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팍하고 교리적인 동일과정설의 노예가 된 그랜드캐년

Categories: 이재만 회장,이충현의 번역글

p1지난 2018년 1월 “그랜드 캐니언, 오래된 지구의 기념비”(새물결 플러스)라는 번역서가 출판되었다. 원본은 “The Grand Canyon, Monument to an Ancient Earth: Can Noah’s Flood Explain the Grand Canyon?”(Carol Hill, Gregg Davidson, Tim Helble, and Wayne Ranney, Kregel, 2016)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창조과학자의 “Grand Canyon: Monument to Catastrophe” (그랜드 캐니언 격변의 기념비, Steven Austin,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1995)의 제목을 겨냥한 책이다.

두 책을 모두 제대로 읽은 사람들이라면 앞선 Dr. Austine의 책이 그 깊이와 너비에서 훨씬 뛰어날 뿐 아니라, 나중에 쓴 책에서 던진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이미 앞선 책에 대부분 들어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이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한국의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에 의해 번역되었다. 이에 독자들의 혼란을 막고 지구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 특집 기사를 준비하였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지질학적 쟁점들에 대하여 다룰 것이며, 과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차근차근 살펴볼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단지 책 자체의 문제점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우리 속에 잠재해 있는 진화론적 지식들을 벗어버리고 성경적 사고로 전환되는 훌륭한 기회가 되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먼저, CMI(Creation Ministry International)의 John Woodmorappe의 서평을 읽는 것은 이 책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여 이를 먼저 소개한다.

미국의 서남부에 위치한 그랜드 캐니언은 지구에서 가장 아름답고 지질학적 연구가 많이 이루어진 장소 가운데 하나이다.

삽화가 많고 광고가 많이 되었던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자극과 도전을 받을 것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이 책이 너무 피상적인 내용만 다루었기 때문에 약간 짜증이났었다. 독자들에게 이 책과 함께 창세기 대홍수(Genesis Flood, John Whitcomb and Henry Morris, 1961)1 와, 그랜드 캐니언: 격변의 기념비(Grand Canyon: Monument Catastrophe)2 를 비교해 볼 것을 권면한다.

이 책에서 다루어진 거의 대부분의 논쟁들은 위의 창조과학의 두 고전의 책에서 이미 답변이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리고 두 책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나머지 논쟁들도 최근 창조과학자들의 연구와 여러 지면을 통해서 이미 답변이 되었던 것들이다.
이 책 서평의 후반부에서 나는 몇몇 다른 지질학적 주제들도 살펴보았다. 그러나 동일과정설을 선호하며 타협이론을 만든 복음주의자들이 쓴 글의 모든 논리적 오류를 다루기 위해서는 책 한권의 분량이 요구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분명히 발견할 수 있듯이 이 책의 배후에는 ‘유력한 용의자들’이있다. 이들은 데이비스 영, 소위 미국 과학 연맹, 존 템플턴 재단, 그리고 바이오로고스 재단이다. 이 책은 글마다 다른 저자들이 쓴 것을 모은 문집이다. 나의 서평에서 ‘저자들 ’이라는 구절이 사용된 것은, 특정 글의 저자를 가리키고 있음을 밝혀 둔다.

정말로 새로운 것이 없다
저자들은 홍수지질학(Flood Geology)이 20세기의 발명품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실제로 역사적 증거를 간단히 살펴만 보아도 명백히 드러나듯이, 홍수지질학의 시작은 지질학이 시작하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의 논리는 타협된 복음주의적 사고의 케케묵은 관습 이상 어떤 것도 아니다. 이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믿고 있다면 그것은 사실임에 틀림없다.
– 성경은 실제적 정보(과학)에 관한 책이 아닌 영적 진리에 관한 책일 뿐이며, 그 둘은 이분법적으로 손쉽게 분리될 수 있다.
– 과학 문제들에 대한 성경 해석은 과거에 가끔 틀린 적이 있으며(갈릴레오의 예), 따라서 모든 과학과 관련된 해석들도 마찬가지다.
– 대홍수는 전 지구적이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들도 때때로 보편적 의미가 아니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등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케케묵은 논쟁의 예를 들자면, 방주의 틈을 막는 역청에 대한 것이 있다. 즉 홍수지질학자들은 대홍수 이전에 석유에 기인하지 않는 역청이 있었다고 주장한다는 식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역청은 나무에서 나온 타르가 아닌, 석유에서 나온 것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 사용된 역청이 왜 석유에서 나온 것이어야만 하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않는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사람들은 역청을 송진과 숯을 끓임으로써 만들어왔다.

