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 가설 – 창세기 전반부가 시?

Categories: 이재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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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도 말에 진화론교육으로 인해 기독교인들도 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성경이 기록된 그대로 사실이라는 생각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 이 흔들리는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두 가지 자세를 취하였다. 하나는 진화론과 “절충”하려는 것과 다른 하나는 “회피”하려는 자세이다. 지난 호까지 다루었던 유신론적 진화론류 즉 간격이론, 점진적 창조론, 다중격변론 등은 모두 수십억 년의 지구 나이를 말하는 진화론과 절충하려는 타협이론들이다. 실제로 이런 이론들은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과학적으로나 성경적으로 양쪽에 모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반면에 진화론적 접근을 회피하고자 하는 자세에서 비롯된 이론이 나왔는데 이제부터 다루고자 하는 구조 가설(Framework Hypothesis, 또는 골격 해석)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1924년 네델란드 신학자인 누릇지즈(Arie Noordtzij)에 의해 시도되었고 약 30년 후에 클라인(Meredith Kline)과 리더보스(N. H. Ridderbos)에 의해 각각 미국과 유럽에서 인기있는 이론이 되었다. 구조 가설은 한마디로 창세기를 역사적 사실이 아닌 문학 장르로 보며 상징이나 시적 표현을 찾으려는 시도다. 구조 가설은 최근 구약 신학계에서 창세기를 해석하는 가장 인기있는 방법이며 가장 마지막 시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그러나 이들이 진화란 단어를 언급하지 않아서 그렇지 구조 가설을 주장하는 근본적인 동기는 성경이 역사적 사실로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런 시도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창세기의 창조 주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젊은 지구론자들을 논박하는 것이 이 글의 중심 목표입니다…. 시간의 틀에 관한 결론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가설을 세우는 데 있어서, 과학자들은 성경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라고 솔직하게 이야기 한다.

예를 들어, 구조가설에서는 창세기 1장 창조 6일에 대하여 첫 3일의 주제가 나중 3일과 평행하게 전개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즉 첫째 날과 넷째 날은 같은 창조 사건에 대한 대응을 이루는 두 개의 다른 관점이며, 둘째 날과 다섯째 날, 셋째 날과 여섯째 날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그러나 창세기 1장을 조금만 자세히 읽어도 위와 같은 패턴이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몇 가지만 보자. 첫째 날을 보면, 단지 빛과 어둠만이 등장하지 않는다. 시간, 하늘, 지구도 등장한다. 창세기 1장 1절뿐 아니라 5절에 이르기까지 문맥은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고 비어있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던, 그리고 빛이 비춰졌을 때 낮과 밤이 반복되기 시작한 지구에 초점이 있는 것이지 어두움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첫째 날과 시적인 대구를 이룬다고 보면 넷째 날에는 오히려 지구에 살고 있는 동식물이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날에 창조된 궁창 위의 물에 대하여는 다섯째 날에 아예 언급조차 없다. 또한 물이 언급된 것은 둘째 날이 아니라 첫째 날이며, 패턴으로 보자면 물고기는 둘째 날이 아닌 바다가 창조된 셋째 날과 대응되는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어야 더 어울린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셋째 날에 바다가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섯째 날에는 바다 생물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다.

또한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창조 과정에서 환경 요소를 먼저 갖추시고 생물들을 창조하신 것이 사건이나 시간 순의 기록이 아닌 왜 시적 구조로 해석되어야 하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집에서 물고기를 한 마리 키우려 해도 어항과 물과 기타 환경적인 요소를 미리 준비하고 물고기를 어항 속에 넣는다. 이는 생명체가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미리 설계하고 고려하여 물리적 화학적 요소들을 갖추는 지성적이고 당연한 과정이다. 어떤 사람이 어항을 꾸미고 물고기를 풀어놓는 전 과정을 기록했을때, 우리는 그것을 시로 받아들일까? 아니면 일어난 사건을 기술한 일지로 받아들일까? 창세기 1장을 골격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마음 속에 이미 성경이 순서적으로 기록되었을 리 없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 이는 잘못된 편견이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문학 구조에 필요한 요소에만 집중하여 창세기에 기록된 다른 요소들을 그냥 지나치는 우를 범하게 된 것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허술한 구조 가설에 매료되는 이유도 이들과 같을 것이다. 자신이 배워왔던 진화론의 영향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성경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다.

