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 바로 알기

Categories: 최인식 회장

Friday, 9 July 2010

img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쉐익스피어가 출생한 1564년 이태리 피사의 부유한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28세의 젊은 나이에 파듀아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된다. 기하학, 물리학, 천문학 등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지구의 자전과 해를 중심으로 한 지구의 공전에 대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지동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당시의 천문학적인 이해는 BC 4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그대로 전수 받은 일세기의 천문학자 톨레미의 천동설이었다. 천동설은 해와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교황청과 종교 지도자들도 이 주장에 편승했는데 그 이유는 성경이 천동설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세속의 과학으로 성경을 해석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과학이 아닌 진화론을 보면 지금도 마찬가지다. 갈릴레오가 태어나기 21년 전이었던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는 자기의 논문 ‘천체의 회전’을 교황 바오로 3세에 증정했다.
그는 정평 있는 학자로 인정을 받고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그가 제시한 논문의 내용은 1500년 이상을 군림해온 톨레미의 천문학적인 이해를 도전하는 혁명적인 이론이었다.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돌고 있다’는 지동설은 그 당시에는 너무나 황당하여 아무도 믿으려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코페르니쿠스 자신도 그것을 증명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 후 56년이 지난 1609년에, 갈릴레오가 화란의 안경 제조상이 만든 작은 망원경으로 천체를 30배 이상 확대하여 보기 까지는 이 혁명적 이론이 사실상 별 문제가 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7년 후인 1616년에 교황청이 코페르니쿠스의 저서와 함께 갈릴레오의 지동설 주장에 금지령을 내렸다. 그 이유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종교와 과학의 상반성(Incompatibility)으로 인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성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예로 1633년 종교재판 중에 인용된 성경구절(수 10:13, 시19:1-5, 시 104:1-5, 사 40:22)을 살펴 보면 해와 별들이 지구를 돌고 있다는 천동설을 표현하는 구절은 아무데도 없다. 오히려 이사야서 40장 22절(땅 위 궁창에; upon the circle of the earth)은 둥근 지구의 지동설을 표현하는 구절이다.
갈릴레오의 주장은 많은 종교 지도자들의 지지를 처음에는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은 교계의 고위층 인사들과 가까운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쯤에는 종교계에서도 사실 새로운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때라 원래 친분이 좋은 과학자인 갈릴레오가 영향력 있는 종교계의 인사들의 특혜를 받고 있었다. 이런 점은 1633년 6월 22일 당시의 교황 어반 8세의 명령에 의해 열린 종교재판의 결과에서도 들어난다. 10명의 재판관 중 3명이 판결문에 서명을 거부한다. 재판을 강요한 교황어반 8세는 교황이 되기 전에는 갈릴레오와 신분이 두터운 관계에 있었다. 그는 집권 초반(1624년)에는 갈릴레오와 여섯 차례나 장시간의 접견을 허용했다고 한다. 심지어 자기가 교황으로 있는 동안은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에 대한 염려는 결코 하지않아도 된다고 장담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발단된 이유 중의 하나는 1632년에 출판된 갈릴레오의 ‘두개의 세계관에 대한 대화’라는 책이었다. 책 내용인즉 저자인 갈릴레오가 어떤 사람을 접견하여 서로 세계관을 토론하는데 교황을 암시하는 가상적인 인물을 써서 교황에게 모욕적인 공격을 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교황청이 금지령을 내린 또 다른 하나의 원인은 독일의 수학자 요한 케플러와 같이 갈릴레오의 주장에 동조를 한 사람도 있었으나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자기들의 권위와 사고의 틀에 도전하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반발로 말미암아 그들이 교황청에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인 방법대신 갈릴레오의 관찰을 기초로하는 새 방법은 그들에게 불안과 불만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갈릴레오와 교황청의 가까운 관계를 질시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과학계는 갈릴레오를 이단으로 몰아넣는 길 만이 그를 파멸시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리하여 마지막 판결문에는 ‘이단적인 그의 지동설을 철회하고 교황청이 지정하는 주택에 삼년 동안 연금되어 일주일에 한번씩 일곱 참회시를 외울 것’을 형벌로 받았다. 1638년에 완전히 실명한 그는 그로부터 3년 후 1642년 1월 8일에 77세를 일기로 이땅에서의 삶을 마친다.

한 개인의 새로운 아이디어가 사회의 전통적으로 기존하는 사상에 도전 할때에 기득권을 주장하는 측의 불안과 반발은 당연하다. 어떤 한 세대가 전체적으로 그들의 종교적인 신념과 성경에 대한 이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그들의 세계관을 바꾸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 당시에는 중력에 대한 이해가 아직 없던 때라 지구가 빠른 속도로 자전하면서 엄청난 속도로 태양 주위를 날고 있다는 것을 상상 할 수가 없었다. 사실 하바드 대학이 설립된 1636년 당시에도 전 교수진이 톨레미의 천동설을 고수했다고 한다. 갈릴레오의 종교재판이 신앙과 과학의 상반성에 대한 역사적인 사건인양 오늘날 진화론자 들에 인해 주장되고 있는 것은 오류이다. 마찬가지로 진화론도 신앙과 과학의 상반성 때문에 존재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오류다. 성경적인 세계관과 비성경적인 세계관의 대결일 뿐이다. 틀린 과학이 성경과 부합되지 않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다. 세속의 과학이 어떻게 말하던 성경을 말씀 그대로만 받아 들이고 가르친다면 교회는 언제나 흠 잡힐 것이 없을 것이다. 자연주의에 기초한 진화론 일색의 과학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한다. 유신론적 진화론을 공식적으로 옹호하는 가톨릭교회는 말할 필요도 없고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과 교회들이 진화론적 과학에 근거한 성경해석을 과감히 배격하는 21세기의 새로운 종교개혁이 필요하다. 톨레미의 천동설과 다름없는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교회와 믿음의 형제들은 다시 한번 성경과 진화론의 물과 기름 같은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013.jpg (205 kB)

img
img-3.jpg (205 kB)
Author: 최인식