이 책에 있는 이런 논리들은 타협된 복음주의자들의 생각에서 비롯된 낡아빠지고 또 낡아빠진 생각 그 이상 어떤 것도 아니다. 저자들의 주장이 옳다고 치더라도, 석유 기원에 대한 최근의 논문은 어떤 석유는 맨틀로부터 나온 무기물질로부터 유래했음을 제시한다.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대홍수 이전에 약간의 석유가 존재했다는 것이 가능하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또 다시금 민물 생물과 바닷물 생물이 대홍수 동안 동시에 생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비판을 들어야 한다. 이러한 도전은 오래 전에 해결된 문제이다. 다시금 독자들은 히브리 단어 eretz(에레츠, 땅)가 지구라는 행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단지 어떤 ‘지역’이나 ‘토양’을 지칭한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들의 해석을 적용시킨다면, 하나님이 몇 천 년 전 중동지역에서 토양을 창조하셨다는 의미인데(역자 주: 그들은 창세기가 중동 지역의 설화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 자체도 (그들이 믿는) 표준 지질학의 ‘합의된 과학’과 일치하지 않는다. 더욱이 ‘eretz’가 성경 저자들에게 ‘알려진 세상’만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는 노아 홍수가 최소한 나일강과 페르시아만 사이의 영토를 덮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해석은 전 지구적 대홍수뿐 아니라 동일과정적 지질학과도 충돌한다.

이러한 것이 타협된 복음주의적 사고에 대한 귀류법(reduction ad absurdum: 논리적 결과가 터무니 없거나 자신의 주장과 상반되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전제의 허위를 드러내는 방법)이다.

잠깐! 더 재미있는 것이 또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저자들은 실제로 갈릴레오의 사고를 가치 없게 만드는 성경의 표현에 대해(‘흔들리다’라는 같은 히브리 단어를 사용한 시편 16절 8절3 이 아닌) 시편 104편 5절4 을 인용하면서 우리 모두는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을 짓는다. 지식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여기서 웃어야 하는가?

과학자들이 동의하지 않을 때
책의 저자들은 어떤 창조과학자들의 주장을 마치 전체 창조론을 대표하는 것처럼 단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 저자들은 모든 창조론적 지질학자들이 격변적 판구조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무시한 채 격변적 판구조론이 극복하기 어려운 열 문제(heat problem)를 들먹인다. 다른 주제를 보자. 이 책의 저자들은 어떤 홍수지질학자들(나를 포함한)은 홍수물이 광역적인 구조운동에 의해 이동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을 선호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 채, 모든 홍수지질학자들이 지구를 휘도는 거대한 쓰나미로 해석한다는 것에 집착하는 듯 하다(‘대륙을 덮는 사암층’이 단 한번의 퇴적 사건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님을 덧붙여 설명할 필요가 있다. 국부적이고 광역적인 사암은 마치 기왓장처럼 중첩되어 거대한 판상의 사암을 형성시킬 수 있다. 이는 기존 지질학에서 조차 받아들인다).

저자들은 홍수지질학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의견 불일치를 들춰가면서, 진화론적 동일과정설의 허술한 증거들을 통해 자신들의 근본적인 의견의 불일치를 지적하는 홍수지질학자들을 강하게 반박한다(pp. 176-177). 이런 잘못된 논쟁은 양쪽을 똑같이 평가절하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수천 명의 동일과정설적 지질학자들을 대항하는 홍수지질학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후자의 연구 용량은 전자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다.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의견 불일치, 특별히 근본적인 주제들에 관한 것에 대한 의견 불일치는 실제로 홍수지질학자들에게 보다 동일과정적 지질학자들에게 있어서 훨씬 더 심각한 문제이다.