문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신학자에게 히브리 학자 보이드(Steven Boyd)의 지적에 주목하길 권한다. 그는 창세기 1장이 시가 아닌 역사 서술로써 쓰여졌음이 명백한 이유로 히브리 역사 서술은 자주, 과거 시점의 순차적 사건을 가리키는, waw(‘and’, ‘그리고’로 번역될 수 있음)를 사용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창세기 이외에서 성경에서 분명히 역사 서술인지 시인지 분명히 구분되는 문장을 비교해볼 때 창세기 1장은 명확하게 역사 서술 방식에 일치한다. 예를 들어 사사기 4장에서 드보라와 바락이 시스라의 군대를 쳐부순 기록은 역사적 서술로써 설명되어 있지만 5장은 시적 노래이다. 동일하게 창조에 대한 시적 묘사인 시편 104편과 창세기 1장을 비교하더라도 그 차이를 쉽게 볼 수 있다. 보이드는 성경의 522 문장을 분류 연구한 결과 창세기 1장은 100 % 역사적 서술이라는 결론을 지었다.

구조 가설은 성경 자체로도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성경의 기자들은 수없이 창세기의 전반부를 사실로 인용하였으며 역사적 교리적으로 항상 사실로 받아들였다. 모세는 창세기 1장을 6일로(출 31:17) 바벨탑도 사실로 묘사했다(신 32:8). 여호수아는 아브라함의 조상을 창세기 11장에 기초하여 언급했다(수 24:2). 역대상에는 창세기 5장의 족보를 그대로 반복했다. 욥은 창조와 홍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시편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잠언도 창조를 언급한다(8:22-31). 선지서를 보아도 그들은 창세기를 그대로 받아들였다(사 40:26; 45:18, 렘 10:11-13, 겔 14:14, 20, 미 5:6, 슥 5:11). 신약에 와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바울은 아담과 하와를 첫 번째 인간으로 (롬 5:12-19, 고전 11:7-12, 15:21-22, 고후 11:3, 딤전 2:13-15), 히브리서 기자도 창조 완성과 안식을(4:1-11), 11장에 믿음의 선진들을 그대로 기록했다. 베드로도 홍수를(벧전 3:20; 벧후 2:4-5; 3:5-6), 요한은 가인과 아벨을 (요일 3:12), 유다는 가인, 에녹, 아담을(6, 14) 그대로 언급했다.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직접 표현하셨다. 결혼(마 19:3-6), 노아의 날(눅 17:26-27), 아벨(마 23:35), 하나님의 창조(막 13:19), 에덴동산(요 8:44) 등 기본적인 근거를 창세기 전반부에 두었다.

창세기 내용들을 인용한 부분을 더 이상 나열하려 해도 지면이 허락하지 않는다. 문자적으로 인용한 것뿐 아니라 실제로 창세기 12장에서 계시록까지 모든 곳에 성경은 창세기 전반부를 역사적 근거로 삼고 있으며, 기독교 교리의 기초로 사용하고 있다. 만약에 창세기 전반부를 문학작품으로 여긴다면 기독교의 교리 또한 그와 같이 취급될 수밖에 없다.또한 신학교와 교회에서 창세기 전반부를 시나 설화로 가르쳤을 때 그 다음 세대가 어떻게 되었는가? 결과는 이제까지 다루어왔던 유신론적 진화론들을 받아들였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다음 세대는 교회를 떠나가 버린 것이다! 과학적으로나 성경적으로나 그 결과로나 구조 가설을 받아들일 어떤 이유가 없다.
1. 과학적으로 옳은가? No
2. 성경 기록과 일치하는가? No
3.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어울리는가? No
4.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조화를 이루는가? No
5. 다음 세대에게 성경의 믿음을 전수했는가?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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