살라’는 노력의 종교가 아니라 ‘바르게 살 수 없다’는 진리이다. 어느 누구도 거짓말, 탐욕, 간음 등의 죄에서 한 순간도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모든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다. 필자의 프로그램에서 “우리는 바르게 살 수 없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입니다” “앞으로 거짓말하지 않으실 분 있으세요?” 등의 우리의 타락한 상황을 지적할 때면 종종 “그래도 바르게 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거짓말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하지요” “구원받은 후에는 이런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아요?”라고 답하는 분들을 접한다. 교회 안에 있고, 우리 손에 성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이 얼만큼 타락한 것과 죄를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이다. 구원받았다고 할지라도 행위로는 여전히 죄인이라는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 는 것이다.

구원받은 후에 우리는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담을 통해서 사는 존재가 된 것이다. 천국 가는 확신이 있을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예수님께서 계시하신 성경을 통해서만 배우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남겨 주신 성령님을 통해 죄, 심판, 의에 대하여 꾸지람을 받는 존재이다(요 16:8). 죄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음으로 성령님을 통해 보호받는 존재가 된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결코 바르게 살 수도 없으며 옳 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결국, 의로워지는 것(칭의, justification) 뿐 아니라 크리스천으로서 성장해가는 것(성화, sanctification)도 내가 아닌 예수 님께서 해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바르게 살거나 거짓말하지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력해도 불가능한 완전히 타락한 존재다. 이것이 철저한 현실이며, 스스 로 바르게 살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예수 님께서 모든 것을 해 주신다는 것, 이것 이 궁극적으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 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해주신” 복음이다(롬 8:1).

이 순수 복음을 갖지 않는다면 교회 와 그 지체인 크리스천은 중세 교회와 같이 타락의 문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 죄로 가득한 자신의 노력이 복음을 더럽혔기 때문이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its end, 그 끝)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의 말씀과 같이 바르다고 했던 사고지만 하나님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생명과 사망의 잣대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성경이다. 중세 교회는 이처럼 하나님 보다 자신의 판 단과 행위가 우선시되었으며 자연스럽게 타락의 길로 들어선 것 이다. 현 기독교 안에도 중세 교회와 같은 그릇된 신앙이 남아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중세 교회를 비판할 때면 그 윤리적 타락 만을 지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겉으로 드러난 타락 내면에 ‘값없이 받은 은혜’에서 ‘값을 지불하는 은혜’로 바뀌었다는 점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만약 현 기독교도 이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중세 교회의 어리석음을 똑같이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교회가 타락할 경우 언제나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하나는 교회 안에서의 각성이다. 교회 안에서도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교회가 타락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도 동일하다. 중세 교회가 타락했을 때 등장한 것이 바 로 ‘종교개혁’(1517)이다. 다른 하나는 교회 밖에서 교회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등장한다. 교회 밖에서도 교회가 타락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오늘날에도 동일한 현상이다. 중세 교회가 타락하자 등장한 것이 근대의 시작으로 꼽는 ‘계몽주의’의 탄생이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호에 다루게 된다.

오늘날의 진화론적 사고는 전적으로 인간의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론을 수용한다면 성경을 부정하거나 불신하게 되어 결국 ‘값없이 받은 은혜 ’에 인위적인 노력이 첨가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로 인해 부정확하고 죄로 가득 찬 자신의 판단을 신뢰함으로써 ‘값을 지불하는 은혜’로 넘어가며 결국 교회와 개인의 타락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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