이것은 창조론자들 사이의 의견불일치가 모두 순수하고 발전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책의 저자들 중 몇몇은 어떤 화석층이 홍수 이전, 홍수 동안, 그리고 홍수 이후의 것인가에 대한 창조론적 지질학자들 사이의 논쟁을 비웃는다.
이는 단지 대홍수가 많은 현생 퇴적 기록의 원인이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동일과정설적 해석의 함정에 빠진 비판이다. 이 신-큐비에리즘(neo-Cuvierism, 역자주: 다중격변론)은 논리적으로 가면 결국 대홍수를 제거하는 쪽으로 귀결되며, 그러므로 신-큐비에리즘이 홍수지질학을 완전히 버린 동일과정설적 지질학 사이의 중간 기착지라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동일과정설의 구속복(straitjacket)
동일과정설의 원리는 자연의 규칙적인 패턴(‘자연 법칙들’)의 현재적 연속성, 지질학적 과정에 의한 지형들 (강, 삼각주와 같은), 그리고 그것들의 평균적 속도를 주장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홍수지질학자들 스스로도 세인트 헬렌산을 그랜드캐니언과 견줄 때 동일과정설을 사용한다며 비난한다.
이는 아주 큰 오류이다.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 현재의 지질학적 과정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동일과정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가 과거 해석을 위해 사용되는 것은 상식이다. 동일과정설이란 지질학자들의 사고에 족쇄를 채워 지구의 역사에 대해 허튼의 방식으로 점진적인 과정에 의한 해석만을 하고5, 지구의 과거에 대한 성경의 간결한 가르침은 무시하거나 달리 해석하도록 둘러싸는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 앞서 말한 것을 좀 더 명확히 해 보자. ‘현재는 과거의 열쇠이다’ 라고 하는 진부한 동일과정설의 격언을 생각해 보자.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말로 바꾸면, ‘현재는 과거의 열쇠들 중 하나’이지만, ‘현재는 과거에 대한 유일한 열쇠가 아니다’. 그것이 홍수지질학자들과 동일과정설을 섬기는 타협된 복음주의 지질학자들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더욱이, 이 책에서 타협된 복음주의 지질학자들에게 동일과정설은 단순한 정신적 상자가 아닌, 구속복이다.
몇몇 저자들의 말은 단지 이러한 속박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 확실히 보여 준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보라.
“그랜드 캐니언에서 발견되는 퇴적층들은 해수면이 연속적으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에 의해 쉽게 설명될 수 있다. 관찰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 어떤 환상적이거나 발견되지 않은 자연 현상들을 들먹일 필요가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만약 오늘날의 지질학적 과정이 그랜드 캐니언의 지층들을 설명해 낼 수만 있다면, 그 밖에 다른 것은 고려할 것 조차 없다! 이들은 발맞추어 행진하듯 오직 외길로 교리적인 동일과정설을 고수하고 있다.

저자들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반면에 홍수 지질학적 모델은 퇴적층이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형성되는 것을 포함한 많은 환상적이고 한번도 관찰된 적 없는 설명들을 필요로 한다. 노아 홍수에 관한 창세기의 기록에서 전 지구적 쓰나미, 격변적 대륙 이동, 거대한 중력 흐름, 혹은 자연 법칙의 위배에 관한 그 어떤 것들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런 추측들이 필요하다는 것이 놀랍다.”
내가 지금 21세기의 타협된 복음주의 지질학자들의 글을 읽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18, 19세기의 허튼과 라이엘, 혹은 당시의 다른 이성주의자들의 글을 읽고 있는 것인가?
저자들의 성경에 대한 이해는 비통하다. 성경이 어째서 대홍수에 발생한 모든 구체적인 것들을 언급해야만 하는가? 아울러 저자들의 대홍수에 관한 이해가 둔감한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전 지구적 대홍수가 ‘결코 본 적 없는’ 현상을 만들지 못했겠는가? 어떻게 전 지구적 대홍수가 거대한 흐름과 격변적 대륙 이동을 포함하지 않았겠는가?
왜 우리가 고요한 폭발과 같이 기적적인 ‘잔잔한 대홍수’라는 케케묵은 허튼소리를 다시금 듣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무슨 이유로 기적의 하나님(때로는 타협하는 복음주의자들도 믿는다고 공언하는)이 ‘자연 법칙들의 위배’(또는 보다 적절하게 자연법칙에 대한 추가)를 유도하지 않으실 수 있으며, 또한 ‘최소 놀람의 원칙(principle of least astonishment: 가능하면 기적은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고)’을 피할 필요가 있겠는가?
한술 더 떠서 책에서 인용된 ‘최소 놀람의 원칙’은 무신론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의 사고를 재포장한 것이다. 이성주이자 흄은 어떤 기적이라도 그 성질상 너무도 환상적 이어서 누가 그것을 말하였든지, 믿을 만하든 간에 그것은 실수이거나 거짓이어야만한다며 ‘최소 놀람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 이 책의 타협된 복음주의 저자들이 실제로 동일과정설과 그것의 ‘최소 놀람의 원칙’을 일관적으로 적용한다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거부해야만 할것이다. 결국, 과학자들은 분명히 죽은 생명체가 다시 살아나도록 만드는 그 어떤 현재 과정도 알고 있지 않으며, 그 어떤 훈련된 생물학자도 분명히 죽은 생명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관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운반된 앵무조개들과 다른 몸통 (그리고 동물이 만든 자국) 화석들
그랜드 캐니언에서 앵무조개(Nautiloids) 화석들이 발견되는데, 광범위하게 특정 방향 배열을 보이므로 흐름을 갖는 퇴적물의 운반에 기인한다고 해석된다. 이 증거에 대하여 저자들은 방향성이 약한 다른 화석들을 제시하며 이는 쌓일 당시 퇴적물의 흐름이 없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불합리한 결론이다.
먼저, 홍수와 관련된 퇴적 과정을 그릴 때 퇴적물의 흐름이 항상 일정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흐름이 약화되었을 때 조개들이 특정한 방향 없이 퇴적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일단 논의를 위해 흐름이 일정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특정한 방향성을 보이는 것은
흐름에 의한 운반의 증거이다. 그러나 특정한 방향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물 흐름에 의한 운반이 없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생명체, 특히
긴 축을 가진 것들은 퇴적물과 함께 휩쓸려 운반될때, 일반적으로 함께 끌려가는 모래 입자나 서로에게 간섭되어서 특정 방향성을 상실한다.
이제 ‘제자리에 있는’ (혹은 제자리에 있는 듯이 보이는) 화석들을 고려해 보자. 그것들은 일반적인 퇴적 사건으로 설명될 수 있는 제자리에 있지 않은 대부분의 화석들에 비해 그 수가 극히 드물다. 예상대로, 저자들은 화석 기록에서 대홍수와 일치하지 않는 화석들의 순서를 언급하고 이 주제에 관한 과학적 창조론의 입장을 희화하면서, 반창조론적 논문들은 비판없이 인용한다.
그들은 또한 이전 창조론자들의 모델들에 추가된 나의 TAB(Tectonically-Associated Biological Provinces) 모델을 무시하는데, 그것은 특별히 왜 오늘날의 식물군과 동물상이 초기 현생대의 화석 기록과 공통점이 거의 없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저자들은 암석들의 연대를 측정하기 위하여 화석을 사용하는 배후에 있는 순환논리를 어색하게 부인하려 한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부인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어떤 지층에서 삼엽충이 발견되었을 때(선캄브리아기가 아닌) 캄브리아기로 정해지고, 삼엽충은 캄브리아기에 제한된 화석이라고 주장함과 동시에 그 순환 논리의 고리는 닫힌다.
이제 이 논의를 몸체 화석에서 동물이 만든 흔적 화석으로 옮겨 보자. 우리는 다시금 척추동물의 발자국이 대홍수에 있어서 극복할 수 없는 문제점이라고 하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저자들은 이 주제에 관한 많은 창조론적 연구들을 단순하게 무시했다. 이 주제는 기초적이다. 홍수가 발생한 넓은 면적은 약간의 고도차이로 인해 연속적으로 노출, 매몰, 다시 노출을 시킬 수 있으며, 단 하나의 중간 이상 크기의 육상 척추동물은 하루에 1만 개의 발자국들을 만들 수 있다.
이런 유사한 원리는 퇴적층과 물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해양 생물에 의한 발자국 형성에도 적용된다. 땅을 파고 사는 생물들이 퇴적층을 망가뜨리는 것을 고려해 보라. 두꺼운 퇴적층 내의 각기 다른 단계에서 광범위한 생난작용이 동시에 발생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대홍수에게 제기된 다양한 지질학적 해석들
이 책은 1년 동안의 대홍수가 아닌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보는 지질학적인 여러 특징들을 틀에 박힌 지질학적 사고를 따라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의 이런 모든 결론들은 겉보기에 사실처럼 보이는 주관적 해석들을 수반한다. 그리고 그런 해석들은 모두 동일과정적 사고에 완전히 깊이 빠져 있다. 더욱이 대부분은 얄팍한 사고에 기반해 있다. 뿐만 아니라 희미하게 재생산된 동일과정적 설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저자들은 피할 수 없는 난류가 필연적으로 다른 형태의 퇴적물을 뒤섞을 것이기 때문에 대홍수는 순수한 탄산염암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논쟁을 꺼내 든다. 그러나 그 규모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이 논쟁의 하찮은 이의는 제거된다. 대홍수의 깊이가 단지 1 km 밖에 되지 않더라도, 순수한 탄산염 침전물의 면적은 100킬로미터 × 100킬로미터일 수 있다.
우리는 적어도 너비 100 킬로미터, 길이 100 킬로미터 그리고 깊이 1킬로미터의 이동하는 물을 갖는다. 물의 흐름이 직선적이기만 한다면, 그 물 안에 난류가 얼마나 심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순수한 탄산염만이 그 물 안에서 끌려갈 것이며(아마그 가장자리 만은 제외된다), 그리고 그 유속이 느려 질 때, 넓은 지역에 걸쳐 단지 순수한 탄산염만이 퇴적될 것이다(역시, 아마도 그 가장자리만을 제외하고). 순수한 탄산염 암석들은 또한 대홍수 중에 초기 과정에서 생성될 수 있다. 대부분 고체의 용해도는 압력과 무관하지만 탄산염의 용해도는 압력이 높을수록 높아진다는 것을 기억하라.
대홍수 때의 깊은 물은 탄산칼슘을 선택적으로 용해시켰을 수 있다. 이는 특별히 제안된 근원지에 이미 풍부한 탄산염이 존재할 때 더 가능성이 높다. 물이 느리고 얕아져서 수압이 낮아질 때, 방해석6 은 침전될 수 있다. 탄산염의 용해도가 압력에 의존적이라는 사실은 왜 대양에서 방해석이 형성되지 않는, “방해석 보상 깊이”가 존재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것이 약 4km 이긴 하지만.
이제 고대 카르스트(paleokarst)라고 하는 것을 고려해 보자. 소위 고대 카르스트는 암석의 층들 사이에 구조적으로 발생한 운동으로 인한 결과로서 해석되어 왔고, 각력들(breccia: 둥글지 않고 모가진 암석 파편)은 단층이나 변형 작용 없이 지각변동이 있었다면 형성될 수 있다. 소위 고대 카르스트 각력암들 또한 콜루비얼 퇴적(colluvial deposit: 바닥이 아닌 경사면에서 퇴적된 것들)일 수 있다.
앞서가는 카르스트 연구자인 시베스트루(Dr. Emil Silvestru)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모든 ‘고대 카르스트’ 해석들은 주의 깊게 다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진짜 고대 카르스트는 적용된 (긴) 시간을 고려했을 때 보존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연관된 주제로서 소위 고생토(paleosols)를 고려해 보자. 그것들 역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사실 크나우스(Knauth)는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고대의 퇴적 환경에 대한 해석은 쉽지 않다. 뚜렷한 식물의 뿌리 화석이 없음에도 그 지층에서 고생토는 동일과정설로 보려고 하는 사람의 눈에만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반박 불가능할 것이라고 하는 뿌리의 흔적조차도 고생토에 대한 동일과정설적 증거일 필요는 없다. 뿌리들은 물에 의해 외부에서 운반된 것일 수 있다.)

결 론
풍성한 삽화와 사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무신론적 지질학자들, 타협하는 복음주의적 지질학자들, 그리고 신-큐비에주의적 지질학자들이 상상해 낸, 홍수 지질학을 무효화하기 위한 오래된 똑같은 논쟁의 무비판적인 재탕이다. 그것들은, 이 책의 문맥 안에서, 다름 아닌 굳은 동일과정적 이데올로기에 실질적으로 노예가 된 타협하는 복음주의에 대한 기념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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